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10화>
210화. 영웅회(2)
“존장이 얘기를 하는데 시녀 따위가 그런 경망한 웃음을 터뜨리다니 벌이라도 받고 싶으냐?”
양종철이 화가 난 듯 소리치자 흑란이 사색으로 변하여 급히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어르신, 제가 경솔히 행동하여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양종철은 흑란과 다른 사화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너희가 사화냐?”
“예, 그렇습니다.”
“종리 단주에게 잠봉단에서 아주 뛰어난 아이들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좀 실망스럽구나!”
“죄송합니다.”
“웃은 이유가 뭐냐? 다른 시녀 같으면 당장 치도곤을 내리겠지만, 사화라면 이유 없이 웃지는 않았을 터! 말해 봐라.”
“그, 그게…….”
“당장 말하지 못하겠느냐?”
양종철이 이렇게 화난 이유는 그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악 무사님은 강호에 나온 후 절정 고수들과 싸운 것이 이미 수십 번이 넘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전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용서하십시오.”
“절정 고수와…… 수십 번? 아니, 강호에 나온 지 이제 일 년 정도 된 것으로 아는데 벌써 수십 번이나 생사결을 했다는 말이냐?”
양호철은 흑란에게 물었지만 눈은 악불군을 향하고 있었다.
무림인이 싸움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과 싸우지, 절정 고수들과 생사결은 최대한 피하는 법이었다.
평생을 무림에서 살아온 그도 셀 수 없이 싸우기는 했지만, 고수들과의 생사결은 오십 번이 채 안 됐을 정도였다.
“이상하게 싸움이 좀 많았습니다.”
“그 정도로 많았다면 이름이 알려졌을 텐데? 자네 혹시 명호가 있는가?”
“남들이 부르는 명호가 있긴 합니다.”
“그래도 강호에 나온 지 일 년도 안 되어 명호를 얻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래, 자네의 명호는 뭔가?”
“천호무적검이라고, 제겐 좀 과분한 명호입니다.”
양종철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더니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지, 지금 뭐, 뭐라고 했나? 처, 천호무적검……?”
간신히 정신 차린 듯 말을 하긴 했지만, 말을 더듬을 정도로 경악을 한 상태였다.
“그렇게 부르고 있더군요.”
“그럼 그 악불군이 자네란 말인가?”
“또 다른 악불군이 있나 보군요?”
“아, 아니네.”
대답을 한 양호철의 자세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악불군을 한 수 아래로 보듯 약간 뻣뻣하던 그의 자세가 부드러워졌고 말투 역시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소군, 안으로 들어와.]
그때, 담수련의 전음이 들리자 악불군은 양종철을 보며 말했다.
“안에서 들어오라고 하는군요.”
양종철과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무슨 심각한 얘기를 나누셨기에 두 분 다 저리 표정이 심각하시지?’
[소군, 지금 도창 상황은 어떻다고 해?]
악불군이 들어오자 담수련이 물었다. 양종철 역시 담수운의 전음을 듣고 있는 듯했다.
[일각 전, 사 영주에게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연락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빨리 끝났네. 그럼 이제부터 내 얘기 잘 들어.]
담수련은 조금 전까지 한 대화를 빠르게 악불군에게 전했다.
[숨어 있는 자를 잡아 올까요?]
[아니야, 무작정 잡아 오면 영웅회에서 직접 움직이게 돼. 그것보다는 그들도 우리를 알아볼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부터 숨어 있다는 자가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해. 갑자기 잘 들리면 의심할 수 있으니까, 내 말을 따라서 소리를 막았다가 듣게 했다가 해 줘.]
[알겠습니다.]
담수련은 담수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양종철과 얘기가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담수련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본 방의 뜻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인가요?”
“저희는 무림 문파도 아니고 일개 상단입니다. 그런데 천호방의 협력 세력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안 들리게 해.]
“오라버니, 이제부터 잘하셔야 해요. 제가 좀 무례하게 굴어도 이해하시고요.”
“알았다.”
[들리게 해.]
전음을 보낸 담수련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총수님께서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신 것 같은데, 도창은 이미 천호방에서 접수했습니다. 그렇다면 도창에 총단이 있는 대룡상단으로서는 우리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본 상단은 사실 장사가 안 돼서 접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며칠 후면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상품도 다 옮기고 상단도 다른 분이 인수하기로 했으니, 그분들과 다시 얘기를 해 보시지요.”
“그건 걱정 마세요. 본 방의 협력 세력이 된다면 대룡상단의 물품의 판로는 물론, 운반과 총수님 이하 상단의 모든 분들의 안전도 저희가 책임질 겁니다.”
“이미 상단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로…….”
“저희를 속이고 대룡상단의 재산을 빼돌리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잔수에 넘어갈 저희가 아닙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대룡상단이 보유한 재산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대룡상단의 재산을 왜 천호방에서 파악한단 말입니까? 어떤 무림 세력도 멀쩡한 상단을 그런 식으로 강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거야 나라가 온전할 때 이야기지요. 지금은 대룡상단을 보호해 줄 관이나 군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 방은 정파입니다. 당연히 강탈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보호할 뿐이지요.”
“하지만 이건 제가 보기에…….”
“총수님, 제가 예우해 줄 때 따르세요. 그리고 방주님께서는 천호방이 완전히 도창을 장악할 때까지 도창 전체를 봉쇄하실 거예요. 만약 불만이 있거나 건의 사안이 있다면 봉쇄가 끝난 뒤에 다시 말하세요. 만약 제 말을 무시하고 도창을 벗어나려는 자가 있거나 물건을 나르는 자가 있으면, 그땐 더 이상의 예우는 없습니다.”
* * *
안에서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위험을 무릅쓰고 더 가까이 갈까를 고민하던 종산은자는,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며 소리가 들리자 귀를 쫑긋했다.
들리기 시작한 대화에선, 다행히 서로 간의 의견이 안 맞는지 계속 언성이 높았다. 그리고 대화를 듣는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천호방? 도창에 그런 문파가 있었나?’
영웅회에서는 이제 마지막 남은 장사성과 주원장의 격돌이 끝나면 누가 이기건 대대적인 북진이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미 안휘와 하남 그리고 호북 등은 준비에 들어갔고, 호남 역시 제갈세가에서 총단을 새로 지으며 세력 구축 중이었다.
중원의 혼란에서 비껴나 있는 사천에서도 당문과 청성 그리고 아미파 연합 세력이 태룡세가에 간헐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복건과 강서 그리고 호남 남부는 원래부터 큰 문파가 없었고, 모습을 드러낸 구천마성에서 공공연히 세력 확장을 하면서 가장 고심하는 지역이었다.
그중 강서 북부 지역은 구천마성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접수를 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가장 핵심 지역이 남창을 위시한 포양호변의 성과 현들이었다. 포양호에서 생기는 수입이 엄청났고 북과 남을 이어 주는 수로가 잘 정비가 되어 있어서였다.
한마디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천호방이 핵심 지역 중 하나인 도창을 접수했다고 떠들고 있었다. 더욱이 대룡상단까지 협력 세력이라는 미명하에 먹어치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근래 곳곳에서 신흥 문파들이 난립한다고 하더니, 정말 문제군. 진짜 저 정도의 무공으로 도창을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들을 만큼 다 들었다고 판단한 그는 비소를 살짝 짓고는 조용히 대룡상단을 빠져나갔다.
그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 * *
“사 영주.”
종산은자가 사라진 것을 감지한 악불군은 사효조를 불렀다.
[예!]
“내려 와서 인사하시오.”
담수운과 양종철은 사효조가 그들의 앞에 스르르 나타나자 흠칫했다. 말하자마자 나타났다는 것은 그가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은신술이구려?”
양종철은 사효조의 모습을 한 번 훑어보더니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사효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시오.”
“예!”
사효조가 일어나자 악불군은 소개를 시작했다.
“인사하게 이분은 대룡상단의 총수님이자 아가씨의 오라버니이신 담수운 공자님, 그리고 이쪽은 총행수이신 양종철 대협이시네.”
“천호방 천호십영주 중 이 영주인 사효조입니다.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사효조가 포권을 하자 담수운과 양종철은 급히 포권을 했다.
“담수운입니다.”
“양종철이오.”
인사가 끝나자 악불군은 담수운을 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사 영주가 수하 이십 명과 함께 공자님의 신변을 보호할 것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총수님을 보호하려 한다면 우리도 사람은 있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잠룡세가 사람들이 공자님을 보호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 영주가 감시한다면 잠룡세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천호방의 행사가 되니, 영웅회의 의심을 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총행수님, 소군에게 방주님이라고 호칭하고 말투도 존칭으로 바꿔 주세요. 자꾸 그런 말투를 쓰다 누군가 들으면 우리의 계획이 어긋나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악 방주, 이런 강압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보호한다면 그들이 즉시 천호방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이런 식으로 이목을 끌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생각 외로 양종철의 존칭은 자연스러웠다. 악불군이 천호무적검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영웅회가 대룡상단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면 그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담수운이 영웅회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비밀로 하라고 당부를 한 터였다.
“아가씨께서 숨는 것을 지양하고 정면 돌파를 선택하셨습니다.”
악불군의 이유는 어쩌면 참 단순했다. 담수련의 뜻이니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담수련이 부언했다.
“양 총행수, 도창을 근거지로 하는 무림 세력은 아직 없어요. 무주공산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곳이 천호방의 세력이라고 알려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그들이 장악한 곳을 우리가 들어간다면 침입자는 우리가 되지만, 이제 도창은 누가 들어오든 침입자는 그들이 됩니다. 그들과 싸운다 해도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지요.”
양종철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들이 담무룡에게 하달받은 계획과는 너무 다른 전개이기 때문이었다.
“종리 단주께서도 아가씨의 이런 계획을 아십니까?”
“잠룡밀은 오라버니가 수장이고, 잠봉밀은 제가 수장이에요. 수장들이 서로 합의해서 결정했는데 종리 단주님께서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가 되나요?”
“그, 그건 아닙니다.”
양종철은 허가 찔렸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급히 부인했다. 담수운은 그가 완전히 이끌다시피 했는데 담수련은 너무 달랐다.
더욱이 처음 보았던 담수련과 지금의 담수련은 그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악불군이 천호무적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 *
자신이 묵는 객잔으로 돌아온 종산은자는 어느새 백발의 구부정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객잔의 방에는 누군가 준비해 놓은 차가 김을 모락모락 내며 탁자에 놓여 있었다.
‘천호방…….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네.’
그는 잠룡세가에서 마노 일을 보았었다. 하지만 외방의 마노였기 때문에 내전에 있는 담수련과 악불군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만약 그가 둘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면 담수련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날 수도 있었다.
[어르신.]
그때 종산은자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느냐?]
[도창의 흑도 놈들이 모조리 죽거나 불구가 돼서 쫓겨나갔습니다.]
[전부 다?]
[예.]
종산은자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자꾸 생각지 못한 변수가 이어지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