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11화>
211화. 영웅회(3)
[도창에 있는 흑도파 중 최소한 서너 곳은 흑도를 가장한 사파라고 들었는데, 아니더냐?]
[맞습니다. 상당한 무공을 지닌 놈들이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왈패인 척하는 곳이 서너 개는 되었습니다.]
[그런 곳은 여간한 전력으로는 짧은 시간 안에 없애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무공을 지닌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불구가 되어 쫓겨난 자들은 진짜 왈패들뿐이었습니다.]
‘내가 대룡상단으로 잠입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어…….’
종산은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언제 일어난 일이냐?]
[정확한 시간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반 시진 전까지는 그놈들이 활보하고 다닌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정리하는 데 반 시진도 채 안 걸렸다는 말이 아니냐?]
[저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알아본 결과 확실했습니다.]
‘흑도파 열두 곳이라면 최소한 오백 명은 상회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다 몇 개 파는 꽤 강한 무공을 지닌 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종산은자는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올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빠져나왔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상당한 조직을 가진 놈들의 짓이라는 말인데…… 그럼 너희는 언제 들었느냐?]
[그게 좀 의아했습니다.]
[왜?]
[순식간에 도창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 시간에 흑도 놈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곧바로 전 지역에 소문이 퍼진 것을 보면, 일부러 그 사실을 알렸다는 의심이 듭니다.]
‘혹시?’
종산은자는 대룡상단에서 들은 대화가 생각이 났다. 그는 급히 반문했다.
[혹시 흑도파들을 없앤 문파의 이름이 천호방이 아니더냐?]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못 보던 놈들이 대룡상단에 가서 자신들이 도창을 접수했다며 협박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천호방이라는 이름은 본 단에도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생긴 지 몇 달도 채 안 되는 신생 문파인 것 같습니다.]
[단원들은 모두 소집해라.]
[어디로 모이라고 할까요?]
[대룡상단의 정문 앞에 있는 주루로 모인다.]
[알겠습니다.]
‘잘못하면 일이 어긋나겠는데…….’
종산은자는 어쩌면 일이 만만치 않게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소군이 천호무적검이라니, 정말 뜻밖이구나?”
종산은자가 떠난 후 대화는 다시 훈훈해졌다. 특히 악불군이 천호무적검이라는 사실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소군, 아니었으면 저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요.”
“천호방주님이 아니었더라도 아가씨께서 변을 당하실 일은 없었을 겁니다.”
“왜요?”
양호철의 말에 담수련은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제가 강호 생활을 하면서 여러 여인들을 만났지만, 솔직히 아가씨만큼 아름다운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무림인들은 아름다운 여인은 절대 죽이지는 않습니다.”
양호철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이 많은 그 역시 면사를 벗은 담수련의 얼굴을 보고 순간 멍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잘생긴 남자 역시 여자 무림인들에게는 죽지 않겠네요?”
담수련의 말 속에 은근한 가시를 느낀 양호철은 겸연쩍음 표정으로 입을 닫고 말았다.
“소군은 그럼 지금 무공을 잠룡세가에서 배운 것이냐?”
담수운의 질문에 악불군이 대답하려 하자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소군이 잠룡세가를 나올 때까지는 그렇게 무공이 높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온 이후 큰 기연을 만났지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슬쩍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때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연? 도대체 어떤 기연이기에 그렇게 무공이 빨리 높아졌단 말이냐?”
“오라버니, 소군이 어떤 기연을 만났는지는 저도 묻지 않았어요. 잠룡세가에서 배운 무공에 대해 묻는 것은 모르겠지만, 강호에 나와서 얻은 기연은 묻지 않는 게 도리라 생각해요.”
무림인에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에 대해 묻는 것은 절대 금기였다. 도박에서 상대에게 패를 보여 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실언을 했구나. 그런데 수련아. 네 계획의 정점에는 소군이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소군 혼자 천하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요. 종산은자란 분이 말한 대로 따른다면 무장 해제를 하고 목을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전 그것이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종산은자는 누구입니까?”
양호철은 의아한 눈으로 담수운과 담수운을 보며 물었다.
“오라버니께서 예전에 강호행을 하며 친분을 가지신 분이에요.”
“그리 중요한 자가 아니라서 총행수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담수운은 양호철의 눈에 의아함이 나타나자 부언해 주었다.
“그랬군요.”
“수련아, 그럼 다음 계획을 총행수께도 설명해 드려라.”
담수운을 설득시킨 담수련의 계획.
그건 사실 담수운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제가 이렇게 전면으로 나서는 계획을 세운 건,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에요.”
양종철은 그녀의 말에 솔깃한 표정이 되었다.
“경청하겠습니다.”
“오라버니나 저나 강서를 시작점으로 삼은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강서성 백성들의 인심을 최대한 빨리 얻는 거예요.”
“요즘 같은 시기에 백성들의 인심을 얻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니까 더 쉽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평화로운 시기엔, 백성들의 인심을 얻으면 역모를 의심한 황실의 견제를 받게 된다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스리는 관이 없어 치안은 붕괴되고 상권도 망가져 백성들은 모두 어려운 삶을 살고 있어요. 이럴 때 그들을 조금만 보호해 주고 생활에 약간만 도움을 준다면 금방 인심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아가씨,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들어갑니다. 지금 본 상단은 그런 자금이 없습니다.”
“자금은 걱정 마세요. 제게 마련할 방도가 있으니까요.”
“그 많은 돈을 마련할 방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양호철의 말에 담수련은 미소를 지며 악불군에게 물었다.
“소군, 지금 전표 얼마나 있어?”
“지금 갖고 있는 건 금자 오만 냥 정도 됩니다.”
“그거 총행수님께 드려.”
“예.”
금자 오만 냥은 엄청나게 큰 액수였다. 그런 돈을 그냥 주라고 하니 양종철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아가씨, 잠봉밀도 자금이 필요할 텐데요?”
“잠봉밀이라는 이름은 잊으세요. 이젠 천신문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큰돈을 저희에게 주면 천신문도 자금 압박을 받지 않겠습니까?”
“백교방이 얼마나 양민들의 고혈을 빨았는지, 비밀 금고에 금자 십만 냥이 들어 있더군요. 백교방에게 재산을 강탈당하거나 큰 위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도 칠만 냥 정도 남았습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담수련의 말에 양종철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교방은 마도문입니다. 구천마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 해도, 분명 백교방의 재산에 대해서는 따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할 상대는 정파이지, 마도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들과 척을 지는 행동을 보인다면 정파인들은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양종철은 슬쩍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가 한 행동들은 힘이 없다면 절대로 실행할 수 없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그 자신감의 원천이 악불군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 혼자서 모두를 막아 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수련이가 그 돈을 그냥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창고에 있는 물건들 절반은 천신문으로 보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걱정은 걱정이고, 그동안 자금 부족으로 상당히 고심하던 양종철은 금자 오만 냥의 전표를 받자 얼굴에 희색이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남창에 대룡상단의 지단으로 사용할 장원 하나를 준비해 놓을게요. 물품의 운송은 천호방에서 담당할 것이니 그들에게 운반비는 주어야 합니다. 물론 실비 정도면 됩니다.”
“그건 어차피 나갈 돈인데 당연히 드려야지요.”
“오라버니, 대룡상단의 자체적인 무력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중견 무림 문파를 세울 정도의 전력은 된다.”
“그럼 자체적인 방어는 가능하시겠네요?”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숨겨서 그렇지, 여간한 세력은 너끈히 막을 수 있다.”
“그럼 됐어요. 솔직히 대룡상단까지 보호하기에는 천호방의 인원수가 많이 부족하거든요. 이틀 후 종산은자와 담판을 하고 나면 힘을 드러내셔도 될 거예요. 요즘 큰 상단들은 모두 자체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하니, 이상하게 보일 이유도 없고요.”
“종산은자는 만만한 분이 아니다.”
“얼마나 대단하지는 모르지만,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저희들의 계획은 수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 * *
[어르신, 단원들을 모두 집결시켰습니다.]
대룡상단이 보이는 주루로 자리를 옮긴 종산은자는, 전음을 받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룡상단을 포위하고 드나드는 자들은 모두 신원을 파악해서 내게 보고해라. 특히 여인들의 호위를 받는 마차가 나오면 즉시 알려라.]
[알겠습니다.]
지금 종산은자를 보필하는 영웅밀단의 단원들은 감시와 정보 수집을 하는 자들이지만, 한 명 한 명의 무공은 초일류급으로 유사시에는 무력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산은자는 일단 약속 날짜까지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는 담수운과 대화를 나눈 여인이 천호방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대룡상단만 감시하면 도창의 흑도파들을 제거한 다른 자들 역시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판단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담수운을 이용해 잠룡세가를 쉽게 접수하는 방법이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것을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귀도신영이 이미 절강에서 흑야신을 만나 잠룡세가의 잔당들을 규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공자님, 굉장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악양의 영웅회 지부에 머물고 있던 백천학은, 태극검자가 급히 달려와 보고하자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께서 이렇게 급한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얼마나 대단한 정보기에 그러십니까?”
“혹시 금령군주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금령군주라면…… 마녀(魔女) 중의 마녀로 불린다는 여인을 말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백천학은 씨익! 미소를 지며 반문했다.
“그녀가 호남에 들어오기라도 했답니까?”
“저도 방금 들은 정보인데, 어떻게 그것을 벌써 아셨습니까?”
태극검자가 놀란 눈으로 묻자 이번에는 백천학이 놀란 듯 다시 반문했다.
“정말 그녀가 호남에 들어왔단 말입니까?”
그가 한 말은 그녀가 호남에 올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냥 한 말이었다.
“확실한 정보 같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녀는 신분도 귀하지만 지위도 대단히 높다고 들었는데, 이미 원나라의 영향력이 사라진 호남에 왜 들어온다는 것입니까?”
“아직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백천학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 정도의 동선이라면 극비일 텐데, 어디서 얻은 정보입니까?”
“원나라가 패퇴 조짐이 보이자 곳곳에서 정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정보도 상당한 고위직이나 협력 조직에서 보내온 것으로 압니다.”
“배신자가 있다는 말이군요?”
“예.”
“그녀 정도의 위치에 있는 여인이 직접 위험한 이쪽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빈도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어찌할까요?”
“본 모습으로 들어올 리는 없으니 분명 변장을 하고 올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접할 수 없는 고급 정보의 보고(寶庫)가 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사로잡도록 하십시오.”
“소문이 맞다면 생포는커녕 죽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여인입니다.”
“마녀 중의 마녀로 불릴 정도의 여자이니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태양천의 숨은 세력과 은밀하게 부역한 자들을 찾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반드시 생포해야 합니다.”
“그럼 영웅무단을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영웅무단은 태양천과의 마지막 결전을 위해 영웅회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최고의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을 지금 투입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기에 백천학도 잠시 머뭇했다. 하지만 곧 그는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
“제가 할아버님께 영웅무단의 출동은 명해 달라는 서찰을 쓰겠습니다.”
백천학의 임무는 더 이상 반군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임무는 태양천과 어찰단이 남긴 잔당의 색출과 부역자들의 제거였다.
부역자로서 그 굴레를 벗어나려는 담수련과 악불군, 그리고 부역자를 제거하려는 백천학과의 악연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