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04화 (204/472)

<천검지애 204화>

204화. 변화의 중심(1)

남창성의 주민들은 하루 만에 벌어진 천지개벽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에게는 온갖 패악질을 행하던 공포의 존재, 사파 두 곳과 백교방이 하루 만에 모조리 멸문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저 멸문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곽에 그들의 목을 효시했다.

성곽에 몰려온 주민들은 매달린 목과 바닥에 널려 있는 시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심지어 몽둥이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들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목을 효시하고 시신들을 쌓아 두라고 해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루에 올라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악불군은 주민들의 원한이 느껴지자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했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면 사람들은 평생 화병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새편작 어르신의 의서에 적혀 있었어. 백교방과 사파는 착취만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주민들의 가족 중 한두 명은 그들에게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여인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도 많아.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 주지 않으면 저들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을 거야.”

“역시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은 무슨? 소군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어. 그런데 아까 무슨 일이 있었어?”

“언제 말입니까?”

“아까 백교방의 방주와 싸운 후에 잠시 멍해 있어서, 좀 이상하다 느꼈거든.”

“그걸 아셨습니까? 정말 아가씨의 눈을 속을 수는 없나 봅니다.”

악불군이 백교방주를 죽인 수법에 스스로 놀라 잠시 멍했던 순간은 정말 찰나였다. 그런데 그것을 담수련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소군만 보고 있는데 어떻게 몰라…….’

당연한 것을 모르는 악불군에게 조금 서운했지만, 담수련은 입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난 소군에 대한 것은 다 안다니까!”

“하하,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인정해야 할 것 같네요.”

“왜 그랬는데?”

“백교방주를 공격할 때 검이 빗나갔습니다.”

“고수들끼리 싸우다 보면 그런 적은 많지 않나?”

“그런데 갑자기 검이 휘면서 그의 목을 찔렀습니다.”

“……검이 휘면서?”

“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제가 의도치 않았거든요.”

“소군이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랬다는 거야?”

“예, 더구나 제 검은 연검(軟劍)이 아닙니다. 휘어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 그렇구나. 소군이 멍한 이유가 되네. 그런데 말이야. 검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검은 왜 천륭검가의 보물이었을까? 검도 보통 검보다는 짧고, 그렇다고 대단한 보검 같이 보이지도 않잖아?”

“그렇긴 하지요.”

“그럼 우리가 모르는 검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가주가 사용했다고 해서 가문의 보물로 귀히 여기지는 않는 법이니까.”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검보만 수련했지, 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안 썼네요. 오늘부터는 검에 대해서도 좀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봐! 나랑 같이 고민하니깐 다 풀리잖아?”

“예, 역시 전 아가씨께서 옆에 있어야 뭐든 다 풀리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행복한 미소를 활짝 지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도움이 되는 여자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악불군의 담수련의 기가 갑자기 가라앉는 것을 느끼자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야.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데 불편하겠어.”

그녀는 자신이 몇 년 안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자 가슴이 아파 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일찍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 살아왔기에, 예전에는 죽는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불군과 강호행을 같이하면서 점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었다. 악불군을 두고 죽는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진 것이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악불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평소와 달리 심각할 정도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와아!”

그때 성루 아래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연이어 또 다른 환호가 울려 퍼졌다.

“천신문 천세!”

“천신문 천세……!”

누진봉이 백교방을 없앤 천신문의 장로라며 자신을 소개한 후 백교방과 사파 두 곳에 모아 놓은 재물들과 염왕채로 빼앗긴 주민들의 재산들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담수련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소군.”

“예.”

“난 사람들이 저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아.”

“저도 그렇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둘의 눈에는 서로 간의 사랑이 담뿍 담겨 있어서 누가 보아도 이미 연인이었지만, 둘은 안타깝게도 서로를 향해 다가설 한 걸음이 부족했다.

* * *

“여기까지 들어오시면 어떡합니까?”

자신의 침소에 든 담수운은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남들의 이목도 있으니 전음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시는 분이,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여기까지 들어오신 겁니까?]

구석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종산은자였다.

[회주님께 공자님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천제무황 회주님께 제 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아직 여기까지는 소식이 안 전해졌을 겁니다. 주원장이 진유량에게 크게 이겼습니다. 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장사성이 약속한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서 진유량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대패를 하고 지금 피신 중이라고 합니다.]

[영웅회에서 주원장을 밀고 있다고 들었는데, 탁월한 판단을 한 것 같군요.]

[그렇게 된 셈이지요. 장사성은 주원장과 진유량이 양패구상을 하기를 바란 것 같은데, 예상과 달리 주원장의 군사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유량을 도왔던 구천마성이나 장사성을 도운 혈해마계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된 셈이지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장사성 혼자로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주원장의 군사들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곧 대강 이남이 주원장에 의해 장악될 것입니다. 그럼 다음은 하북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원나라를 북방으로 완전히 몰아내는 일만 남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과 저에 대해 회주님께 말한 것이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영웅회의 군웅들이 예전의 문파를 재건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웅회는 무림맹으로 탈바꿈을 하겠지요. 회주님께서는 무림맹을 창설하면 곧 주원장과 만나 무림에 대한 자율권을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타결되면 논공행상과 함께 부역자에 대한 처벌을 시작하겠지요.]

담수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해 갔다.

[선배님께서는 저희들과 태산종가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회주님께 알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오룡세가에 대한 무림의 원한은 깊고도 깊습니다. 공자님께서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영웅회를 도와주신 공이 많다는 것은 압니다. 하나, 오룡세가 중에서도 중원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잠룡세가의 직계이신지라 제 선에서 한 약속만으로는 좀 부족하다고 느낀 것뿐입니다.]

[그 얘기는 밝은 날에 해도 되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도 되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공자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대한 지금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회주님께서는 공자님의 결단과 그동안의 도움에 대해 치하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중원을 위해 마지막 결단을 부탁하셨습니다.]

[마지막 결단이라니 무슨 의미입니까? 저 보고 스스로 자진이라도 하라는 것입니까?]

[중원을 위해 부자지간의 정까지 끊어 내신 공자님께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회주님께서는 절강성에 잠룡세가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다.]

[전 이미 잠룡세가를 떠났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생사가 불명인 상황에서 저의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잠룡세가에 생각 외로 담 가주에게 충성하는 수하들이 많습니다. 담 가주께서 없는 지금 공자님께서 잠룡세가에 들어선다면 세가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담수운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조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잠룡세가의 마부로 오랫동안 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소가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도 잘 아실 텐데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을 보니, 세가에 분란을 만들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최악의 경우 내분을 만들어 잠룡세가를 쪼개 버리거나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렇게만 되면 공자님은 중원을 위해 살신성인한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담무룡이 사라진 잠룡세가는 이미 절강에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다. 영웅회에서 공격을 한다면 거의 십 할의 확률로 이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흩어지는 순간 부역자로 몰려 쫓겨 다녀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당연히 상당한 저항은 피할 수가 없었다.

종산은자는 담수운을 마지막까지 이용해 잠룡세가를 자신들의 피해 없이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나를 소가주로 받들던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나만 영웅으로 추앙받으라는 겁니까? 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숨어 살 수 있기만 하면 된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공자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담 소저와 태산종가도 생각하셔야지요.]

담수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대룡상단을 넘기기로 한 날이 이제 열흘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이 문제도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아까도 말했다시피 지금 정세가 급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주원장이 장사성까지 제거하면 그땐 더 이상 공자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고도 희석될 수 있습니다.]

[선배님, 대룡상단을 넘기는 것은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 식솔들은 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들은 잠룡세가를 나온 지 대부분 십 년이 넘었습니다.]

[공자님, 괜한 동정심에 전부를 잃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공자님과 담 소저는 담 가주의 직계 자손입니다. 두 분께서 부역자들과는 완전히 선을 그었다는 것을 보여 주어도 인정하지 않는 무림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하들까지 살리려 한다면 저의를 의심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라니, 무슨 말입니까?]

[오룡세가에 멸문당한 무림인들의 자손들은 그늘에서 태어나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도 편안함도 전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공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수하까지 계속 거두려 한다면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다.]

담수운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자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흘 안에 모든 것을 결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너무 비정하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원나라와 부역자들에게 당한 무림인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이해하실 겁니다.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종산은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수련아…….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후회가 남을 것 같구나.’

담수운은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던 담수련을 생각하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 * *

“벌써 절강까지 다녀오셨다고요?”

“예!”

“자세히 말해 주세요.”

“절강에 갔더니…….”

새롭게 단장한 천신문의 문주 집무실에서 악불군과 담수련을 독대한 귀도신영은 그동안 자신이 모은 정보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담수련의 능력에 정확한 정보가 더해진다면 어떤 기상천외한 묘책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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