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99화 (199/472)

<천검지애 199화>

199화. 변화의 시작(2)

누진봉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눈으로 담수련을 쳐다보다 화들짝 놀라 절대 불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시작부터 명을 거역하실 생각이신가요?”

담수련이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하자 누진봉은 당황한 듯 급히 말했다.

“거역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가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가주님의 그 뜻을 시작부터 엎어 버리신다면 수하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타날 것입니다. 저희들의 사정도 어느 정도는 헤아려 주십시오.”

“저라고 왜 아버님의 뜻을 따르고 싶지 않겠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아버님의 당부는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버님 방식대로 한다면 우린 살아남기 어려워요. 만약 장로님께서 아버님의 뜻을 따르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안이시라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숨어 지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와, 잠룡밀과 연계하지 않고 우리 독자적으로 어떻게 세력을 키울 수 있는지, 무엇보다 천하인이 잠룡세가에 그토록 원한이 깊은데 잠룡세가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지 말해 보세요.”

“…….”

또다시 모두는 입을 닫고 말았다. 심지어 군사의 위치에 있는 곽부용조차 입을 열 수 없었다.

“말이 없으신 것을 보니 대안들도 없으신 모양이네요? 그래요 갑작스럽게 말해서 생각을 못 하실 수도 있으니 시간을 더 드리지요. 한 달 안에 대안을 찾아오세요. 그때까지 대안을 찾지 못하신다면 제 방식을 따라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국 모두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담수련의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잠봉밀에 대해 제가 숙지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거기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 보지요. 먼저 유 당주님.”

“예!”

“잠봉밀의 조직도와 지휘 체계 그리고 밀원들의 신상 정보는 내당에서 맡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유징은 누진봉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시작부터 핵심 정보를 모두 달라고 하니 약간 불안했던 것이다. 특히 몰라도 되는 것까지 달라는 말은 아주 소소한 것까지 다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유 당주님.”

“예, 아가씨!”

“잠봉밀의 주인이 저인가요? 누 장로님이신가요?”

“……아가씨이십니다.”

“그럼 제 말만 따르세요. 만약 숨기거나 일부러 누락을 시키는 것이 있다면 배신자로 알고 처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휘익-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악불군의 검이 유징을 향해 날아갔다. 날카롭게 들리는 파공음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 속도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대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으음…….”

악불군의 검이 그의 목을 스치듯 지나더니 살아 있는 듯 공중에서 회전하며 악불군의 검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자 천호무적검의 진위를 의심하던 모두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진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을 이용해 모두를 주눅 들게 만든 담수련은, 이번에는 한태성을 보며 물었다.

“외당은 잠봉밀의 외곽 세력 및 협력 세력에 관리와 적과 싸울 무력 조직을 관장하시지요?”

“예!”

기합이 든 듯 한태성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역시 모든 서류를 가져오세요.”

“언제까지 가져오면 될까요?”

“지금 언제라고 하셨나요?”

“……죄, 죄송합니다.”

한태성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급히 용서부터 빌고 말았다.

“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당장 안 될 이유가 없다면 모든 명령의 수행은 말하는 즉시 행하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원나라가 완전히 물러나는 순간 부역자를 향한 대학살이 일어날 거예요.”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곽 화주님.”

“저도 모두 준비하겠습니다.”

“곽 화주님의 대답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그럼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네요. 누 장로님.”

“예!”

“잠봉밀의 모든 재정 상태, 그리고 어떤 식으로 재정을 꾸려 나가는지에 대해 보고해 주세요. 현찰이 있다면 오늘부로 전부 제게 넘기시고요.”

어떤 조직에서든 가장 권력이 있는 부서는 돈과 정보 그리고 무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담수련은 만난 지 한 시진도 안 되어 그 세 가지를 모두 내놓으라고 통보를 한 것이다.

어차피 명분은 주인으로 내정된 그녀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천호무적검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알맞게 한 수를 보여 주지 않았다면 이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당장은 넘기지 않으려 했을 공산이 컸다.

* * *

“솔직히 진짜 많이 놀랐습니다.”

모두가 나가자 악불군은 엄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칭찬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담수련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가 많이 놀랐는데?”

“사화나 저를 대할 때는 정말 부드러우셔서, 혹여 강호의 노고수들을 만나면 힘들어하실까 걱정했습니다.”

“저들은 내가 무공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 상황에서 내가 부드럽게 대하면 자신들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고 오해할 수가 있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한 방 먹이고, 좀 더 친해지면 그때부터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런 것을 용인술이라고 하지요. 아가씨께서는 타고난 기품과 위엄이 있으셔서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정말!?”

“예. 저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소군이 내 뒤에 있으니까 그것도 가능한 거야. 소군이 없는데 내가 강하게 나가면 저들은 더 우습게봤을 거야.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리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아까 한 수는 정말 멋있었어. 요즘은 이기어검도 예전보다 위력도 강하고 더 빠른 것 같아.”

“그런데 저분들이 시킨 것을 다 가지고 올까요?”

“모르지, 뭐. 비리가 있다면 어느 정도는 숨길 수도 있겠지만 이번은 눈감아 줄 거야. 오랫동안 음지에서 지냈는데 그 정도는 좀 봐줘야 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세세한 것까지 전부 생각하시는 아가씨의 총명함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몇 안 될 겁니다.”

담수련에게만 보여 주는 악불군의 아부성 짙은 칭찬이었지만, 그녀는 알고 있음에도 기분 좋은지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 * *

“장로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담수련의 방을 나온 네 명은 누진봉의 방에 모였다.

천무호적검의 등장으로 인해 혼란하던 와중에 담수련의 달변과 정곡을 지르는 논리에 밀리면서, 그녀에게 하고자 했던 말을 하나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상황은 담수운이 처음 양호철을 만났을 때와 비슷해야 했다.

담수련이 이들에게 상황 설명을 부탁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천천히 담수련에게 잠봉밀을 운영하는 자신들만의 경험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실권을 장악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 하여 그들이 담수련을 배신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신하들도 실권은 최대한 자신들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어떡하기 뭘 어떡한다는 말이냐? 아가씨께서 명을 내렸으니 우선은 정성껏 다 준비해라. 실수는 모르지만 일부러 숨기거나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아가씨께서 원하는 것을 다 보고하면 잠봉밀은 완전히 아가씨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애초에 잠봉밀의 주인으로 내정된 분이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모두는 누진봉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진봉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운용은 협의체로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이었지, 가주님의 명은 아니셨다. 그리고 아까 천호무적검의 무공을 보지 않았느냐? 구천마성의 호법과 장로 셋을 혼자서 물리쳤다는 소문이 절대 헛소문이 아니었다. 우리 셋이 합공해도 이기기 힘든 고수다.”

“저희가 아가씨께서 어리다고 너무 얕잡아 본 것이 실수였어요. 솔직히 오늘 아가씨의 말씀은 틀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천호무적검이 우리 편이라면 저희에게 손해날 것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곽부용의 말에 모두는 공감은 하는지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주님의 명과 완전히 달리 행동하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봅니다.”

유징의 말에 누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역시 그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 달의 유예 기간을 벌었으니 대안을 만들어 보자. 그리고 너희도 너희 집무실로 가서 아가씨께서 원하는 서류와 보고서들을 준비해서 모이도록 해라. 상황이 우리의 생각과 달라지기는 했지만, 천호무적검이 본 밀의 일원이 된다면 호재가 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모두가 나가자 누진봉은 미소를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주님의 선견지명은 우리가 따를 수가 없구나. 아가씨께 잠봉밀을 맡기신 이유가 있었어.’

그는 담무룡에게 특별한 명을 받았다. 유징을 비롯한 세 명의 충성심이 남다르기는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계속된다면 변할 수 있으니 그들을 감시하고 다독이는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 * *

“자객이다!”

뎅뎅뎅뎅!

커다란 외침과 함께 징이 울리자 사방의 군막에서 수천에 달하는 군사들이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상당한 무공을 지닌 무인도 수십 명 있었다.

“주군!”

유백온과 서달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십여 명의 무인들과 함께 중앙의 가장 큰 군막으로 뛰어들었다.

군막 안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중앙에는 대장군복을 입은 중년인이 가슴에서 피를 콸콸 흘리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호위하던 병사들과 무인들 이십여 명이 사지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주군!”

유백온이 대장군복을 입은 중년인에게 달려가는 사이, 서달과 십여 명의 무인들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곧이어 수천 명의 병사들이 군막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서달은 군막을 살피더니 위쪽 한 귀퉁이가 잘려져 있는 것을 보자 몸을 날렸다. 구멍은 꽤 커, 육중한 서달의 몸이 빠져나갈 정도는 되었다.

유백온은 중년인의 목에 손가락을 대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미 죽은 것이다.

“손 대협!”

유백온의 외침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무인 한 명이 급히 다가왔다. 그는 철장건권이라 불리는 영웅회의 초절정 고수였다.

“대장군께서 당하셨습니까?”

중년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직감한 그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이 되어 있었다.

주원장을 지키기 위해 영웅회의 최고 무력 집단인 영웅무단의 무인 백 명이나 주위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자객이 들어와 주원장을 시해했으니, 책임자인 그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원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새롭게 무림을 재탄생시키려는 영웅회의 계획도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주군께서는 안전한 곳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자는 만약을 위해 준비한 주군의 대역입니다.”

“하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철장건권은 그제야 얼굴이 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주위에 수만 명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고, 대장군 군막 주위에는 영웅회의 고수 수십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중한 경비를 뚫고 들어와, 가짜이긴 하지만 대장군복을 입은 자를 죽였습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죽은 군사와 무인 중 영웅회 소속 무인이 열 명이나 됩니다.”

유백온의 질책에 철장건권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답을 하지 못했다.

주원장이 시해당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경비망을 우습게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태양천에서 나온 자객 같습니다.”

죽은 시신들을 살피던 무인 한 명이 무언가 발견한 듯 보고했다.

“확실하냐?”

“예전 태양천에 암살당한 자들과 상처가 비슷합니다.”

“드디어 태양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구나.”

철장건권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나타났다. 이 백 명이 넘는 영웅무단의 고수들이 태양천의 살수 한 명을 막아 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영웅회를 신뢰할 수 있겠소?”

그때 군막 한쪽이 열리며 진짜 주원장이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장 영웅회에 연락해 태양천의 자객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정도로는 불안하다. 내가 전에 말한 악불군이라는 소협을 찾아와라.”

주원장의 말에 담긴 악불군의 이름에, 철장건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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