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97화>
197화. 준비(2)
“소군,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마차가 출발한 후 악불군이 계속 눈을 감고 아무 말도 없자, 담수련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냥 머리가 좀 복잡할 뿐입니다.”
“왜 복잡한데? 나한테 얘기해 봐. 원인이 뭔지 알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잖아?”
“아가씨.”
“응.”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했던 악불군의 머리에, 오음절맥을 가진 사람에게 번뇌는 아주 나쁘다는 새편작의 말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아가씨만 편하면 전 괜찮습니다.”
“고마워. 나 지금 마음이 너무 편해.”
담수련은 이미 악불군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모른 척하는 것은 악불군을 위한 하나의 배려이기도 했다.
둘의 대화를 듣는 연화는 뭔지 모를 불안한 분위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화는 각기 다른 무공을 전수받았다. 그중 근접경호에 가장 적합한 무공을 익힌 추국이 언제나 마차 안에서 담수련을 밀착경호를 해 왔다.
하지만 연화의 진맥을 한 담수련이 아직 힘든 일은 무리라면서 마차에 함께 타도록 한 것이다.
“확실히 내 마차가 편하네. 다른 마차들은 불편도 불편이지만 너무 약해서 자주 부서지더라고.”
“공격을 많이 받으셨나 봅니다?”
담수련의 말에 연화는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마차의 바퀴가 고장 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마차 자체가 부서지는 경우는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을 때뿐이었다.
“기상천외한 공격들이 많았지만 소군이 있어서 크게 위험했던 적은 없었어. 너희들이야말로 우리가 갑자기 떠나서 힘들었을 텐데 미안해.”
“객잔에서 계속 쉬기만 했는데 힘든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천화궁에 갈 때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갔는데, 지금은 너무 눈에 띄게 움직이는 거 아니야?”
“아가씨와 악 무사님만 안 보이면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단주님과 궁주님 두 분께서도 이곳을 곧 떠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누가 뒤져도 걸릴 것은 없다는 말인가 보네.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저희도 안내를 받아서 가는 중이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삼사 일 이상은 걸린다고 했습니다.”
[소군, 적설하고는 계속 연락해?]
[예, 지금 사방 천 리를 매일 돌고 있습니다.]
[소군, 진짜 적설하고 대화해?]
[대화까지는 못합니다.]
[그럼 단지 교감뿐이라는 거야?]
[그렇게 봐야지요.]
[단지 교감인데 어떻게 천 리라는 것까지 알 수 있어?]
[적설을 제가 느낄 수 있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면 어느 정도 적설의 속도를 알 수 있는데, 거기에 하루를 곱하면 대략 천 리 정도가 나오더군요.]
[……아무래도 소군 머리가 나보다 더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난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하는 것은 당장 필요한 계산 정도입니다. 아가씨처럼 정보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머리는 감히 비교나 되겠습니까?]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알려 줘도 딴소리네.’
담수련은 오래전부터 악불군의 범상치 않은 능력을 알고 있었다. 한 번 보면 뭐든 다 외워 버리고, 십 년 전 어렸을 적에 그녀와 지나가는 말로 한 대화까지 모두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화 중에 나타나는 이해력, 거기다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지만 무공에 대한 놀라운 습득력까지, 그는 그녀가 보아도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겸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에 대해 평가가 너무 박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약간은 오만하다 할 정도의 자신감도 필요했다. 그래서 수시로 그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전에 그랬지! 겸손이 너무 심하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갑자기 전음 없이 말하자, 연화는 자신에게 한 얘기인 줄 알고는 담수련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그렇게 겸손한 편은 아닌데요?”
* * *
방 안으로 들어선 귀화전랑은 자신을 쳐다보는 다섯 명의 중년인과 상석의 노인을 보자 급히 공손히 인사를 했다.
“단주님과 전주님들께 전랑 홍요슬 인사드립니다.”
놀랍게도 노인은 귀화단의 단주였고, 다섯 명의 중년인은 이인자인 오대 전주였다.
귀화전랑의 인사를 들은 오대 전주 중 한 명인 엄상태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아주 기막힌 기록을 세우고 왔더구나. 귀화단에서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해도 금자 오백 냥 이상은 절대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겠지? 전랑이 그것도 모른다면 자격이 없는 거지.”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비상 자금인 금자 오천 냥까지 탈탈 털어 지불했다고 하던데, 정말이냐?”
“정확히는 금자 오천 냥이 아니라 삼만 오천 냥에 샀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오천 냥이라고 들었다.”
“삼만 냥은 외상으로 주었습니다.”
“외상? 갈수록 가관이군. 귀화단이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오다니, 네가 귀화단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고 있구나?”
또 다른 전주인 모진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홍 전랑. 왜 보고서를 안 쓴 것이냐?”
그러자 엄상택이 노기 띤 눈으로 물었다. 그들이 이 일을 안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 판단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단주님께 알현을 요청한 것입니다.”
“네가 본 단에 끼친 손해가 얼마인데, 무조건 보고서부터 작성하여 제출하고 이후 처분을 기다려도 봐줄까 말까인데 감히 단주님께 직접 보고를 하겠다고 하다니! 근래 일을 잘한다고 오냐오냐해 줬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그만!”
듣고 있던 귀화단주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당장이라도 귀화전랑에게 치도곤이라도 퍼부을 기세이던 단주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요슬아.”
“예, 단주님.”
“넌 귀화단 역사상 가장 빨리 간부가 되었다.”
“단주님의 은혜에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난 내 눈을 믿는다. 하지만 이번 일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다. 네가 내게 직접 보고하겠다 연락한 것도 전주들에게는 하극상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만약 그럴 만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면 나도 너를 내칠 수밖에 없다.”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벌을 주시든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귀화단주는 그녀를 상당히 아꼈다. 그녀가 비상 자금을 금자 오천 냥이나 가지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녀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지금 그의 얘기도 어찌 보면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액면 그대로 듣는다면 그녀에게는 아주 위기였다. 하지만 이유만 합당하다면 그녀의 실수를 모두 덮어 주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우선 거래 장소에 전랑인 네가 직접 간 이유부터 소상히 말해 봐라.”
“하오문에 저희와 선이 닿아 있는 영주 한 명이 연락을 했습니다. 근래 보기 힘든 굉장한 물건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직접 간 것입니다.”
귀화단주는 이유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시 거래 상황을 말해 봐라.”
“처음에는 저는 나서지 않고 귀면영주와 흑면인들이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부른 금액은 금자 열 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자가 보인 첫 물건이 고려청자였습니다. 그래서 금자 백 냥까지는 쳐 주라고 전음을 보냈습니다.”
“진품이었느냐?”
“물건들도 가지고 왔습니다. 제 값만 받는다면 금자 오만 냥도 가능한 물건들이었습니다.”
“귀한 물건이라 많이 쳐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아닙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타났습니다.”
귀화전랑은 담수련과 악불군이 나타나면서부터 꼬인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는 단주와 전주들의 표정도 굳어지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천호무적검이었느냐?”
“예.”
“단주님, 말이 안 됩니다. 당금 천호무적검의 명성은 무림 십대 고수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명성을 가지게 된다면, 사파인들도 그런 자리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려 초절정 고수가 장물을 처분하기 위해 장물아비를 만났고, 심지어 가격을 더 받기 위해 협박까지 했다는 말이 소문이 난다면 그 명성은 단번에 직하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천호무적검은 협객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 들어 보자. 그자가 진짜 천호무적검인지는 어떻게 확신했느냐?”
“말로만 듣던 이기어검을 직접 보았습니다. 제 무공으로는 일 초도 받아 내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귀화전랑은 귀화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초절정 고수였다. 그런 그녀가 일 초도 받아 내기 힘들다면, 여기에 있는 누구도 삼 초 이상 받아 낼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죽을까 봐 외상까지 한 것이냐?”
“외상은 그들이 마음대로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오천 냥을 주고 물건이라도 가져오는 것이 돈만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격이 안 맞으면 돈이라도 뺏어간다? 소문이란 것이 믿기 어렵다고 하더니, 그자가 진짜 천호무적검이라면 절대 정파인은 아니겠구나?”
“그것도 그것이지만, 그자가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 거래가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면 본 단과 친구 사이가 될 수도 있지만, 틀어진다면 본 단에서 자신과 척을 지기로 결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신과 척을 진 자들을 그냥 놔두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귀화전랑과 그곳에 있는 귀화단의 수하들을 죽인다고 협박을 하는 것과, 귀화단을 직접 겨냥하여 척을 지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협박은 차원이 달랐다.
“그 정도면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굳이 직접 보고하는 것을 택한 이유는 뭐냐?”
“전서구를 통하지 않고 인편으로 보고서를 보낼 경우 유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귀화단의 수하들은 배신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럼 그 외상이라는 것을 어찌할 생각이냐?”
“협객으로 불리는 자가 장물까지 처분하면서 돈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그자에게 조직이 있거나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주님께서 원나라만 사라지면 정식으로 상단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금자 몇만 냥에 천호무적검 같은 자와 친분을 튼다면, 상단으로 새로 시작할 때 저희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외상을 받은 것이라며 돈 만 받고 모른 척한다면, 우린 얻은 것 없이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더냐?”
“원나라가 물러난다 해도 어차피 천하는 한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할 것입니다. 모든 상단은 무림 세력을 뒷배로 두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단주님께서 맡겨 주신다면 제가 외상을 핑계로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 보겠습니다.”
“자신 있느냐?”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다 설득해 왔습니다. 대화할 기회만 많이 만들 수 있다면 가능합니다.”
단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오 전주를 보며 물었다.
“전랑의 생각에 너희들의 의견을 말해 봐라.”
그러자 전주들은 귀화전랑을 주시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히고는 있지만 무림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이익이 될지에 대한 판단은 누구보다도 빠른 그들이었다.
“전랑이 천호무적검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금자 십만 냥도 아깝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장파인들이 예전의 성세를 찾는다면 본 단 역시 상당히 위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호무적검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주들까지 찬동하자 단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전랑에 대한 책임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단, 천호무적검을 우리의 뒷배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이후에라도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악불군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협조할 세력이 스스로 모이는 상황이 또 일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귀화단은 지하세계에서는 대단한 자금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세력을 키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자금원 하나가, 지금 알아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