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96화 (196/472)

<천검지애 196화>

196화. 준비(1)

종리화가 곤혹스러운 듯 즉답을 못하자 담수련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유모 생각에 잠룡세가가 지금도 건재할까요?”

“자세한 속사정은 정보가 없어 잘 모르지만, 잠룡세가는 아직 건재합니다.”

“현판만 제대로 붙어 있어도 건재는 건재지요. 그럼 아버지께서는 어떠신가요?”

“역시 사정은…….”

“정보가 없어 확신은 못하지만 아직 건재하실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그건 그냥 희망 사항이지요.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랬다면 그 소문을 막을 길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잠룡세가에서 지배력을 상실하신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사실 담무룡의 생사는 종리화도 가장 알고 싶은 사안이었다.

“제게 아주 좋은 정보원이 좀 있거든요.”

담수련은 오는 동안 귀도신영을 통해 절강에 대한 소식을 계속 수집해 왔다. 담무룡의 생사는 그녀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이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결론은, 그녀가 절강 전체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종합 분석하고 여러 날에 걸쳐 심사숙고해서 내린 판단이었다.

“가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소군을 잠룡세가에서 내보내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살아 계시다고 해도 아무 힘도 없다면, 결국 우리 힘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유모께서는 지금 잠룡밀이나 잠봉밀이 어느 정도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잠룡밀과 잠봉밀의 전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여간한 문파의 힘은 능가할 것입니다.”

“천하 모든 문파는요?”

“아가씨, 그래서 은밀하게…….”

“어떻게 은밀하게요? 협조 세력이 없이 우리만의 독자적인 힘으로 중원 무림에게서 우리를 숨길 방법이 있을까요? 혹여 운이 좋아 얼마간은 감춘다 해도, 계속되는 불안과 긴장은 수하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문이 될 거예요. 희망이 없는 수하들은 무조건 배신을 하게 되어 있어요.”

“……충성도가 높은 수하들만 엄선되어 있습니다.”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믿던 자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죽곤 했지요.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천하가 모두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든다는 것을 알면서 끝없는 충성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도둑놈 심보가 아닐까요. 천화궁주님은 믿어요. 그런데 궁주님은 궁도들을 무척 사랑하시더군요. 만약 그 사랑하는 천화궁도들이 다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그때도 우리 편이 되어 주실 수 있겠어요?”

“아가씨, 그건 너무 극단적인 생각 같습니다.”

천화궁주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최소한 천화궁주님께도 이런 상황이 몇 년 안에는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에요.”

“그러면 더욱 좋긴 하지요.”

종리화는 자신이 논리에서 밀리는 것을 느끼자 급히 반박을 했다.

“그렇다 해도 소군을 풀어 주겠다는 이유는 안 됩니다.”

“아니요, 중요한 이유예요. 소군을 풀어 준 후 소군에게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도록 할 거예요. 지금 명성이면 아마 순식간에 잠봉밀을 능가하는 세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실질적인 힘이 되는 협력 세력을 우리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잠룡세가에서 풀어 주지 않고 세력을 만들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종리화의 반박에 담수련은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지요. 잠룡세가 사람이 세력을 만들어 우리를 돕는다면 그것은 그냥 우리예요. 만약 중원 무림에게 걸렸을 경우 그냥 같이 공적이 될 뿐, 도움은 안 됩니다. 하지만 소군이 잠룡세가 사람이 아니라면 얘기는 달라져요. 그들에게 떳떳하게 맞서면서 우리를 은밀하게 도울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에요. 또한, 자금 문제도 소군을 통해 마련한다면 더욱 쉬워질 거예요.”

“아가씨, 잠룡세가에서 나간다는 것은 더 이상 세가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소군 정도의 무공을 지닌 무인에게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그깟 말로 한 충성 맹세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가씨, 어린 나이는 아니었…….”

듣다 못한 악불군이 나서려고 입을 열었지만, 담수련의 부릅뜬 눈과 마주치자 다시 닫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소군은 한번 한 맹세를 뒤집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리화는 악불군이 신의현맥을 타고난 보기 드문 성정이란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이런 계획을 짠 거예요. 충성 맹세의 족쇄에서 풀어 줬다고 해서 우리를 나 몰라라 할 사람이라면, 어차피 충성 맹세도 언제든지 뒤집는다는 의미예요. 하지만 소군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잠룡세가와의 연관 고리를 끊어 줘도 협력 세력으로 가장 믿을 수 있다는 거지요.”

“언니, 아가씨 말씀을 들어 보니까 일리는 있지 않아요?”

천화궁주가 설득된 듯 슬쩍 동조의 기미를 보이자, 담수련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유모도 알다시피 소군은 거짓말을 못해요. 그런데 무림인 중 누군가가 소군에게 잠룡세가와의 연관성을 물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소군의 성격상 머뭇거릴 거고, 그렇게 되면 단번에 의심을 받겠지요. 그렇다고 소군에게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하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아요. 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계속하게 되는 것이 거짓말이니까요.”

도저히 논리로는 상대가 안 된다고 느낀 종리화는 마지막으로 악불군을 통해 반전을 꾀하기로 한다.

“소군.”

“예, 단주님.”

“소군 생각은 어때? 만약 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악불군은 그제야 담수련이 들어오기 전 자신에게 신신당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악불군이 머뭇거리는 움직임이 보이자, 담수련이 한숨을 폭 내 쉬며 말했다.

“휴우~ 오음절맥은 신경을 많이 쓰거나 생각대로 안 되면 막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참 안 좋은 것 같아……. 여기서 더 기분이 안 좋아지면 어쩌면 큰일 날 수도 있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담수련은 진짜 쓰러질 듯 이마에 손을 대며 탁자에 기댔다. 작게 말했지만 그 말을 못 들을 악불군이 아니었다.

“저도 아가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더 기분이 안 좋아지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악불군은 그녀의 기분이 안 좋아질 일을 절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담수련이 시킨 대로 악불군이 무겁게 말하자, 종리화는 이마를 손으로 잡은 채 힘든 표정을 하고 있는 담수련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가씨께 뭐든 말하란 것도 실수였지만, 소군이 찬성하면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실수였구나…….’

악불군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것보다 담수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유모 그럼 약속대로 이 자리에서 소군을 잠룡세가에서 파문할게요.”

“아가씨, 제가 동의는 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너무 급하게 일이 진행되자 악불군이 당황한 듯 끼어들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야. 그리고 우린 내일 당장 잠봉밀을 찾아가야 해.”

말을 마친 담수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왜 저렇게 소군을 풀어 주려고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담수련이 너무 밀어붙이자 종리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반대를 할 명분을 잃은 그녀로서는 말릴 수도 없었다.

* * *

“언니, 아가씨 떠나는데 웃는 얼굴 좀 보이세요.”

종리화는 아침이 되자마자 잠봉밀로 떠나는 담수련과 악불군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내내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래요, 유모. 저와 생각이 맞지 않는 부분은 계속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유모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조금도 달라진 것은 없어요.”

“아가씨, 전 아가씨와 의견이 다른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잠봉밀로 가시면 힘든 일이 계속 생길 텐데, 아가씨를 그곳에 보내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지 걱정돼서 그런 겁니다.”

“솔직히 저 같이 약한 사람을 그런 곳에 보내시는 것이 잘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어차피 유모나 저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니, 잘했다 못했다 하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제가 마음에 안 듭니다.”

“유모는 아버지께서 가장 믿는 분이셨어요. 그리고 전 딸이고요. 소군은 제가 불효녀가 되는 것을 싫어하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최선은 다 해 볼 생각이에요. 그래도 안 되면 그땐 어디로 도망가서 숨어 살 생각이고요. 그리고…….”

“어떤 말도 괜찮으니까 계속 말하십시오. 욕을 해도 됩니다.”

“욕을 제가 왜 해요. 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유모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리고 유모 역시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예뻐해 주셨고요. 유모께 한 번은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종리화의 얼굴에 그제야 살짝 미소가 어렸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안달 낸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더라고요. 그래요. 최선을 다해 보고, 안 되면 도망칠 때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십시오.”

“저 따라와 봐야 고생만 하실 텐데. 그래도 상관없다면 같이 가요.”

종리화는 말하는 담수련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제게 즉시 연락하십시오. 같이 갔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직 임무가 남아 있습니다.”

“유모도 힘든 일 있으면 제게 연락하세요. 즉시 도우러 올게요.”

둘은 한 번 더 꼭 껴안았다.

“언니, 아가씨께서 어렸을 때 애늙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지요?”

사화와 잠봉단이 호위하는 마차를 타고 담수련이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는 종리화의 옆으로 다가간 천화궁주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땐 말도 거의 없으셨고 오로지 책만 읽으셨지. 웃는 모습도 거의 못 본 것 같아.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어찌나 아시는 것이 많은지, 당시 군사였던 문창현이 천재이신 것 같다고 했을 정도였지.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나이보다 생각하시는 것이 많이 조숙하신 것 같아서요.”

* * *

사화나 잠봉단은 원래부터 악불군을 어려워했다. 대화도 거의 없었고, 웃는 모습도 본 적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호위에 약간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악불군에게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제 명성까지 엄청 높아졌으니, 악불군에 대한 깍듯함은 담수련을 대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매향아, 악 무사님께서 옆에 있으니 너무 든든한 것 같지 않냐?]

흑란의 전음에 매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든든한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게 없어졌어. 여기까지 올 때 얼마나 불안해하면서 왔니. 조그만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잖아?]

[하긴, 그동안 진짜 불안했는데 지금은 정말 불안감이 싹 사라진 것 같아. 그리고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더 멋있는 것 같지 않아?]

[나도 그게 좀 의아했어. 잘생기신 거야 세가 내 여인들이 다 인정한 거니까 그렇다 치는데,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더욱 매력적으로 변하신 것 같아.]

[말조심해라. 악 무사님께서 우리 전음을 들을지도 모른다.]

듣고 있던 추국이 매향의 말이 좀 심하다 느꼈는지, 악불군이 타고 있는 마차를 슬쩍 보며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무공이 높으셔도 전음을 어떻게 들어?]

[저번 우리 쫓아왔을 때 우리 분명 전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시더니 전음에 대한 답을 하셨어. 그땐 아가씨를 본 것에 반가워서 지나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전음을 들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추국의 말을 들은 흑란과 매향의 입이 닫혔다. 비록 멋있어졌다는 좋은 말들이었지만 어쨌든 뒷담화를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녀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무척 심란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께서 굳이 나를 잠룡세가에서 파문하는 방식까지 사용하면서 관계를 끊으신 이유가 뭘까?’

악불군은 살짝 눈을 뜨고 연화와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담수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파문을 당했다 하여 달라질 그도 아니었고, 담무룡에 대한 고마움은 충성 맹세와는 별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은 이후 그에게 가해질 수 있는 족쇄를 그녀가 하나씩 없애 주고 있다고는 아직 짐작도 못하고 있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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