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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03화 (203/472)

<천검지애 203화>

203화. 시작(2)

꿀꺽-

총관은 침을 삼켰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마 속 여인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가는, 그 즉시 백교방주에게 죽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지금 앞에 죽어 있는 자들 사이에 자신도 눕게 될 수 있었다.

‘뒤로 반 장만 빠지면 문 안이야. 그래, 뒤로 도망치자.’

생과 사의 갈등 속에 그는 결국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말았다. 백교방주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반 장은 매우 짧은 거리였지만, 혈단궁이 날아오는 속도까지 뿌리칠 정도로 짧지는 않았다.

“커억!”

뒤로 휙 돌며 안으로 도망치려던 총관의 입에서 거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짧은 화살 하나가 뒷목을 뚫고 그의 목울대를 부수며 빠져나간 것이다.

‘에이…… 말할걸…….’

총관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했지만, 더 이상의 생각은 이어질 수 없었다.

후장룡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총관이 죽어 나가자 얼굴이 확 변했다. 이 정도면 그조차 피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 장로, 우선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날 수 있도록 해 봐라. 복수할 시간은 많다.]

[알겠습니다.]

백교방주의 전음을 들은 후장룡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발은 정문은 벗어나지 않았다. 백교방의 이인자인 그조차 겁을 먹은 것이다.

“난 백교방의 장로인 후장룡이오! 무림에서는 경혼마수로 불리고 있소.”

그는 우선 자신의 지위와 명호를 먼저 말했다. 겁을 먹은 개가 크게 짓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하실 말이 있으신가요?”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정체도 밝히지 않고 이유도 없이 이런 살상을 범하는 것은 강호의 도의를 저버린 무도한 행동이오! 강호인들의 지탄을 받는 것이 두렵지 않으시오?”

“무도요? 호호호! 멀쩡하게 장사 잘하는 본 문의 상회를 무작정 탈취하려고 한 자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가마 속 여인은 대단히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개 포목상이 이상할 정도로 큰 장원을 중심가에 가지고 있어서 뭔가 있는 것 아닌가 했는데, 좀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구나…….’

후장룡은 이들과 포양상회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자 급히 변명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이다. 본 방은 남의 물건을 탈취하고 그런 곳이 아니외다.”

“오늘까지 비우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고 통보도 했던데, 이제 와서 그런 곳이 아니라고 하시다니. 말로만 듣던 철면피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철면피라니 말을 너무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니시오?”

“거짓말을 하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니 철면피 아닌가요?”

“본 방에서는 포양상회는 분명히 제값을 주고 살 생각이었소이다.”

“제값을 주고 사시려고 하신 분이 겨우 금자 두 냥을 제시했다는 말인가요?”

“그건 계약금이었소. 오늘 정식으로 제값을 쳐주려고 했소.”

“사파도 아니고 명색이 마도를 표방하는 백교방에서 하는 변명치고는 무척이나 치졸하군요.”

“소저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제가 누군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저는 천신문의 문주인 천상신녀라고 합니다. 들어 보신 적이나 있을지 모르겠군요?”

‘천상신녀? 어디서 들은 명호인데?’

후장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눈이 커졌다. 그도 소문을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천호무적검과 같이 다닌다는 여협이 아니시오?”

“이 일은 천신문의 일이니 천호무적검과 연관을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후장룡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천호무적검과 연관 지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나 이는 오히려 자신이 천호무적검이 보호한다고 소문난 천상신녀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확인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백교방주가 강하다고는 하나 구천마성의 호법이나 장로들과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천호무적검은 그들 세 명과 싸우고도 이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방주님, 어떻게 할까요?]

후장룡은 판단이 안 서자 급히 백교방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구천마성에서도 천호무적검과의 시비는 피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만 돌아가면 여기서 끝내겠다고 하고 포양상회도 포기하겠다고 해라.]

백교방주의 명을 들은 후장룡은 약간은 비굴한 웃음을 지며 말했다.

“본 방은 하찮은 시비 따위로 원한을 맺고 하는 것을 극히 싫어합니다. 오늘은 완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으니 이만 화해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본 문이 귀방의 횡포로 인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화해를 하자니, 너무 불공평한 것 같은데요?”

“보시다시피 본 방의 방도들이 수십 명이나 죽었소이다. 우리가 포양상회를 좀 싼 가격에 매입하려고 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이 없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본 방은 포양상회의 인수를 아예 포기하겠소이다.”

“경혼마수라는 명호도 가지고 계시고 연세도 지긋하신 것을 보면 강호 경험이 풍부하신 것 같은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나 보네요.”

“무슨 의미요?”

“포양상회는 그냥 핑계라는 말이지요. 본 문주는 오늘부로 남창성을 본 문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온 겁니다.”

후장룡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남창성은 이미 본 방이 뿌리를 내린 곳이오. 문주께서는 본 방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소이다. 우리와 끝까지 싸운다면 귀 문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오. 무엇보다 본 방은 구천마성의 협력 세력이오. 후환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시오!”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닥치면 알아볼게요. 그래도 강호의 도의가 있으니 마지막 기회는 하나 드리지요. 나는 백교방도가 아니다 소리치고 남창을 떠나겠다고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어요.”

후장룡은 총관과는 달리 명색이 마두로 불리는 자였다. 그런 그에게 담수련의 말은 실로 치욕적이어서, 죽는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내의 한계를 먼저 보인 것은 백교방주였다.

백교방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모습을 드러내더니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포악한 그가 지금까지 참은 것도 사실 많이 참은 것이었다.

“이런 건방진 년을 봤나! 무슨 재롱을 부리나 보려고 가만두고 봤더니 안하무인이구나. 뭐하는 거냐! 저놈들을 당장 죽여라!”

백교방주의 명이 떨어지자 문과 담을 넘어 백 명이 넘는 방도들이 뛰쳐나갔다.

그들도 오늘 싸움에서 지는 순간 죽음이라는 느낀 듯 사생결단의 자세였다. 거기다 백교방주와 후장룡 등 간부들이 앞장을 서자 처음에 느꼈던 공포도 많이 사라진 듯했다.

“천호십영은 들으라, 오늘 백교방을 무림에서 완전히 지운다. 모두 죽여라!”

백교방도들이 몰려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나타난 악불군이 가마 앞에 우뚝 서더니 커다랗게 명을 내렸다.

그것은 악불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었다.

담수련이 명했어도 천호십영은 따랐겠지만, 담수련은 굳이 악불군에게 직접 명을 내리라고 했다.

천호방과 천신문은 엄연히 다른 조직이니 명령 체계를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악불군과 잠룡세가 간의 연관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려는 계산이 서 있었다.

처음 불안해하던 것과는 달리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백교방의 저력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더욱이 집단전이 되자 백인막의 장점인 살수 무공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은신술을 이용한 암습을 하려면 은폐물이 많은 숲이거나 어두운 밤이어야 유리한데, 이곳은 큰 성의 대로였고 아직 주위도 밝았기 때문이었다.

백인막은 일 호부터 이십 호까지는 살수 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절정 고수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백교방의 간부급들하고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살수가 어디서 온…… 설마 백인막?’

다가오는 살수들을 검으로 상대하면서 상황을 살피던 백교방주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살수들이 끼어 있다는 것을 느끼자 다급해졌다.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 질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가마와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갑자기 나타나 명령을 내린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상대하기에는 두어 수 모자라다고 느낀 백교방주는 검을 고쳐 잡고는 가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런 집단전에서 상대의 머리를 제거하는 것은 승리의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는 지금 가만 안에 있었다.

천상신녀의 옆에는 천호무적검이 있다는 소문을 한 번 더 생각했다면 좋았을 것이었지만, 대노한 그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휘익!

백교방주의 귀살마검은 빠르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어찰단의 살벌한 압제 속에도 살아남은 것도 그의 검법 덕분이었다.

그는 악불군은 물론 가마를 메고 있는 매향과 흑란 특히 가만 안에 있는 담수련까지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판단을 해서인지 거침없이 검을 찔러 갔다.

‘저 자세는 뭐지?’

백교방주는 무방비로 서 있던 악불군이 자신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이상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는 왠지 모를 섬찟함을 느꼈다. 공격 자세도 아니고 방어 자세도 아닌 아주 특이한 악불군의 자세가 그의 위기 본능을 다시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력을 실은 공격이기에 검을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챙챙챙챙!

백교방주는 자신의 공격이 너무도 간단하게 악불군의 검에 막히자 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그제야 천호무적검에 대한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담수련을 노리는 공격을 한 그를 그대로 물러나게 할 악불군이 아니었다.

방어만 하던 악불군의 검이 공세로 전환됐다.

‘이, 이게 무슨 수법인데 이렇게 끈질기게 따라와? 이놈, 진짜 천호무적검인가?’

백교방주가 아무리 보법을 빠르게 밟아도 악불군의 검은 자신의 몸에서 반 자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악불군이 실수를 한 것인지 검이 그의 어깨를 스쳐 나갔다. 순간 백교방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검이 빗나가면서 악불군의 가슴이 훤히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기회다!’

쾌재를 부르며 그는 귀살마검의 최고 절초를 연달아 뿌렸다.

죽음을 넘나드는 생사투를 수없이 한 그답게 대단히 빠른 임기응변의 수였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목을 뚫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목이 관통돼 비명도 지르지 못한 백교방주는 악불군의 검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런데 의아한 표정은 악불군도 짓고 있었다.

그의 검은 연검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연검인 듯 꺾이며 백교방주의 목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상황을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한 악불군은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은 언제 그랬냐는 듯 꼿꼿하게 펴졌다.

‘이상하다 이렇게 단단한 검이 어떻게…….’

악불군이 검을 손으로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그제야 백교방주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곧 누군가의 입에서 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바, 방주님께서 당하셨다!”

그러자 열심히 싸우던 백교방도들은 피를 괄괄 흘리며 쓰러진 방주를 흘깃 보더니 사방으로 몸을 날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집단전에서 적의 수장을 제거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백교방주의 생각은 확실히 옳았다. 다만 죽은 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그의 불행이었다.

도망치는 적들의 뒤를 백인막의 살수들이 쫓아가는 것을 보자 악불군은 전음을 날렸다.

[고노!]

[예!]

[싸움이 정리되어 가는 것 같으니 백교방 총단에 들어가서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을 정리하십시오. 분명 비밀 창고가 있을 겁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방주님, 천하에서 비밀창고를 가장 잘 찾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걱정 마십시오.]

귀도신영의 말에 악불군은 피식! 웃었다.

[하긴, 고노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럼 부탁합니다.]

[예!]

귀도신영과의 대화를 끝낸 악불군은 다시 천륭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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