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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01화 (201/472)

<천검지애 201화>

201화. 변화의 중심(2)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모두는 곽부용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문주님.”

“말하세요.”

“그런데 악 대협과 구천마성간에 서로 먼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면서 백교방을 건드리면 구천마성에게 명분을 주는 것이 아닐까요?”

“구천마성이 백교방의 뒤에 있다는 것은 첩보라고 했지요?”

“예.”

“그럼 명분이 될 수가 없지요. 더구나 구천마성으로서는 대놓고 자신들이 뒷배라고 밝히지 못합니다. 그랬다가는 정파들의 견제가 집중될 테니까요. 우린 백교방을 없애고 나서 몰랐다고 하면 됩니다.”

어찌 보면 너무 무림인들의 생태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게 담수련의 말을 믿고 있었다.

“사파 두 곳은 저희들의 전력으로도 제거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백교방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보고서를 보니까 지금 잠봉밀의 힘으로 그들을 없애는 것은 어려울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그곳은 천신문주의 이름으로 나와 악 대협, 둘이 할 거예요.”

담수련의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악불군이었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싸우거나 남들을 괴롭혀서 끼어든 경우는 있었지만, 먼저 싸움을 건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드디어 악불군이 입을 열자 모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고 싶어도 감히 쳐다보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할 말 있어요?”

“아직 저희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나서서 없앤다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아서요.”

담수련은 악불군의 반응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백교방이 그동안 저지른 짓에 대해 요약해 놓은 보고서야. 읽어 봐. 그놈들은 심지어 남창에 있는 잠봉밀의 지밀까지 건드리고 있었어.”

그녀가 건넨 보고서를 천천히 읽어 보던 악불군의 검미가 좁아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간해서 표정을 보이지 않는 그가 눈에 띌 정도로 찌푸렸다는 것은 상당히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이자들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자들 같습니다. 아가씨 말씀대로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시 못할 전력을 갖춘 백교방을 마치 주머니에 든 장난감을 부숴 버리겠다는 듯 간단하게 말하는 악불군의 말을 듣고서, 누진봉을 비롯한 네 명은 자신들도 모르게 머리를 살짝 조아렸다.

분명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절대자의 기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괴, 굉장한 자다. 가주님 이후에 이런 압박감은 처음이야…….’

누진봉은 악불군이 단지 무공만 높은 그런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 장로님.”

“예? 예!”

누진봉의 목소리에 갑자기 기합이 들어 있었다.

“일주일 안에 지밀을 총단으로 바꾸고 남창을 정리해야 하니 당장 준비시키세요.”

“그,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남창 지밀에 대해 보고서에 적혀 있는 것을 안 읽으셨어요?”

“읽었습니다.”

누진봉은 당황한 표정을 급히 답했다.

“여기 보니 백교방에서 지밀이 보유하고 있는 포목점을 비우라고 했더군요. 그 기간이 일주일 후예요.”

“사실, 그 문제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자신을 숨기려고만 한다면, 계속 이런 식으로 빼앗기기만 하다가 세력을 키우기도 전에 몰락할 수도 있다는 증거가 바로 이거예요.”

“죄송합니다.”

“어차피 총단으로 바꿔야 할 곳이에요. 이사했다가 다시 들어가는 번거로움을 자초할 이유가 없지요. 일주일 안에 잠봉밀을 완전히 지워 버리시고 천신문으로 바꾸는 작업을 끝내세요. 그리고 이사하기로 한 날 지단에 천신문 총단 현판을 다세요.”

“명대로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누진봉은 크게 답하고는 모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눈에 힘주고 목소리에 무게 넣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네.”

담수련은 면사를 벗더니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모두 아가씨의 위엄에 주눅이 든 것 같더군요.”

“소군은 정말 내 위엄에 저분들이 저러는 것 같아?”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소군이 너무 모른다는 거야. 저분들은 나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니라, 소군한테 주눅이 들어서 저러는 거야.”

“제가 보기에는 분명 아가씨 때문입니다. 눈을 크게 뜰 때 얼마나 예쁘신데요.”

“소군이나 예쁘게 보지, 면사로 가렸는데 저분들이 내가 예쁜지 못생겼는지 어떻게 알아?”

“아가씨께서는 얼굴을 가려도 예쁘십니다.”

“그런데 소군, 지금 상황에서 예쁘다는 말이 왜 나온 거지?”

담수련은 분명 위엄이니 주눅이니 하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쁘다는 말로 화제가 바뀐 것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자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어색하게 변했다. 말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느낀 것을 그대로 말해버린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화의 맥락을 잘못 이해해서 딴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을 들은 담수련은 배시시 미소를 지며 말했다.

“대화 맥락 같은 건 상관 말고, 언제든지 예쁘면 예쁘다고 해도 돼.”

악불군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악불군도 미소를 지며 답했다. 담수련이 기분 좋으면 그냥 기분 좋은 그였다.

“이제 우리도 출발 준비하자고. 백교방 그놈들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지, 그냥 두면 큰일 나겠어.”

백교방의 만행은 실로 잔혹했다. 더욱이 어찰단까지 사라지고 치안까지 완전히 무너진 지금, 그들의 악행은 양민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저야 아가씨만 준비되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습니다.”

* * *

“누 장로님, 우리가 그동안 가주님의 명을 받아 짜온 계획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괜찮을까요?”

“천호무적검은 우리 계획에 전혀 없던 변수다. 만약 그가 혼자서 백교방을 없앤다면 원래의 계획보다 안전하고 확실할 수 있다.”

누진봉의 말에 곽부용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호무적검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예요. 그런데 그를 아가씨는 완전히 믿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게 된 걸까요?”

“대하는 걸 보면 아가씨께는 이상할 정도로 너무 공손해.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악 대협에게 존대와 반말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느냐?”

“저도 느꼈습니다. 존대를 할 때보다는 반말을 할 때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내가 들은 아가씨는 여간한 사이에는 절대 말을 놓지 않는 분이다.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분명해.”

“맞습니다. 그 까칠한 종리 단주님께서 여기까지 같이 보냈다는 건, 확실하게 믿는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럼 가주님께서 준비한 사람이란 말인데, 우린 들은 것이 왜 하나도 없지?”

“저희가 잠룡세가를 나온 지 이미 이십 년입니다.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당연히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분명 한 문파의 수장이라는 말도 했어요. 본 가 사람이라면 다른 문파의 수장일 리는 없지 않을까요?”

“저도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한 문파의 수장이나 되는 사람이 지금 같은 시기에 자신의 문파를 놔두고 아가씨의 호위를 자처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가씨의 미모는 어렸을 적부터 유명했습니다. 지금은 더 아름다워지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에게 반한 것은 아닐까요?”

곽부용의 말은 가장 그럴 듯했다.

“우리끼리 설왕설래해 봐야 소용없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니, 너희는 나가서 총단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준비를 해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가씨란 호칭은 더 이상 사용하지 말거라. 수하들에게도 문주님으로 호칭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가주님과의 연락이 끊어지면서 분위기가 침체되고 상당히 동요하는 느낌이었는데, 다행이구나.’

모두가 나가자 누진봉은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말들은 많았지만 천호무적검이라는 절대 고수가 자신들을 돕는다는 상황 변화에 상당히 들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거대한 포양호를 끼고 있는 남창은 강서성의 성도로 대단히 큰 도시였다.

홍항에서 무역으로 들어오는 물품은 물론 광동과 광서에서 산출되는 곡물들이 모였다가 뱃길과 운하를 통해 북쪽으로 퍼져 나가는 물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물러나면서 치안에 커다란 공백이 생기면서 지금은 완전히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토호 군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세가 약해, 몰려드는 마도와 사파의 무림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보호세라는 명목으로 거의 약탈에 가까운 착취를 일삼았고, 기녀들은 물론 양갓집 규슈들까지 건드릴 정도였다.

특히 백교방은 안하무인으로 가장 많은 패악질을 부렸는데, 원나라가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말까지 퍼질 정도였다.

간부들 십여 명과 함께 여인들을 안고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던 백교방주는 내당당주가 조용히 들어오자 힐끗 보며 소리쳤다.

“추 당주는 뭐가 그렇게 바쁘냐?”

“포양상회를 감시하던 수하들에게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 듣고 왔습니다.”

백교방주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 장원을 비우기로 한 거 아니더냐?”

“맞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들 이십여 명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무림인? 이놈들 봐라? 어디서 낭인 놈들을 불러 모은 모양인데 우리와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남창 중심지에 그 정도로 큰 장원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니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

“오늘 유시(酉時)까지 비우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려 줄 생각입니다.”

“만약 그때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면 아예 모조리 죽이고 포목들까지 다 압수해라. 감히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보기로 보여 주는 것도 괜찮다.”

“알겠습니다.”

그때, 전각의 주위를 경계하던 무인이 다가오더니 내당당주에게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냐?”

“포양상회를 감시하던 수하가 새로운 전갈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런데 좀 어이가 없는 보고라서…….”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빨리 말해라.”

“삼십 명 정도의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커다란 마차가 포양상회로 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놈들이 상회의 간판을 떼고 천신문이라는 현판을 단 모양입니다.”

“천신문은 또 뭐야?”

“무림 방파라고 합니다.”

“포목이나 팔던 놈들이 낭인 몇십 명 데려왔다고 무림 문파가 된다더냐?”

“그래서 어이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백교방주는 기분을 잡친 듯 술잔을 던져 버리며 말했다.

“오늘 술판은 이 정도에서 끝낸다. 추 당주.”

“예!”

“유시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다. 아이들 데리고 당장 가서 포양상회 놈들을 쫓아내라. 만약 반항하면 다 죽여도 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소군, 몇 놈들이나 감시하는 것 같아?”

“장원 주위로만 열 명이 넘습니다.”

장원 안으로 들어선 담수련은 큰 정청에 마련된 자리에 앉더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누진봉을 보며 물었다.

“누 장로, 백교방에서 이 장원을 얼마에 달라고 했다고요?”

“금자 두 냥입니다.”

“난 포목상회로 위장하고 있다고 해서 작은 줄 알았는데, 이 정도 크기면 못해도 금자 만 냥은 받을 수 있겠어요. 그걸 두 냥에 먹어치우려고 하다니 완전 날강도들이네요.”

“천신문 현판은 방금 달았습니다. 아마 백교방에서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면 명분도 생기고 더 좋지요 뭐. 유 당주와 한 당주는 보냈습니까?”

“지금쯤 도착했을 것입니다.”

“큰 피해는 없겠지요?”

유징과 한태성은 백교방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는 사파를 공격하기 위해 은밀하게 떠난 상황이었다.

“그쪽은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두 당주가 실력 있는 수하들을 대부분 다 데려가서, 백교방이 이곳을 공격하면 상대할 수하들의 수가 너무 부족한 것이 좀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기 공격 못 해요. 악 대협.”

“예, 아가씨.”

“천호십영에게는 연락했지요?”

“예, 이미 백교방을 포위하고 있을 것입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누진봉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모르는 수하들이 또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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