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95화>
195화. 변화하는 정세(2)
답이 없자 담수련은 고개를 살짝 돌려 악불군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답이 없어?]
담수련의 시선을 느낀 악불군은 우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저야 언제나 아가씨 편이니까 당연히 찬성할 것입니다만, 그래도 조금 귀띔이라도 해 주시면 대처하기가 쉽지 않을까요?]
[귀띔? 무슨 귀띔?]
[아가씨께서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지 제가 약간이라도 알면 찬성을 하더라도 조리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소군이 조리 있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무겁게 찬성만 하면 돼.]
무겁게라는 말이 악불군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큰 사달이 날 수도 있는 말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견을 말하는 것은 찬성입니다만, 그래도 종리 단주님의 심기도 조금은 배려하는 것이 어떨까요?]
[소군의 말대로 내가 편하려면, 유모의 심기를 조금 거스르더라도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소군도 알잖아. 나 오음절맥이라 가슴이 답답하면 안 좋다는 거. 그러니까 소군은 들어가서 머뭇거리거나 딴소리하면 안 돼. 알았지?]
오음절맥에 안 좋다는 말은 악불군에게는 어떤 설득이나 강압보다도 강력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뭔가 부담스러워하는 악불군의 답을 들은 담수련은 회심의 미소를 지며 말했다.
[역시 소군이 좋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네. 그런데 어느새 목적지에 벌써 다 온 거 같아.]
‘이거, 태어나서 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체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슬쩍 쇄기까지 박은 담수련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불안한 그였지만,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화궁주는 악불군과 담수련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포권을 하며 맞았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궁주님께서 항상 이렇게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맞이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아가씨 어렸을 때 제가 잠룡세가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제가 많이 어려울 때였는데, 아가씨께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손가락을 꼭 잡아 주셨답니다. 그때 정말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인가 보네요. 기억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땐 진짜 아기였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제 손가락을 꼭 잡고 놓아 주지 않는 바람에 가주님께서 저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으셨다는 거 아세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아가씨께서 아가 때 낯을 정말 많이 가리셨대요. 그런데 처음 본 제게 그러시니까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셨다더군요.”
“사람 구분도 못하는 애기의 행동 때문에 아버지께서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분명 도움을 주면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을 궁주님께서 주셨을 겁니다.”
그녀는 담무룡이 도움이 안 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언니가 해 준 말이니까 믿으려고요.”
“유모가 말씀하셨다면 맞겠지요. 그런데 오늘 식사가 뭔데 이렇게 냄새가 좋지요?”
“오늘 요리는 봉선채 요리랍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신다고 언니가 말해서 준비해 봤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네요. 그런데 유모는 안 보이시네요?”
담수련은 종리화가 보이지 않자 의아한 듯 물었다.
“호남 북부의 사정을 적은 보고서가 도착하는 바람에 확인하러 가셨어요. 곧 오실 거니까 우선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소군도 앉아.”
악불군이 그녀의 등 뒤로 가서 서자 담수련은 자신의 옆에 앉게 했다.
천화궁주는 둘이 앉자, 잔에 따끈한 차를 따라주었다.
그때, 종리화가 안으로 들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리화는 담수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유모가 갑자기 예의를 차리니까 많이 불편해요. 그냥 예전처럼 하면 안 될까요?”
“예전에는 잠룡세가의 천금이었지만 이제는 한 조직의 장이 되실 분입니다. 작은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직은 장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전 그런 위계질서 차리는 거 정말 싫어요.”
“싫어도 하셔야 합니다. 황제조차도 궁중 예절은 지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생각해 볼게요. 그런데 무슨 내용이기에 유모가 직접 다녀 온 건가요?”
“호남 북부에서 급보로 온 내용이었습니다.”
“중요한 연락이었나 봐요?”
“주원장이 드디어 진유량이 있는 호북으로 진군을 하고 있다는군요.”
그러자 천화궁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잘못하면 죄 없는 아이들이 또 고생하게 생겼네요.”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죽음에 노출되는 법이었다. 특히 기녀들은 점령군에게는 전리품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어차피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하니까, 큰일은 없기를 바라야겠지.”
“유모나 궁주님은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저번 전투에서는 진우량이 패했지만, 그 후 장사성과 연합을 하면서 군세는 주원장을 능가한다고 하더군요. 아직 누가 이긴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누가 이길지 생각하신 모양이군요?”
“그들의 승패 여하에 따라 천하가 달라질 테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더라고요.”
종리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누가 이길 것 같으십니까?”
“주원장이 이길 거예요.”
“예측이 아니라 확신하듯이 말하시는군요?”
“사람들이 황제가 되려면 하늘의 뜻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일명 천심(天心)말이에요. 더해 보통은 이런 말이 따라 붙죠. 민심이 천심이다. 저는 진유량의 세력권과 장사성의 세력권을 다 지나갔어요. 그런데 이들이 원나라보다도 더 욕을 먹더라고요. 그런데 주원장은 칭찬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욕은 안 먹고 있어요. 승패는 거기서 갈렸다고 봐요.”
“그런 말은 이긴 자들이 하는 말이지요. 민심을 얻지 못 하고도 천하를 얻은 황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권력이니까요.”
“그럼 저랑 내기하실래요?”
“아가씨는 내기를 싫어하시는 것으로 아는데, 이제 바뀌셨나 봅니다?”
종리화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반문했다.
“지금도 싫어해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관철하고 싶은 때에는 내기가 상당한 효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제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네요?”
“네, 솔직히 유모께 부탁을 하고 싶긴 한데, 그냥 말하기는 좀 어려웠는데 내기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가씨, 내기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셔야 합니다. 지게 된다면 그만한 대가를 또 줘야 하는 것이 내기란 것의 함정이기도 하니까요.”
“유모, 요새 제가 느끼기에도 달라진 것이 있어요.”
“아가씨께서도 스스로 달라진 것을 느끼십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고요. 내기에서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 같은 게 생겼다고 할까? 뭐 그런 거요.”
“절대 지지 않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강호는 뭐든 신중해야 하고, 모든 것을 대함에 조심 또 조심이 최고입니다.”
“어쨌든 내기하실래요?”
“아가씨께서는 주원장이 이긴다는 쪽에 거실 거 아닙니까?”
“이길게 분명하니까 당연하지요.”
“저도 주원장이 이길 것 같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기는 안 될 것 같네요.”
“아까는 연합군의 군세가 주원장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강한 것하고 이기는 것은 다르니까요.”
“그럼 어쩔 수 없이 그냥 말해야겠네요.”
“말씀하십시오.”
“식사 끝내고 말할게요. 먼저 말했다가 유모 식사도 못하시면 안 되잖아요?”
종리화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식사까지 못한다고 할 정도란 말인가…….
“어떤 말을 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잠봉밀을 맡지 않는다는 말은 안 됩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저를 돕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 줄 아는데, 스스로 그것을 거절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랍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지셨어……. 이게 정말 오음절맥의 부작용이란 말인가? 아니야! 부작용이 맞다면 몸도 나빠져야 하는데…….’
담수련은 머리가 너무 좋고 사물에 대한 이해가 밝아 애늙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조숙한 면을 보이기는 했지만 종리화에게만은 어머니를 대하듯 했다.
그런데 지금은 천화궁주와 맞먹을 정도로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말까지 너무 잘하고 있었다.
종리화는 잠봉밀을 맡지 않겠다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한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 * *
“누 장로님, 드디어 가주님의 인장편이 도착했다고요?”
잠봉밀의 내당과 외당을 담당하는 유징과 한태성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에게 포권을 한 뒤 물었다.
그들의 감격이 깃든 목소리에서 인장편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장로인 누진봉이 옆에 있는 미주를 보며 말했다.
“당주들이 보고 싶은 모양인데, 곽 화주가 보여 주게.”
“예.”
중년미부는 잠봉밀의 여인 무력 집단이 잠봉화의 화주인 곽부용이었다.
곽부용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더니 펼쳤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담무룡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가짜는 아니지요?”
직인을 이리저리 살피던 유징이 물었다.
“확인했습니다. 분명한 진짜입니다.”
“그럼 어떤 명을 내리신 것입니까?”
“빠른 시일 안에 잠봉밀을 맡을 아가씨께서 이곳으로 오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소가주님이 아니고 아가씨께서 오신다는 것입니까?”
한태성의 반문에 누진봉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일 년 전 가주님께서는 계획이 바뀌었다며 새로운 명을 보내셨다. 하지만 너희들이 동요할 것이 염려되어 내가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저희가 알기로는 아가씨께서 무공은 못 익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가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으니 천금이신 아가씨께도 충성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가주님을 못 본 수하들은 자신보다 약한 밀주님을 원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의 책임이 더 막중한 것이다. 아가씨께서는 무공이 약한 대신, 대단히 총명하신 것으로 안다.”
“장로님, 아무리 총명하시다 해도 무공이 약한 것은 너무 큰 결점입니다. 저는 가주님께서 왜 소가주님을 제외시킨 것인지 의아합니다.”
“그래 좀 의아하긴 하지. 하지만 난 가주님을 믿는다. 그런 결정을 하셨을 때는 분명 거기에 대한 방책도 같이 준비되어 있을 게다. 그리고 이 자리는 의논을 하는 자리가 아니다. 인장편이 왔고 잠봉밀의 밀주가 되실 아가씨께서 며칠 안에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공지하는 자리다. 그분의 무공에 대한 것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이나 말을 할 경우 용서치 않을 것이다.”
유징과 한태성은 누진봉의 강력한 경고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가 봐라.”
한태성과 유징이 나가자 곽부용이 누진봉을 보며 말했다.
“충성심이 가장 높은 유 당주와 한 당주까지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생각 외로 불만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곽 화주도 가주님의 결정을 의심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요. 다만 잡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을 뿐입니다.”
“그 잡음을 다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네.”
누진봉은 담무룡을 철저하게 믿는 듯했다.
* * *
“아가씨! 소군을 잠룡세가에서 나가게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담수련의 말대로 식사 전에 들었다면 식사를 못했을 폭탄 발언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종리화와 천화궁주는 물론 악불군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말 그대로예요. 소군은 이제 잠룡세가의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자유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소군 자신만의 세력을 갖도록 허락할 생각이에요.”
“아가씨, 그것은 불가입니다. 가주님께서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유모. 분명 잠봉밀의 장은 저고, 모든 판단은 제가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설마 저 보고 유모의 명을 받는 꼭두각시 수장이 되라는 말은 아니시지요?”
그녀의 한마디는 종리화의 입을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