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93화>
193화. 사람들(2)
악불군의 말에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은 담수련이 다시 물었다.
“그럼 오라버니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강서의 포양호변에 있는 도창에 대룡상단을 세워, 그곳의 총수로 계십니다.”
“오라버니께서 상단을 차리셨다고요?”
“자세한 얘기는 언니한테 들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천화궁주는 슬쩍 종리화에게 공을 넘겼다.
“가주님께서는 정파가 재건이 되더라도 강서 북쪽에는 큰 문파가 없었다는 점에 착안해, 소가주님께 우선 잠룡세가와의 관계를 숨기고 작은 무림 문파를 연 후, 잠봉밀과 은밀히 연계해 세력을 키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가주님께서는 작은 문파를 세우느니 상단을 세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그럼 제게는 무슨 당부를 하셨나요?”
“아가씨 역시 이곳 호남에 문파를 세워 키워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좀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도 약한 세력을 둘로 나누는 것보다는 같이 합쳐서 키워 나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세가 안에서는 무림 세력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녀가, 담무룡의 계획을 듣자마자 문제점을 단박에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모두 소가주님께 맡기고 아가씨의 안전을 책임지게 하실 생각이셨습니다. 그러나 소가주님께서 가주님의 기대를 충족 못 시키고 소군의 무공이 일취월장하면서 바꾸신 겁니다. 두 분이 같이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가주님의 대가 완전히 끊길 수도 있다는 염려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종리화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이 안 좋게 변했다.
남의 가족의 대가 끊기건 말건 수틀리면 상대를 죽이던 담무룡이 자신의 대가 끊기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딸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둘로 나뉘었다고는 하나, 아가씨와 소가주님께서 계속 연계하실 거니까 사실은 한 세력이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될 겁니다.”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변하자 천화궁주가 슬쩍 부언을 했다.
“그럼 오라버니께서 잠룡밀을 맡는 데 큰 문제는 없었나요?”
조직을 맡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자 종리화의 표정은 더욱 의아해졌다.
거기다 어제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예전처럼 부끄러움을 타거나 머뭇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똑바로 얘기하는 모습도 이상했다.
“아가씨 성격에 변화가 좀 생긴 것 같군요?”
“소군이 그래서 빙설초를 찾으러 간 거예요. 새편작 어르신 말씀이, 오음절맥을 지닌 사람이 성격에 변화가 생기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셨거든요.”
“죽다니,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지금 아가씨께서는 세가에 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십니다.”
“저도 강호에 나온 이후 많이 건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종리화는 악불군을 슬쩍 보았다. 어찌 보면 이게 다 그의 덕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소가주님께서는 큰 문제없이 잠룡밀을 인수 받으셨습니다. 양호철이 가주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담수련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잠봉밀은 여기 있는 분들이 다인가요?”
“아닙니다. 여기는 천화궁 총단일 뿐입니다. 잠룡밀이나 잠봉밀과는 그냥 협조하는 관계로 보시면 됩니다.”
“종속 관계는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잠봉밀은 어디에 있나요?”
“이곳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가의 잠봉단과 달리 잠봉밀에는 남자 무사들이 많습니다. 잠봉밀을 지금 맡고 있는 누진봉은 무공도 강하지만 성격이 합리적이고 아주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생각해 그런 사람을 책임자로 고르셨나 보네요.”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얕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드럽다고 해도 그들을 휘어잡으려면 강인한 면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유모도 같이 가나요?”
“원래는 아가씨께서 잠봉밀을 장악할 때까지 같이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종리화는 소군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잠봉밀을 장악하면 뭘 해야 하지요?”
“잠봉밀은 아가씨의 세력입니다. 아가씨께서 수장이신 거지요. 가주님께서는 그 세력으로 무엇을 할지는 아가씨의 판단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잠룡밀을 맡은 오라버니도 마음대로 하시겠네요?”
“그러니까 상단을 만드신 거지요. 그것은 가주님의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잠봉밀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거 하나는 아버지께서 잘 생각하셨네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라버니나 저나 조종하려 들면 엇나갈 것을 아버지께서 알고 계셨다는 의미지요.”
종리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담수련의 말이 너무 냉정했다. 그건 그녀가 아는 담수련이 아니었다.
종리화는 악불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군, 네가 급히 빙설초를 찾아 나선 이유를 알 것 같구나.”
“곧 원래의 아가씨로 돌아오실 겁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소군,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지금 나는 담수련이 아니라는 의미야?”
“그럴 리가요. 제겐 어떤 모습이든 다 아가씨입니다. 다만 단주님께서는 처음인지라 당황하시는 것 같아 드린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습은 싫어?”
이어지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눈 밑이 파르르 흔들렸다. 잘못하면 대화가 또 기나긴 수렁에 빠질 것 같자 그는 급히 말했다.
“지금은 잠봉밀에 대해 중요한 대화 중이니 우선 그 주제부터 끝내시지요.”
“좋아. 이따가 이 문제는 다시 심층 있게 대화해 보자고.”
전가의 보도 같은, 심층 있는 대화라는 문장이 나오자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종리화는 담수련이 악불군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악불군은 진정으로 담수련의 모든 것을 편안하게 다 받아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주님께서는 소가주님이나 아가씨께서 자신의 뜻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도 두 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난국에서 살아남는다면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잠룡세가를 다시 세워 주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담수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그녀에게 잠룡세가를 다시 세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가 말을 안 들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한 사랑도 듬뿍 받으며 컸다. 그녀 역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의 유지일 수도 있는 부탁을 무조건 깔아뭉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담수련은 즉답을 하지 않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종리화도 그녀가 무엇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지를 알기에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생각하던 담수련의 입에 열린 것은 이 각이나 지나서였다.
“유모, 우선 유모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말씀하세요.”
“잠룡세가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제룡회니 오룡세가니 하는 것도 원나라가 물러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 중에 다시 잠룡세가를 세운다는 것은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여기서 제 생각은 중요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전 가주님의 부탁을 전해 드린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오룡세가를 경멸하셨습니다. 잠룡세가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지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어요.”
잠시 말을 멈춘 종리화는 담수련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가주님께서 아가씨께 서찰도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못 보셨습니까?”
“읽었어요. 마지막 부탁이 될지도 모르니 유모님의 말을 잘 듣고 따라 주기 바란다고 쓰여 있더군요. 딸로서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잠룡세가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천하와 싸우겠다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아버지께서 왜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말 그대로 부탁이십니다. 아가씨나 소가주님께서 그 부탁을 이행하지 않는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종리화는 이번에는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소군아, 난 네가 자라오는 과정을 모두 봤다. 그리고 가주님께서 네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도 알 게다. 난 네게도 강요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는 가주님의 마지막 염원을 지켜 드리고 싶구나.”
“유모!”
담수련은 종리화가 악불군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말 그대로 부담을 주자 급히 불렀다.
“아가씨, 소군이 가주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아가씨와는 별도로 소군의 개인적인 일입니다. 전 그것을 상기시켰을 뿐입니다. 역시 이후의 행동은 소군의 뜻에 달린 것일 뿐, 누구도 강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
“뭘 그렇게 고심하십니까?”
담수련의 방으로 돌아온 악불군은 그녀가 계속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군에게 미안해서 그렇지.”
“제게요? 아가씨께서 제게 미안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유모 말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화 안 나?”
“제가 왜 화가 나야 합니까?”
“아버지께서 소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뭐겠어? 소군을 잠룡세가를 다시 세우는 데 이용하고 싶다는 말이잖아? 난 소군이 자신의 길을 가게 하고 싶지, 누구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싫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셨던 겁니까?”
“그럼 내가 뭐 때문에 심각하겠어?”
“아가씨, 종리 단주님의 말씀에서 틀린 것이 있다면 저도 반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전 분명 가주님께 구명지은을 받았고 무공을 배웠습니다. 지금의 저는 가주님 덕분에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저는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요.”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천하와 싸우는 거라니까?”
“꼭 천하와 싸운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 아가씨께서 그 총명한 머리로, 천하와 싸우지도 않고 가주님의 염원도 지켜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 아가씨의 방법을 따를 것입니다.”
“지금 소군의 명성이나 실력이면 어딜 가도 큰소리치면서 살 수 있어. 왜 자꾸 나하고 아버지에 연연하는 거야?”
“저는 지금껏 살아오며 은혜를 외면하지 않았고, 소중한 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에게 명성이나 명예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됩니다.”
“소군은 나를 너무 많이 감동시키는 거 알아?”
“제가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에 감동하는 아가씨께서 너무 착하신 겁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을 촉촉한 눈으로 지그시 보더니 악불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난 아마 소군이 없었다면 정말 불행했을 거야.”
악불군은 담수련의 볼이 자신의 가슴에 닿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종리화가 있는 곳에서 이런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오해받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도 담수련을 떼어 놓지는 않았다. 그녀의 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모든 피곤을 싹 다 가시게 해 주고 있었다.
‘어머? 소군의 심장이…….’
악불군의 심장에 귀를 댄 것 같은 상황이 이어지던 그때, 담수련은 악불군의 심장이 자신의 심장과 맞먹을 정도로 펄떡펄떡 뛰는 것을 느끼자 살짝 고개를 들어 악불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인한 턱과 곧게 뻗은 코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소군, 고개 좀 숙여봐.”
담수련의 말에 고개를 숙인 악불군은 순간 당황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은 그다음에 어떤 행동이 이어져야 하는지 몰랐다.
뭔가 갈망하는 듯한 눈빛을 교환하던 악불군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슬쩍 떼어 넣으며 말했다.
“아가씨, 좀 더운 것 같은데요?”
“난 하나도 안 더운데?”
그녀는 악불군이 자신을 떼어 내자 뭔가 아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아가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습니다. 더운 것이 분명합니다.”
“소군도 얼굴이 벌건데? 더운 건가?”
그녀도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는 말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허리를 감은 손을 풀고 말았다.
분명 둘에게는 연애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지만, 안타깝게도 가르쳐 줄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