소설리스트

천검지애-189화 (189/472)

<천검지애 189화>

189화. 만남(1)

“형님, 장사성이 형님을 계속 찾고 있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세가를 다시 증축하는 공사 현장을 감독하던 제갈신우는 제갈신책의 말에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장사성이 호남 북부 지역을 장악할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도운 그로서는, 장사성이 밀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제갈세가의 재건과 영웅회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실지로 그가 장사성을 도운 것 역시 영웅회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못 들은 척하거라.”

“저희가 폐허가 된 본가를 복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호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불리해서 찾는 모양인데, 영웅회의 명령을 떠나서 지금 상황으로는 내가 다시 합류한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진우량이 주원장에게 패한 이후 어쩔 수 없이 장사성과 손을 잡은 모양인데, 협조가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더구나 주원장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불안하겠지요.”

“견원지간처럼 으르렁대던 자들이 공통의 적을 맞아 잠시 힘을 합친다 해도 진심이 있겠느냐? 두 세력이 힘을 합칠 때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망조로 가는 지름길이지.”

“그럼 결국 주원장이 대세일까요?”

“내가 주원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민심을 얻었다는 거다. 많은 백성들이 그가 주둔한 곳으로 가려고 하고 있어. 그에 반해 장사성은 백성들에게 욕을 먹었다. 거기서 승패가 갈린 거다.”

십 년 가까이 장사성을 보필했고 그만큼 상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제갈신우의 평가는 아주 낮았다. 장사성은 욕심이 너무 많은 탓에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주원장이 우리 무림인들에게 유리할까요? 굉장히 패도적인 성격이라고 하던데요?”

“패도적이지 않은 자가 이런 시기에 대세가 될까? 영웅회에서 지금 최고 간부 회의를 하고 있어. 우명 숙부님께서도 이미 대비책을 마련하고 계실 게다.”

“우선은 기다려 봐야겠군요.”

“지금 우린 다른 생각 말고 빨리 세가를 재건하는 데에 혼신을 다하면 된다.”

“참! 요즘 소문이 자자한 천호무적검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듣긴 들었다만, 난 솔직히 그 소문이 너무 부풀려진 것 같아서 믿지는 않고 있다. 왜? 또 다른 소식이라도 들어왔느냐?”

“그가 지금 남악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남악?”

제갈신우는 검미를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남악이라면 이곳 상향과는 겨우 하루거리이기 때문이었다.

“예, 강서성에서 호남으로 넘어온 후 계속 북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올라오는 동선이 이쪽으로 지나갈 것 같다고 합니다.”

“그자가 설마 본가로 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지금 신산 형님께서 고심 중이신 모양입니다.”

제갈신산은 전대 가주인 제갈우성의 손자로, 제갈세가가 재건되면 다음 대 가주 자리에 오를 적통이었다.

“명성을 보면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직 정체도 불명인 자를 환대했다가 그자가 신분을 속인 것이 되면 우린 천하에 조롱거리로 변할 수도 있으니…… 쯧!”

천호무적검이 제갈세가의 세력권에 들어섰을 경우, 그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하느냐는 정파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무공에 대해서는 소문이 부풀려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명성을 떠나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정체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제갈신우는 그런 고수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파의 모임인 영웅회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 말은 그가 정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지금 그가 곳곳을 누비며 협행을 펼치고 많은 양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말은 그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는 정파로 위장하는 마도나 사파인은 수시로 있어 왔다. 더욱이 원나라가 쫓겨나면 부역자에게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선행을 베풀 수도 있었다.

“신책아.”

“예, 형님.”

“신산 형님은 가주가 되실 분이다. 우리는 실수를 해도 되지만, 신산 형님이 실수를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요.”

“네가 제자들 몇 명 데리고 그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만나라.”

“제가요? 만나서 뭐라고 하지요.”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극진히 대우만 해 줘라. 그러면서 지금 이곳은 본가의 증축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 다른 쪽으로 가도록 유도하거라. 그러면 만약 잘못되었을 때 너만 사과하면 된다.”

“그러면 신산 형님께는 누가 안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보고하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제갈신책은 묘안이라고 생각한 듯, 급히 제갈신산이 있는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천호무적검……. 혼란의 시기에는 여러 명의 영웅들이 난립하지만, 혼란이 정돈되면 영웅은 한 명으로 족한 법인데…….”

제갈신우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첫눈에 반하고 단번에 승복할 정도로 감탄하게 만들었던 한 청년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가 정파의 유일한 영웅이 될 사람으로 점찍은 사람.

그는 백천학이었다.

* * *

[아가씨, 주무십니까?]

객잔에 든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니, 아직 안 자. 왜?]

[종리 단주님을 만날 생각에 잠이 안 오시나 봅니다.]

[아니, 나 유모 생각 안 해.]

[그럼 무슨 생각을 하시느라 아직 안 주무십니까?]

[난 소군 생각만 해.]

[……]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는지 악불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담수련의 방에 들어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 말이 없어? 소군은 내 생각 전혀 안 하나 봐?]

[아, 아닙니다. 전 하루 종일 아가씨 생각만 합니다.]

그녀의 말에 다급하게 답을 한 악불군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막상 말을 하고 보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자 이번에는 담수련의 말이 멈췄다.

그렇게 일각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담수련이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소군.]

[예.]

[내 방으로 올래?]

[예?]

하루 종일 붙어 지냈음에도 담수련은 악불군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악불군 역시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방으로 오라는 말의 의미를 둘은 솔직히 알고나 있긴 할까?

하지만 둘의 불운일까…….

창문을 무엇인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악불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누군가 담수련을 노리고 벽력탄이라도 그녀의 방으로 던졌다면 막지 못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 정신 차려!’

자신이 정신을 놓은 것에 대해 자책한 악불군은 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작은 쪽지가 창문 종이를 살짝 뚫고 박혀 있었다.

쪽지를 편 악불군은 창밖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때 담수련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소군.]

[예.]

[내 전음 못 들었어?]

[아니, 들었습니다. 그런데 종리 단주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순간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침대를 치고 말았다. 악불군을 자신의 방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다른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단지 그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왜 꼭 이럴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가씨, 떠날 준비가 되시면 말해 주십시오. 제가 모시러 건너가겠습니다.]

[알았어…… ]

어쨌든 그녀의 방으로 온다고 하니 악불군을 보고 싶어 부른 그녀의 의도대로 된 것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 * *

형산과 연결된 종악산은 형산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에 비해 산세는 대단히 험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나무가 많아 달빛조차 들지 않는 숲속, 늑대 울음소리까지 들리는 음산한 이곳에 온몸을 흑의로 감싼 세 명의 인영이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있어?]

그때 또 다른 인영 하나가 나타나더니 숨어 있는 인영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추국, 여기야.]

그녀들은 악양에서 헤어진 사화였다.

[아가씨 봤어?]

흑란은 추국이 나무 위로 올라오자 급히 물었다.

[아가씨 얼굴은 직접 못 봤어. 하지만 악 무사님은 봤어. 몇 달 사이에 더욱 늠름해지셨더라.]

[이제 악 무사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례 아닐까?]

사화는 악양을 빠져나오면서 천호무적검의 명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가는 곳곳마다 호사가들이 천호무적검의 무용담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왔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명성이 높아지셨는데 마부석에 앉아서 백설이를 몰고 있더라고. 전혀 변하지 않으셨다는 말이지.]

추국의 말에 매향과 연화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연화는 담수련과 악불군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몇 시진 동안 기까지 불어넣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감동을 했었다.

[언제쯤 오실까?]

[악 무사님 무공이라면 내가 던진 쪽지를 분명 발견하실 거야.]

악불군의 창에 쪽지를 던진 사람은 바로 추국이었다. 악불군이 추국의 기를 감지 못했다는 사실은 ‘내 방으로 올래?’라고 한 말이 얼마나 그를 크게 흔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발견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화는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들이 숨어 있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보자 놀라 후다닥 내려갔다.

“아가씨!”

그녀들은 너무 반갑다는 듯이 담수련 옆으로 다가와 얼싸안았다. 어려서부터 자매처럼 자라온 그들이기에 그 반가움은 더 컸다.

“너희들, 반가운 것은 알지만 아가씨께 예는 갖춰라.”

악불군의 말에 사화는 급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사화, 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됐어, 일어나. 소군은 왜 애들한테 그렇게 무섭게 그래?”

“제가 무섭게 했습니까? 그냥 예를 갖추라고 한 것뿐입니다.”

“너희들 지금 소군 무서웠어, 안 무서웠어?”

“무서웠습니다.”

일어난 사화는 합창하듯 소리쳤다.

“봐, 무서웠다잖아!”

“무서우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전부터 사화가 소군이 좀 무섭다고 했어. 좀 친절하게 대해 줘. 얘들은 나에게 친자매 같은 애들이야.”

“주의하겠습니다.”

대답을 한 악불군은 사화를 보며 물었다.

“종리 단주님을 만났느냐?”

“두 분이 악양을 떠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천화궁도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당시는 장사성의 군대가 저희를 계속 감시하고 있어서 움직이지 못했는데, 얼마 전부터 감시가 느슨해져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른 잠봉단원들은 어디 있느냐?”

“종리 단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적들에게 걸리면 안 된다고 단출하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분을 아는 사람도 저희들밖에 없으니까요.”

추국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담수련은 연화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연화, 너를 이렇게 멀쩡하게 다시 만나서 너무 좋다.”

“아가씨께서 저를 위해 치료해 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살아난 것은 모두 아가씨 덕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하던 매향이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듯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백설이가 안 보이네요?”

“오다가 숲에서 풀어 줬어. 오랜만에 마음껏 뛰어 놀고 있으라고 했어.”

“여긴 늑대와 범도 있다고 하던데 괜찮을까요?”

“백설이 그게 소군이 얼마나 훈련을 잘 시켰는지, 거의 영물이 다 되어 버렸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자, 빨리 유모한테 가자. 지금쯤이면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이 우리가 사라진 것을 알고 열심히 찾고 있을 거야.”

“예, 따라오십시오.”

“유모는 지금 어디 있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계십니다. 다만 적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좀 돌아가셔야 하니까 시간은 좀 걸릴 것입니다.”

“추국.”

“예.”

“아까부터 계속 적이라고 하던데, 누구를 말하는 거야? 어찰단은 장강 이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어?”

“단주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셔서 적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무림인들은 모두 적이라 간주하고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녀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담무룡이 천하를 적으로 상정하고 계획을 짰다면 그녀가 준비하는 악불군 영웅 만들기에 크나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알았어. 우선 가자.”

악불군의 손을 잡고 사화의 뒤를 따라 몸을 날리는 담수련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더욱 어두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