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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12화 (212/472)

<천검지애 212화>

212화. 선포(1)

‘마차가 떠났다는 보고는 못 받았는데, 생각 외로 경계가 허술하군.’

약속 날짜가 되자 종산은자는 대룡상단 담수운의 집무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던 담수운은 뭔가 낌새를 눈치챈 듯 구석의 어두운 곳을 쳐다보았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담수운의 시선이 향하자, 온몸을 검은 옷으로 휘감고 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두른 종산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렁이는 촛불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작은 그림자에 제법 덩치가 큰 종산은자가 숨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조금 변수가 생겼습니다.”

“천호방 말입니까?”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까?”

“요즘 도창에서 난리더군요. 며칠 전에는 공자님도 그들을 만난 것 같던데, 아닙니까?”

“처음에는 물품을 사러 온 상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무슨 대화가 오갔습니까?”

종산은자는 짐짓 모른 척 물었다. 그가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여러 말이 있었지만 결론은 거의 협박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길…….”

담수운은 종산은자가 들은 말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 듣도 보도 못한 하찮은 신생 방파의 협박이 무서워 결정을 못 했다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때였다.

“듣도 보도 못한 하찮은 신생 문파라……. 몸에서 풍기는 기가 청명해서 정파인 줄 알았는데, 말씀하시는 것은 완전 사파 수준이군요!”

종산은자는 깜작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담수운 역시 전혀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그들의 앞에 검을 안고 있는 악불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과 문, 모두 닫혀 있는 상태에서 스르르 나타난 악불군의 모습에, 종산은자는 그가 방 안에 숨어 있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방 안이라고 해 봐야 사방 이삼 장에 불과한 작은 집무실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전혀 눈치를 못 챘다니?’

종산은자는 급히 은신술을 사용해 사라지려고 했지만, 자신을 찔러 오는 강력한 예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등에 검이 박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총수님께서 저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다니, 대룡상단의 많은 식솔들의 목숨까지 도외시할 생각이신 모양입니다.”

“바, 방주 그게 아니라, 이분은 예전부터 본 상단에 도움을 주시던 분이오.”

담수운이 생각 외로 연기를 잘하자 씩! 미소를 그린 악불군은 종산은자를 보며 물었다.

“은신술도 능하고 사파나 마도로 보기에는 풍기는 기가 다르고……. 설마 정파로 가장한 마도인 것은 아닙니까?”

악불군의 말에 종산은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태어나서 자신이 마도로 몰린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영웅회라고 밝혀지는 것도 문제가 있어서였다.

“네가 천호방의 방주냐?”

종산은자는 의연하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상황 파악을 한 것이다.

“남의 상단에 살수복을 입고 은밀히 들어온 것으로 보아 높은 지위는 아닌 것 같은데, 타 방의 방주에게 하는 말투치고는 무척 무례하군요.”

“그다지 높은 지위는 아니지만, 하찮은 지역 사파의 방주에게 존댓말을 할 정도의 지위는 아니다.”

“배짱은 솔직히 마음에 듭니다.”

악불군이 계속 존댓말을 붙이며 예의를 지키자, 종산은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사파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에 나타난 이유가 뭐냐?”

“설명할 이유는 없지만, 제가 싸우는 것을 그리 즐겨 하지 않으니 말은 해 드리지요. 제가 문파 하나를 새로 세웠습니다. 여러 곳을 조사하다 보니 이쪽에는 주인이 없더군요. 그래서 이곳을 제 방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도창과 대룡상단은 이제부터 천호방에서 관리할 생각입니다. 대룡상단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곳에 관여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정파끼리 싸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같은 혼란한 시기에 다른 일도 바쁠 텐데,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후회할 일은 지금 천호방이 만들고 있다. 너야말로 상황 판단을 잘해라. 내게 명을 내리신 분은 천호방 따위는 하루 안에 멸문시킬 수 있는 분이다. 만약 네가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가서 자리를 잡는다면, 이번 일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것은 물론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다른 곳이라……? 그럼 아무 지역이나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는 말입니까?”

“강서성 오독현 이남 지역이라면 어디든 된다.”

악불군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명색이 정파라는 자가 이따위 비열한 잔수를 쓰다니, 실망이군…….’

강서성의 오독현 이남이면 지금 화룡세가가 세운 정천보와 구천마성이 반분한 채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 신생 문파 보고 들어가라는 말은, 가서 죽으라는 말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지요? 이곳에 자리 잡는 데 이미 사용한 돈이 너무 많습니다. 거기다 남창의 천신문을 도와서 백교방까지 모조리 없앴기 때문에, 구천마성의 세력권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독현 이남에도 아직 구천마성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은 꽤 많다.”

“그럼 천호방을 하루 만에 없애 버릴 수 있는 그 대단하신 분이 거기로 가면 되겠군요?”

종산은자의 눈에 분노가 나타났다.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는 것인가?”

“관을 안 보면 눈물을 흘릴 이유도 없겠지요.”

‘결국 한 수를 보여줘야 자신에 대해 자각을 하겠군……’

종산은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악불군을 우선 제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섬(閃)과 쾌(快)에다 광(光)과 신(迅)을 합치면 얼마나 빨라지려나?’

그러나 악불군의 검이 더 빨랐다.

그는 종산은자가 대화를 하는 중에도 단 한 수에 제압할 수법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익!”

분명 검집에 검을 넣은 채 품에 안고 있었다.

거리는 겨우 다섯 걸음 정도.

보법과 신법에 특히 자신있는 그는 자신이 기습을 하면 악불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는 동안 악불군의 검이 어느새 그의 목울대 앞에 있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눈을 부릅뜨고는 노려보는 종산은자를 보며 악불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선히 검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대화 중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기습을 하는 짓은 사파에서나 하는 행동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은 생각도 하지 않고 분하다는 듯 소리쳤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생사결에서 왜 경고를 해야 하는지 이해는 안 됩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경고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공격합니다.”

공격하겠다는 악불군의 말에 종산은자는 급히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악불군의 검이 다시 그의 목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더욱 경악할 일은, 자랑하던 자신의 보법보다 더 빨리 검이 다가왔는데 피도 안 날 정도로 피부까지만 검이 닿아 있다는 점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공격을 하는 것이 기습과 뭐가 다르다는 것이냐?”

종산은자는 격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까지 했는데 기습이라고 하시니 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악불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검을 거둬 검집에 넣고는 또다시 뒤로 물러서자, 종산은자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놈!”

종산은자는 똑같이 되갚음을 하겠다는 듯, 물러나는 악불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공격을 했다.

물러났다고는 하나 겨우 서너 발자국 거리에서의 기습이었고, 실지로 순간적인 그의 속도는 귀도신영을 능가했다.

“이, 이, 이럴 수가…….”

분명 검집에 넣었던 검이 어느새 빠져나와 달려드는 그의 목울대에 닿아 있었다. 만약 악불군이 그가 다가서는 속도에 맞춰 뒤로 같이 물러서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 악불군의 검에 자신의 목을 찔러 간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종산은자를 보며 악불군이 말했다.

“이번에는 너무 성급하게 공격을 한 것 같군요? 아직도 미련이 남으신다면 다시 기회를 드리지요.”

악불군은 다시 검을 검집에 넣고는 뒤로 한 발자국 더 물러났다.

“이러는 이유가 뭐냐? 제갈공명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수법을 이용해 내가 스스로 승복하기를 바란다면 꿈 깨라!”

일곱 번을 잡았으나 일곱 번 모두 다시 풀어 줘 결국 남만의 맹획에게 스스로 더 이상의 배신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칠종칠금.

종산은자가 스스로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승복도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당신에게 승복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면 현명함이라도 있어야겠지요. 강서성은 천호방에 맡기십시오. 그럼 구천마성은 제가 막아 드리지요.”

종산은자는 악불군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며 반문했다.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어느 문파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본 방이 세력권으로 공표한 곳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대룡상단은 이 근처에 하나뿐인 상단입니다. 본 방에는 아주 중요한 곳이지요. 대룡상단을 더 이상 찾아오지 마십시오. 또 찾아온다면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 겁니다.”

종산은자도 이미 전의를 잃은 터였다.

첫 번은 당황해서 그랬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는 실수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 번째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여기서 더 공격을 한다면 그건 상대에게 추한 꼴만 보이는 셈이었다.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느냐?”

“무림인들은 저를 천호무적검이라고 부릅니다.”

순간 종산은자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천호방, 천호무적검……. 내 어찌 그 생각을 못했다는 말인가…….’

소문이 맞다면 천호무적검은 혼자 구천마성의 호법 셋을 상대했다. 자신이 그들 중 한 명도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천호무적검에게 세 번이나 창피를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종산은자는 포권을 하더니 완전히 달라진 말투로 말했다.

“노부가 귀인을 몰라보고 큰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깃발만 꽂고 여기는 내 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도나 하는 짓이 아니겠소? 정파인으로 소문난 악 대협에게는 이번 일로 명성에 큰 금이 갈 수도 있소이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군요? 이곳에 정파가 있었던가요? 제가 알기로 도창을 비롯한 포양호변은 원래부터 무주공산이었습니다. 원래 무주공산이란 누구든 깃발을 먼저 꽂는 사람이 임자가 아닌가요?”

“영웅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심혈을 기울여 왔었소!”

“지금 영웅회라고 하셨습니까?”

종산은자는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잘못 말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하는 것은 모양새가 더 이상해질 것 같자, 그는 순순히 밝히기로 했다.

“맞소이다. 노부는 영웅회 소속이오.”

“그렇다면 더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오?”

“영웅회는 구파일방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조직이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는 이미 자신들만의 세력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강서까지 욕심을 낸다면, 북상을 하며 세력을 넓히려는 구천마성의 행태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구천마성은 사욕이지만 영웅회는 원대한 계획이 있소이다.”

“사욕과 원대한 계획이라고 하니, 확실히 다르군요. 사욕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원대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영웅회에서는 이번 기회에 정파의 힘을 넓혀, 더 이상 마도나 사파가 창궐하여 양민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소.”

“제 계획과 아주 흡사하군요. 천호방 역시 정파를 표방하고 있고, 목표도 구천마성의 북진을 막아 양민들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영웅회에서 들어올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영웅회의 정파는 모두 검증이 되었소. 또한 천마성을 압도할 전력도 갖추고 있소이다. 하지만 천호방은 아직 검증이 안 되어 있고, 만약 구천마성을 막지 못해 강서까지 그들에게 넘어간다면 영웅회로서는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수도 있소이다.”

“검증의 주체를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구천마성을 막아내느냐 못 막아내느냐 결과를 봐야지, 무조건 영웅회는 막을 수 있고 천호방은 못 막는다는 결론은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웅회의 뜻을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정파로 위장한 마도나 사파로 의심을 받을 수 있소이다.”

“전 영웅회 소속이 아닙니다. 당연히 영웅회의 뜻을 따를 의무는 없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도창을 비롯한 포양호 주변은 이제 천호방의 세력권이며, 구천마성은 물론 영웅회라도 우리의 세력을 탐낸다면 저와 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정파를 표방하는 저를 적으로 삼아 분란을 만든다면, 영웅회의 다음 행보에 큰 누가 될 것입니다.”

악불군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동시에 그의 몸에 숨겨져 있던 절대자의 거대한 기도가 종산은자를 덮쳤다.

‘으으으…… 이, 이게 뭐야? 어찌 이자한테 회주님에게서나 느꼈던 위엄이 나타난단 말인가……?’

부르르-

갑자기 달라진 악불군의 모습에, 종산은자는 숨기지도 못한 채 온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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