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94화>
194화. 변화하는 정세(1)
네 명의 노인이 탁자에 앉아 정면을 보고 있었다.
천무성궁의 주춧돌이라는 말을 듣는 천무사왕이었다.
그중 곰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웅왕이었다.
“현기수사. 궁주님께서 오실 줄 알았는데, 우리만 부른 것이냐?”
그들의 정면에는 머리에 학사건을 쓴 중년인이 시립해 있었다. 천무성궁의 군사인 현기수사였다.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져 사왕 어르신들만 제가 모셨습니다.”
“그렇다면 궁주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은 모임이라는 말이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는 그 노인은 한세도왕이었다.
“궁주님께는 사후 재가를 받을지, 아니면 먼저 허락을 얻을지, 우선 어르신들께 먼저 상황을 말씀드린 후에 의견을 들어 결정하려고 합니다.”
“쯧쯧쯧!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그러는 거냐? 네가 궁주님 모르게 우리만 부른 것을 보니 뭔가 수작질을 부리려는 것 같은데, 난 별로 내키지 않는구나.”
품에 중간 크기의 금(琴)을 안고 있는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무림에서는 악성(樂聖)으로 불릴 정도로 금에 조예가 깊다는 파금왕이었다.
“천무성궁의 백년대계를 위한 일입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천무성궁의 주춧돌이라는 말을 들으시는 분들이시니, 제가 이러는 이유를 듣는다면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우선 들어 보자고. 말해 봐라.”
태웅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현기수사는 그들의 앞에 빽빽하게 글이 써진 보고서를 한 장씩 내려놓았다.
“우선 그 보고서를 먼저 읽어 주십시오.”
사왕은 보고서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즘 화젯거리인 천호무적검에 대한 보고서 아닌가? 이게 본 성의 백년대계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습니다. 우선 지금 원나라는 패색이 짙습니다. 제 예측이 맞다면 주원장이나 장사성 둘 중에 한 명이 다음 황조를 열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저는 주원장에게 점수를 더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혼란이 길어야 삼 년 안에 끝날 것으로 봅니다. 곧 진정한 중원 무림의 천하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제갈 군사는 태양천이 여전히 건재하고 어사대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고 하던데, 자네는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는가?”
“태양천과 어사대가 반목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갈 군사도 저랑 의견이 일치합니다. 다만 영웅회의 군사로서 대외적인 의견 표명은 좀 비관적으로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과 천호무적검의 보고서 간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살피던 현기수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혼란의 시기에는 곳곳에서 영웅들이 튀어나옵니다. 패웅이 될 수도 있고 효웅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정돈의 시기에 들어가면 영웅은 한 명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반군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도, 결국 한 명의 영웅에게 정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둘 이상의 영웅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오기 때문이지요.”
그제야 사왕들은 뭔가 이해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미진한 듯 물었다.
“설마 자네는 천호무적검이 소궁주님과 맞먹는 영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팔수권왕은 어불성설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아는 백천학은 천제무황이라 불리는 궁주를 능가하는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떨 때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칙을 따지는 광명정대함은, 누구라도 감탄할 정도로 전형적인 정의로운 영웅의 모습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여기 보니 무공만은 상당한 것 같은데, 소궁주님의 무공은 지금 궁주님과 필적할 정도이네. 구천마궁의 호법들과는 차원이 달라. 거기다 이 아이는 아직 사문도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태웅왕 역시 현기수사가 너무 나갔다는 듯이 부언했다. 더욱이 세상은 나만 잘났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백천학은 무림의 절대자로 불리는 사대무황 중 정파를 대표하는 천제무황의 손자이자 후계자였다.
또한 영웅회의 총순찰직을 맡아 가며 각 문파의 지휘부를 구성할 수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다졌고, 지지도 받고 있었다.
이후 무림맹이 창설된다면 그가 최고의 실세가 될 것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맞아! 이 아이가 양민들에게 인기를 많이 얻어 소문은 대단하게 퍼져 있지만, 우린 무림인이네. 양민들의 지지는 평판은 좋아질지 모르지만 그만큼 그런 행태를 질시하는 무림인들도 많아질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구천마성과 불구대천의 원한을 쌓았다는 걸세. 구천마황은 원한을 품은 자를 절대 용서하는 자가 아니네.”
평상시에는 양민들과 음악을 논하며 친하게 지내는 파금왕의 말에, 한세도왕이 손을 들어 다른 이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조용히 하고 더 들어 보자.”
그러자 다른 사왕들의 입이 닫혔다. 그가 사왕의 대형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들께서 지금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이미 여러 차례 숙고했습니다. 세력도 없고 사문도 말하지 않고 이름도 없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무공만 강한 자. 거기다 명호에서 말하듯 한 여인을 호위한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찻잔 속의 태풍처럼 홀로 독야행을 하며 명성이 있는 무림인으로 살다가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지로 무림에는 절대 무적의 무공을 지니고 천하를 주유하며 명성을 떨친 전설적인 고수들이 상당히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성이었을 뿐 그들이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현기수사.”
한세도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예, 어르신.”
“이제 상황은 이해했으니 본론을 말해 봐라.”
“예, 궁주님께서 무황 중의 한 명으로 불리며 정파를 대표하는 천무성궁을 세웠습니다. 구천마황은 마도를 평정하고 구천마성을 세웠지요. 사파를 통합한 혈해사계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이후 어느 세력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태양천의 천주조차 건드리지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순간 모두의 눈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커졌다.
존재하나 군림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보이던 곳.
“지금 자네는 천호무적검과 천륭검가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천륭검가는 강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신비의 문파로 불렸습니다. 모두를 압도하던 궁주님조차도 검황에게만은 한 수 접어주었습니다.”
“현기수사, 함부로 말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천륭검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호무적검이 천륭검가의 무공을 익혔다고 보는 근거가 무언가?”
“검황이 살아생전 싸워 본 사람들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거기다 그 승패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륭검가의 무공에 대해서 아는 분들 역시 손에 꼽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자가 엄청난 무공으로 초절정 고수들을 계속 무찌르고 있습니다. 저는 도대체 그의 무공의 근원이 어디일까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런 강한 자를 키워 낼 수 있는 곳은 천륭검가밖에 없다는 추측만으로 연관을 짓는 것은 좀 심한 비약 같은데?”
“궁주님께서 천호무적검의 보고서를 받고 한 대목에서 안색이 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대목이 어딜일까 찾아봤더니, 그자가 사용한 무공을 묘사한 대목이었습니다.”
“이기어검은 검을 익히지 않은 나도 펼칠 수 있네.”
내공만 삼 갑자에 달한다면 허공섭물을 사용하는 방식을 이용해 이기어검도 가능은 했다.
“궁주님께서 설마 그런 정도에 안색이 변하실까요?”
“어쨌건 그것도 추측이 아닌가?”
“그래서 제가 어르신들만 모신 겁니다. 만약 그자가 천륭검가의 무공을 익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세력을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무림인들이 스스로 모여들 테니까요. 이미 세력을 만든 후에 대처한다면 이미 늦습니다. 일 갑자 전의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륭검가의 너무 큰 존재감에 그냥 정파의 절대자로만 남아야 했던 천제무황의 얘기였다. 그렇다고 정파를 표방하던 그는 천륭검가와 싸울 수도 없었다.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기수사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천호무적검이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자는 것이었다.
“자네의 의도는 알겠네만, 잘못은커녕 마도인 구천마성과 싸우고 양민들에게 협행을 하는 천호무적검을 어찌하겠나? 아무리 궁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우린 정파이네. 명분 없이 죄 없는 자를 핍박할 수는 없어.”
“맞네. 자네도 소가주님의 성정을 잘 알지 않나? 만약 우리가 이런 의견까지 나눴다는 것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내실 거네. 궁주님은 또 어떻고!”
“그러니까 그분들은 모르게 해야지요.”
“우리도 그런 행동은 할 수 없네.”
“그자에게 죄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한세도왕이 다시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죄가 있다면 징치할 명분은 되겠지. 하지만 그 죄를 우리가 음모로 만들 수는 없네. 우리에게 명예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게.”
“제가 아무리 책사라지만 천무성궁에 몸을 담고 있는데 그렇게까지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천호무적검에게 아주 큰 결함이 있습니다. 확인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자에게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어르신들께서 저에게 동조해 주시겠는가 하는 의견만을 묻는 것입니다.”
사왕은 다시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천호무적검이 벌인 많은 일들은 그들조차 칭찬하고 싶은 일뿐이었다.
보고서를 보며 심사숙고하던 그들은 서로를 한 번 보더니 다시 한세도왕이 대표로 말했다.
“잘못이 확인된다면 자네 뜻을 따라주지.”
* * *
“아가씨, 궁주님께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담수련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네?”
창밖을 본 담수련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향후 계획에 대해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수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악불군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얼마나 그녀의 움직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둘이 동시에 나오자 궁주전 시녀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내해요.”
“예.”
[소군은 매번 내가 밖으로 나올 때마다 거의 동시에 나오네.]
[아가씨 걷는 소리를 들으면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대답하던 담수련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물었다.
[그럼,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어?]
자신이 방에서 내는 소리를 악불군이 다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급한 그녀의 질문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했다. 대답을 잘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글쎄요? 다른 소리는 제가 거의 못 듣고, 걷는 소리만 정확히 듣는 편입니다.]
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아예 못 듣다가 아니고 ‘거의’라는 말을 썼고, 발걸음 소리에 신경을 더 쓰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내 발걸음 소리는 나도 잘 못 듣는데, 그건 들으면서 다른 소리는 안 들린다는 게 말이 돼?]
[안 듣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못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가 다른데?]
[그동안 계속 그래 왔으니까요. 그런데 들으면 안 되는 소리가 있습니까?]
악불군은 순수하게 의아해서 물은 것이었지만, 담수련이 듣기에 따라서는 좀 미묘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거 없어.]
담수련은 단번에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상관없는 거 아닐까요?]
‘아이, 하품하는 소리도 있고 또…… 아, 몰라 몰라, 내가 무슨 소리를 냈는지 알게 뭐야.’
담수련은 어차피 듣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건 됐고, 오늘 유모 만나서 확실한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해.]
[그렇게 하십시오. 아가씨, 마음이 불편하면 안 되지요. 확실하게 의견을 말하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소군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힘이 나네. 대신 유모가 뭐라고 하든, 무조건 내 말에 찬성을 해야 돼.]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의견을 말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무조건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