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90화>
190화. 만남(2)
“언니, 사화와 아가씨께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는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어디쯤 오고 계신다고 하더냐?”
“화화루 비밀 통로에 들어섰다고 하니까 반 시진 안에 도착하실 것 같네요.”
악불군과 담수련은 종악산 악묘에 만들어진 비밀 통로를 통해 인후현 외곽의 우물을 통해 빠져나온 후 작은 상회로 들어갔다.
뒷문으로 빠져나온 그들은 창기루가 즐비한 미로 같은 작은 골목을 한참 돌다가 화화루라는 기루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반 시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그 배를 넘는 한 시진이 넘게 돌았으니 얼마나 추적에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천화궁은 대부분이 무공을 모르는 기녀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알려지는 순간 모두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종리화는 반 시진이라는 말에 초조한 듯 방을 돌았다.
그녀가 악불군과 담수련이 남쪽으로 떠난 후,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언니, 좀 앉으세요. 화화루 비밀 통로에 들어섰다면 이젠 변수는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는 정신이 든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네 앞에서 너무 가볍게 행동을 한 것 같구나.”
“언니는 가만 보면 아가씨를 진짜 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말만 유모지, 젖 한 번 물려 본 적도 없잖아요?”
“내가 유모가 됐을 때, 아가씨는 이미 젖 먹을 때가 지났었다.”
“더 어렸으면 진짜 젖을 먹일 생각이 있으셨나 보네?”
“…….”
천화궁주는 종리화가 아무 답이 없자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진짜 그러실 생각이셨어요? 천하의 혈의나찰이 그런 생각까지 하시다니, 확실히 사랑은 위대한 것 같네요.”
“그럴 생각이었다고 말한 적 없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언니, 소군이 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 아이의 명성이 거의 가주님과 맞먹을 정도가 되었는데, 예전처럼 호위 무사나 수하 다루듯 할 수는 없잖아요?”
“그 문제는 소군을 먼저 만나 본 후에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느냐? 난 그 아이가 명성이 높아졌다고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명성에 상응하는 대우를 원한다면 해 줘야겠지.”
담무룡이 남매의 세력을 이원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악불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없는 담수련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물론 무림 조직의 장이 조직에서 가장 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약하다면 수하들이 배신을 했을 때 그것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제가 보기에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아가씨를 마차에 태우고 자신은 마부석에서 말을 몰았다고 하던데, 명성이 높아졌다고 달라질 아이라면 그랬겠어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이후야. 그 아이는 어려서 잠룡세가에 들어왔고, 나오기 전까지 무공만 익혔어. 세상을 전혀 몰랐다는 말이야. 아직까지는 괜찮을지 몰라도 점점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느 순간 자신이 호위나 할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언니는 소군은 믿는다고 계속 그러더니 왜 갑자기 비관적으로 얘기를 하세요?”
“소군의 명성이 너무 높아지니까 불안해지네.”
그때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궁주님, 방금 아가씨께서 도착하셨답니다.”
그 얘기에 종리화와 천화궁주는 벌떡 일어나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다.
* * *
천화궁의 정문에서 기다리던 잠봉단원들은, 담수련이 사화와 함께 나타나자 그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잠봉단, 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됐어, 모두 일어나. 전부 건강하게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담수련은 모두가 무사한 것이 좋은지 활짝 웃었다.
몸을 일으킨 잠봉단원들은 이번에는 악불군을 보며 포권을 했다.
“악 무사님께 인사드립니다.”
“갑자기 나한테까지 단체 인사를 하고 그래?”
악불군은 좀 어색한 듯 한마디하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한 명, 한 명이 인사를 한 적은 있었지만 담수련까지 있는 곳에서 한꺼번에 인사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들도 악불군의 명성이 중원 천하에 울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악불군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다. 몸에 익은 기운을 감지한 때문이었다.
“아가씨!”
“유모!”
담수련은 종리화를 보자 너무 반갑다는 듯 소리치며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됩니다.”
종리화는 담수련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를 호위하느라 고생했지?”
“아가씨를 호위하는 일이 어찌 고생이 되겠습니까?”
“인사해라. 이쪽은 내 의자매인 예서령 천화궁주님이시다. 처음 봤을 게다.”
“예, 궁주님께 악불군 인사드립니다.”
아까부터 악불군을 감탄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예서령은 악불군이 포권을 하며 인사하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진짜 잘생겼다. 내가 젊었을 때는 왜 소군 같은 남자가 없었을까? 휴우~ 진짜 세월이 원망스럽네.”
“영 매!”
종리화가 힐책하듯 부르자 천화궁주는 알았다는 듯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난이에요. 자, 안으로 들어가지요.”
“혹시 미행한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사화 너희는 잠봉단과 함께 주위를 한 번 더 살피고 쉬거라.”
종리화는 사화에게 명을 내리고는 담수련의 손을 꼭 잡고 천화궁주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물론 악불군은 담수련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 * *
“군주님, 천호무적검이 호남에 들어선 모양입니다.”
금령사자의 보고에 서류를 읽고 있던 금잔화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쯤 왔다고 하더냐?”
“형산 부근까지 올라온 모양입니다.”
“형산?”
잠시 생각하던 금잔화는 다시 물었다.
“철뇌마궁은 여전히 행방불명이냐?”
“남무림에 있는 정보망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 거의 두절 상태입니다.”
“금령사자!”
“예!”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
“죄, 죄송합니다. 수하가 미련해서 군주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내 뜻이 뭔데?”
“그, 그게…….”
근래 금잔화의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져 금령사자는 말 한마디조차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철뇌마궁이 왜 홀로 남무림에 갔는지 몰라?”
“아, 압니다.”
“왜 갔어?”
“악불군을 잡아 오기 위해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악불군은 호남의 형산까지 올라왔고, 철뇌마궁은 연락이 두절됐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머리에 안 떠올라? 지금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데 사자라는 자가 그따위로 미련한 소리만 지껄이니, 내가 일이 잘 풀리겠느냐!”
어사대에 속해 있는 금령단은 어찰단이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여 판단과 계획을 만드는 부서였다.
당연히 금령사자는 대단히 똑똑한 자였다. 그런 그가 너무 뻔한 상황에도 정보망이 무너졌느니 하며 변명만 늘어놓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금령사자도 그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한 금잔화에게 그런 말을 하기가 힘들었고 특히, 태양천의 최고수 중 한 명인 철뇌마궁이 악불군에게 당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미욱해서…….”
“됐다. 그 문제는 내가 직접 대공 전하께 서찰을 올릴 것이니, 넌 이곳을 떠날 준비나 잘해라.”
“떠나는 것입니까?”
“절강 군부와 다루가치 모두 떠났다. 잠룡세가는 완전 고립무원이 되었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이곳을 포기하면 절강에서 벌어들이던 돈이…….”
“돈? 저번 전투에서 잠룡세가가 패한 이후, 돈이 들어오는 구멍도 다 막혀 버렸다. 이번 계획은 실패다.”
금잔화는 절강을 포기하는 것보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더욱 분한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반군의 세력이 예상외로 강해지면서 그녀를 도와야 할 군부가 맥없이 도망가고 그녀를 돕기로 했던 고수들도 결국 오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약속한 대로 태양천에서 고수들만 온다면 아직 늦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태양천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한 것이 언제였더냐? 벌써 약속을 어긴 것이 세 번째다. 이 정도면 지금 이곳으로 보낼 인원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 어디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호북으로 간다.”
“지금 호북도 반란군에 점령되어 있는데 어찌 그쪽으로 가시려고요?”
“호북은 아직 진우량의 세력이다. 그놈은 주원장에 패해 우리는 신경도 못 쓴다. 대공 전하께서 그곳에 임시 태양천 지부를 만드셨다.”
“군주님께서는 귀하신 분입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악불군 그자를 우리 편으로 포섭해야 한다. 그 일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우선 호북으로 이동한 후 악불군을 찾아나설 것이다.”
금잔화는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악불군을 포섭하는 게 더 어려워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떤 근거로 자신만이 악불군을 포섭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일까……
* * *
정청에는 악불군을 포함 단 네 명만 원탁에 앉아 있었다. 종리화는 담수련을 자신의 옆에 바짝 앉혀 놓고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거기에 천화궁주까지 끼어 있으니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악불군은 끼어들지는 못하고 똑바른 자세로 앉아만 있었다.
“소군아, 한 잔 받거라.”
한참 얘기를 하던 종리화가 잔에 술을 따르더니 악불군에게 권했다.
“지금…….”
“지금 호위임무 중이라 술은 안 된다고 할 생각이냐?”
종리화가 말을 끊자 악불군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긴, 넌 책임감 하나는 투철했지. 그런데 가주님의 명을 어기고 갑자기 남쪽으로 향한 이유가 무엇이냐?”
“유모, 그건…….”
담수련이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종리화는 손을 들어 말을 막고는 다시 말했다.
“아가씨께서 어떤 말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자신의 임무에 투철한 네가 계획에도 없던 행동을 했기에 지금 얼마나 많은 일이 틀어졌는지 아느냐?”
종리화는 악불군이 남쪽으로 담수련과 둘만 떠난 것이 홀로 결정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임은 악불군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가주님께서는 제게 아가씨를 무사히 단주님께 호위하라고만 하셨습니다.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는 전 모릅니다. 하지만 아가씨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리화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악불군의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한마디에서 담무룡의 명은 담수련보다 위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다. 그럼 그 이유를 말해 보거라.”
담수련을 무사히 모시기 위해 그랬다는데 계속 추궁만 할 수는 없었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시면서 오음절맥에 의한 이상 증상을…….”
악불군은 당시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왜 남쪽에 가야 했는지를 설명했다.
“남해성모궁에도 다녀왔단 말이냐?”
얘기를 듣던 종리화는 남해성모궁 얘기가 나오자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예, 봉황성모 어르신께서 예전 상처가 재발해 빙설초가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재발한 병은 고치셨느냐?”
“아가씨께서 빙설초를 활용해 봉황성모 어르신께서는 다행히 병을 치료하셨고, 아가씨께서도 필요한 환을 만드셨습니다.”
“다행이구나.”
대답하는 종리화의 얼굴은 여러 가지 상념이 겹친 듯 회한의 표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곧 표정을 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가씨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라고 하니 이번만은 그냥 넘기지만, 다음부터는 내게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행동은 금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유모, 소군은 개인행동을 한 적이 없어요. 다 내가 그러자고 해서 한 거라고요.”
담수련은 미안한 눈으로 악불군을 보더니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속에는 평소와 다르게 종리화를 향한 미묘한 화가 분명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