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91화 (191/472)

<천검지애 191화>

191화. 만남(3)

담수련의 반박에 종리화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러자고 했어도, 호위 무사로서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만약 소군보다 강하거나 비슷한 무공을 가진 자가 둘 이상이 나타났다면 아가씨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었겠습니까?”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잖아요?”

“압니다. 그래서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를 먼저 만나고 움직였다면 호위도 더 강화하고 천화궁의 정보망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소군을 질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혼자서 아가씨를 호위하려고 하는 것은 현 무림에선 위험할 수밖에 없으니, 개인적인 행동은 지양하자는 의미였습니다.”

종리화의 말은 사실 원칙적으로 틀린 것이 없었다. 거기다 악불군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더 이상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우린 피곤하니까 이만 가서 쉴게요.”

“하긴, 먼 길을 오셨으니 피곤하시겠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담수련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천화궁주가 급히 일어서며 문 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문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아가씨와 악 대협을 방으로 안내하거라.”

“예.”

여인이 대답을 하자 담수련은 종리화를 보며 물었다.

“우리 방이 달라요?”

같은 방향이면 두 명이나 필요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여인들만 있는 곳입니다. 소군은 남자이기 때문에 외곽에 있는 빈청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아가씨 방은 사화와 잠봉단이 보호할 것입니다.”

“그럼 나도 외곽에 있는 빈청으로 갈래요.”

“아가씨, 그곳은 아가씨께서 머물 만한 곳이 아닙니다.”

“내가 머물 만한 곳이 아니라면 소군도 머물 만한 곳이 아닐 거예요. 그리고 전 소군이 옆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자요. 혹, 이 정도도 제 마음대로 못한다면 전 이곳에 머물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강하게 말하는 담수련의 모습에, 종리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착하고 마음이 여렸던 담수련은, 담무룡이나 그녀가 부탁하면 대부분 별 반대 없이 잘 따르곤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번 생각하기에 아니라고 판단한 일에는 고집을 꺽은 적이 없었다.

여러 번에 걸친 납치 시도에도 담무룡이 담수련을 밖으로 내보낸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공양은 해야 한다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밀어붙이다가는 정말 담수련이 떠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종리화는 천화궁주에게 방을 마련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영 매, 소군의 방을 아가씨 방 근처에 마련해 주도록 해라.”

종리화의 말을 들은 천화궁주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아가씨 옆방에 준비를 해 놨어요.”

악불군과 담수련이 천화궁도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가자, 종리화는 미묘한 눈으로 천화궁주를 보며 물었다.

“소군의 방을 아가씨 방 옆에 이미 준비를 했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방을 준비한 것에 의미가 있나요 뭐?”

“내가 묻는 것이 그게 아니란 것을 알잖아?”

“언니는 평생 짝사랑만 해서 남녀 관계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요. 난 지금까지 최소한 열 명의 남자는 사랑했거든요.”

“그게 자랑이야?”

“자랑이 아니라 경험을 말하는 거예요.”

“무슨 경험?”

“사랑이요. 언니, 아가씨 얼굴 보고 느낀 거 없어요?”

“……내가 떠나기 전보다 더 아름다워지기는 하셨더라.”

“여자가 되어 가지고 여자의 변화도 제대로 못 알아보니 사랑이 제대로 되겠어요? 굉장히 건강해지셨잖아요!”

“그건 소군이 빙설초를 구해서 먹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예전에 제가 아가씨를 보았을 때는 정말 창백하고 말랐었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볼도 발갛고 살도 알맞게 붙어서 더 예뻐지신 거예요. 무려 강호행을 석 달이 넘게 했어요. 거기다 화려한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덤벼오는 적들과 싸우면서 움직이셨어요. 언니도 알지만 무공의 고수라는 우리들조차 그런 강호행을 하면 살이 빠진다고요.”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반문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선천적 오음절맥에 걸려 입맛도 없는 사람이 이 혼란한 시기에 강호행을 했는데 오히려 살이 붙고 건강해졌어요.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물론 소군이 얼마나 아가씨를 잘 챙겼는지도 알 수 있고요. 그런데 둘을 떼어 놓으려고 하면 말이 먹히겠어요?”

“둘을 떼어 놓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제가 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이 뭔지 알아요?”

“뭔데?”

“언니가 소군을 무척 아낀다는 거예요.”

“그 아이를 어려서부터 봐 왔다. 누구도 미워하기 어려운 아이야.”

“그런데 딱 거기까지예요. ‘난 너 좋아한다. 하지만 내 딸의 남편은 안 된다.’ 물론 가주님의 의중이 그렇기에 언니도 그런다고 생각하긴 해요.”

“…….”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들어 보니 무의식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현실적으로 생각하세요. 잠룡세가는 완전 무너져 버렸고 가주님께서는 생사까지 알 수 없어요. 그럼 지금 아가씨를 진정으로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언니가 가주님을 위해 사부님이신 봉황성모 어르신과 남해성모궁의 궁주 자리까지 버리신 거 잊지 않으셨지요? 더 나아가신다면 아가씨와 소군도 그럴 수 있어요.”

천화궁주의 마지막 말은 그녀에게 비수가 되었다.

봉황성모가 아팠다는 말에 그녀가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이기도 했다.

“알았다. 내가 좀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으니, 너도 이만 나가 보거라.”

“언니, 사랑은 위대해요. 그래서 천화궁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사랑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답니다.”

천화궁주는 회심의 일격을 하나 더 던지고는 나가 버렸다.

* * *

[소군.]

자신의 방에 들어선 담수련은 침상 위에 걸터앉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소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 아가씨.]

[……유모 때문에 화났지?]

[아가씨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어찌 단주님께 화를 내겠습니까? 그리고 하신 말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번 일은 분명 제 잘못입니다.]

[그래도 난 소군이 이런 대접을 받는 거 싫어.]

[아가씨, 혹시 우십니까?]

악불군은 담수련의 전음에서 울먹이는 듯한 느낌이 들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안 울어.]

[우시는 것 같은데요? 울지 마세요.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 운다니까! 그리고 다음부터는 유모가 뭐라고 그러면 소군도 따져.]

[단주님께서 잘못하셨다면 따질 겁니다. 하지만 제가 잘못했을 때는 그러면 안 되지요. 그리고 단주님께서는 세가에서 저를 가장 잘 챙겨 주신 분입니다. 아무래도 막중한 임무를 받으셔서 중압감 때문에 날카로워지셨다 생각됩니다.]

[…….]

담수련의 답이 없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졸리신 모양인데 이제 주무세요.]

[나 안 졸려.]

[답이 없으셔서…….]

[소군, 우리 그냥 도망칠까?]

[하하! 아가씨께서 이곳의 수장이신데 도망을 가시다니요. 말이 안 되지요.]

[나 그런 거 싫어. 그냥 지금처럼 소군하고 강호행 하면서 살아도 돼.]

[가주님의 뜻을 이루신 이후에 그러셔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떠나시면 저는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는 것이고, 아가씨는 불효녀가 됩니다. 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명령하면?]

[아가씨께서 명령하면 듣기는 해야지요. 하지만 저번에 명령을 내리실 때, 그게 마지막 명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내 맘이지 뭐.]

[아가씨 마음 알았으니까 이제 쉬십시오. 전 아가씨께서만 알아주시면 다른 사람은 누구도 상관없습니다.]

[바보!]

[그럼 바보는 이제 쉴 테니까 아가씨도 주무십시오.]

악불군은 바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뭐가 좋은지 미소를 짓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에게 수련은 이미 생활화가 되어 있었다. 수련이 바로 휴식인 것이었다.

담수련도 악불군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악불군이 쉰다는 것이 수련한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 *

상단의 총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담수운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종산은자의 요구 때문이었다.

상단을 차리면서 사용한 돈은 금자 이십만 냥에 달했다. 그것은 담무룡이 남긴 잠룡밀의 전 재산이기도 했다.

담무룡과 극도로 사이가 나빠진 담수운은 태산종가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는 잠룡세가로 돌아가지 않고 강호행을 즐겨했다.

몇 달씩 홀로 강호를 떠돌며 나름 협행을 해 온 것이다. 그 덕에 그에게는 태산일검이라는 명호까지 생겼지만 담무룡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담수운이 자신의 이름이나 정체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담수운에게 인생이 확 바뀌는 계기가 일어났다. 어찰단에게 죽을 위기에 몰린 무림인을 구해 준 것이다.

그는 영웅회의 산동 지부장이었던 강우일이었다.

친구 한 명 없던 담수운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날이기도 했다.

담수운 덕에 간신히 어찰단을 피한 강우일은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며 극진하게 대했다.

그렇게 우의를 다져 가던 어느 날, 강우일은 자신이 영웅회의 산동 지부장이라는 것을 말했다. 자신의 정체를 친부모에게조차 숨겨야 하는 영웅회의 규율까지 위배하며 말한 이유는, 담수운에게 영웅회에 들어오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담수운은 당연히 거절했다.

영웅회가 가장 싫어한다는 담무룡의 아들이 영웅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우일은 집요했다. 특히 그는 중원 무림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계속 강조했는데, 그것이 담수운을 더욱 괴롭게 했다.

하나뿐인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던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그의 계속되는 권유에 결국 자신의 정체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담수운이 잠룡세가의 소가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강우일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경악했다. 그리고 그는 담수운을 떠났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친구까지 잃었다는 슬픔에 한동안 방황하던 그를 강우일이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종산은자였다.

“강우일, 그 친구가 있었다면 조언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중얼거리는 담수운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그가 영웅회에 들어가고 일 년도 안 되어 강우일은 어찰단의 기습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총수님, 총행수입니다.”

그때 양호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룡밀을 상단으로 바꾼 후 모든 조직의 호칭은 상단에 맞춰 바뀐 상태였다.

“들어오세요.”

담수운은 양호철이 들어오자 급히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물었다.

“물건은 좀 팔았습니까?”

“요즘 정세가 정세다 보니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실수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양호철의 말에 담수운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험이 크다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든 자금을 털어 물건을 사라고 명한 것은 바로 그였다.

“실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라고요?”

“예. 장강 주변이 전쟁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미리 사 놓은 물건들의 가격이 천청부지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판로만 찾는다면 두 배 이상의 수익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담수운이 모든 돈을 사재기하는 데 사용하게 한 것은 물건 값이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건만 있다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는 하나의 큰 경험이기도 했다.

“물건이 오르면 뭐하겠습니까? 당장 자금이 부족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지경인데요.”

“우리를 구해 줄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를 구해 줄 분이요?”

“예, 종리 단주님께서 드디어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양호철의 말에 담수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종리화를 만난다면 지금 겪고 있는 자금 부족은 단숨에 해결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종리화가 연락을 했다는 것은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하필 지금…….’

얼마 전 최후통첩을 보낸 종산은자를 생각하면,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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