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13화>
213화. 선포(2)
“종산은자가 이대로 물러나겠느냐?”
종산은자가 떠나고 담수련이 방 안에 들어서자, 담수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모르지요. 소군이나 천신문을 세운 제가 진짜 정파냐 아니냐로 우선 갑론을박이 벌어지겠지요. 제 생각에는 그로 인해 최소한 두 달 정도는 건드리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두 달이라? 그럼 다음에는 어찌할 것이냐?”
“그 시간 안에 양민들의 신뢰를 얻어야지요. 우리 세력권에서는 마도와 사파는 물론 흑도 왈패들조차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보호비는 지금까지 내던 것의 삼분지 일 정도만 받을 거예요. 지금 혼란한 시기에 양민들은 매일이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 불안만 막아도 그들은 우리를 지지할 겁니다.”
“그 정도로 영웅회에서 포기하겠느냐?”
“양민들에게 환영을 받는 무림 문파를 정파에서 없애려 하는 것은 명분에서 밀리겠지요. 더욱이 소군이 구천마성을 막아 주겠다는, 그들에게는 아주 달콤한 조건까지 제시했어요. 두 달 후에도 우리를 압박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내가 잠룡세가의 소가주인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나를 계속 안고 간다면 너희도 의심을 받을 수 있어.”
“그래서 이렇게 파격적으로 천호방과 천신문을 등장시킨 거예요.”
위급 사항에서 피하는 것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마도의 종주를 자처하는 구천마성까지 원나라에 위협을 느끼자 지하로 숨었지 않은가.
그런데 걸리면 죽는 잠룡세가 출신이 오히려 자신들의 모습을 보란 듯이 나타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리라는 게 담수련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담수운은 고개를 저었다.
“영웅회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그들이 소군에 대해 정밀 조사에 들어가면 정체가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게다.”
“다행히 소군은 외부에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어요. 혹, 본 사람이 있다 해도 그의 무공이 긴가민가하게 만들 거예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어요. 소군은 잠룡세가와 인연을 끊었어요.”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잠룡세가와 인연을 끊었다니?”
“소군은 천호방의 방주인 천호무적검일 뿐, 잠룡세가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말이에요.”
“솔직히 네 말을 이해하기 어렵구나. 아무리 말로 항변해 봐야, 소군이 잠룡세가에서 크고 무공을 배운 것은 달라지지 않지 않느냐?”
“달라질 거예요. 그럼 오라버니, 저흰 이만 남창으로 갈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천호영주들과 의논하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알았다. 너도 조심하거라.”
담수련의 계획대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계획이란 언제든지 틀어질 수가 있었다. 둘 다 말은 안 하지만 둘 모두, 자신들의 행보가 지금 살얼음판 위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 * *
천호방과 천신문의 등장은 순식간에 강서성에 화제가 되었다. 그들이 나타난 후 포양호변의 사파와 마도뿐만 아니라 양민을 괴롭히던 흑도 왈패까지 모조리 소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아주 혹독한 형벌을 주었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유화적인 정책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벌을 주어도 부작용이 없지만, 혼란의 시기에는 약간은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 치안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담수련의 생각 때문이었다.
역시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강서 북부는 빠르게 치안이 회복되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보호비 역시 대폭 깎아 주었음에도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살기 좋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오히려 돈이 더 벌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양민들 사이에서는 천호방과 천신문에 대해 환호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천호방의 방주가 명성이 자자한 천호무적검이라는 사실이 천호방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변화가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소군, 천호방의 전력이 굉장히 불어났다며?”
천신문주의 집무실에 앉아 차를 마시던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만족한 듯 물었다.
“광한궁의 제자들과 영운산장의 무인들이 합류했고, 고노가 선별한 낭인들이 대거 입방하면서 부족하던 인원은 많이 채워졌습니다. 벌써 방도가 천 명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자금입니다. 방도가 늘면서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습니다.”
“귀화단에서 아직 연락 없어?”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갔으면 빨리 갚는 성의는 보여야 하는데, 영 신용이 없네.”
“귀화전랑이 어디 있는지는 적설이 파악해 두었습니다. 언제든지 수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화단이 장물 처리에는 최고 실력자라니까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귀노의 보물들을 제값 받고 팔려면 그런 자들이 좀 필요하니까. 그리고 색혼수사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어?”
“복건성에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
“천호십영에게 그자는 잡아내라고 해. 만약 다루가치가 숨겼다는 금괴의 행방을 못 찾았다고 하면 죽이라고 해. 그자에게 겁탈당한 여인들이 수십 명이야. 솔직히 예전에 제거했어야 할 자야.”
“만약 금괴를 찾았다면 어떻게 할까요?”
“찾아냈다면 금괴만 빼오고 살려 줘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또다시 여인을 건드리면 죽일 거라는 경고는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악불군을 가만히 보던 담수련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군.”
“말씀하십시오.”
“솔직히 난 소군이 옆에 있으면 언제나 기분 좋아.”
“저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제 방주잖아? 그것도 방도가 천 명 가까우니 대문파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악불군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가 무엇인지를 알아챈 듯 말했다.
“제겐 천호방이나 명성 등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아가씨가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없어서 무너질 방이라면 제가 있다 해도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가씨만은 제가 있는 이상, 세상에서 가장 안전할 것입니다.”
담수련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다.
그녀는 악불군에게 자신을 걱정 말고 방의 일에 좀 더 신경을 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막상 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겨우 이삼 각 정도여도 악불군이 보이지 않으면 그녀는 불안했다. 누가 자신을 해칠까 하는 불안감이 아니었다. 그냥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미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 있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남자.
악불군은 그녀에게 그런 남자였다.
‘말로만 소군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사실은 내 행복만 바라고 있어. 난 너무 이기적인 여자야. 미안해.’
담수련은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이 이기심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들자 작게 한숨을 쉬웠다.
* * *
거대한 정청.
사십여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회주로서 언제나 상단에 앉아 있던 천제무황도 오늘은 한 문파의 수장으로서 원탁에 앉아 있었다. 모두 같은 위치에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발언을 시작한 자는 영웅회의 군사이자 제갈세가의 대표로 참석한 제갈우명이었다.
“앞에 놓여 있는 서류는 각 문파의 어르신들과 함께 만든 무림맹의 규율에 관한 초안입니다. 이건 극비 사안입니다만, 아셔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갈우명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동안 산발적인 국지전만 벌이며 소강 상태를 유지하던 주원장과 장사성의 군대가, 내일 새벽 주원장 대장군의 총공격 명령과 함께 전면전이 벌어질 것입니다.”
“드디어 결판의 날이 왔구려. 제갈 대협.”
서문세가의 서문창이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모두가 흥분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일 갑자 넘는 동안 그들은 실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 온 터였다.
“예.”
“둘의 승패에 대한 분석은 끝났소?”
“장사성의 군사들이 계속 탈영한다는 보고입니다. 이미 사기가 저하할 대로 저하되었다는 말이지요. 주원장이 이길 것입니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뭡니까?”
“우선 보고가 끝난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갈우명은 옆에 있는 중원 전도를 목봉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여기 지도를 보시면 아직 하북과 산서 그리고 섬서 북부는 원나라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만만치 않은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사료되지만, 다행히 황실의 권력 다툼이 멈추지 않아 저희가 가장 우려하는 어사대와 태양천이 반목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총순찰의 보고에 의하면 태양천이 여전히 중원 곳곳에 교두보를 만들어 놓고 언제라도 명령이 내려오면 무림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던데, 그것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되어 있소?”
“당연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다시 지도를 봐 주십시오.”
제갈우명은 감숙 지역을 가리켰다.
“혈해사계와 마룡세가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혈해사계가 우세했는데, 마룡세가에서 비밀무력 집단이 나타나면서 지금은 소모전으로 변했습니다. 생각 외로 혈해사계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보고입니다.”
“어떤 비밀 무력 집단이 있기에 마룡세가 혼자 혈해사계를 상대하고 있는지는 알아냈소?”
오룡세가가 오랫동안 중원을 지배했지만 하나하나의 세가만으로는 혈해사계나 구천마성을 당해 낼 수 없다고 알고 있던 모두는 놀란 표정이었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 그런데 마룡세가에서 마물을 만든 것 같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마물이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아직 확인이 안 됐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제갈우명은 이번에는 사천지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천지역은 태룡세가가 있기는 하지만 오룡세가 중 가장 약체로 분류가 되어 있었고, 당문과 청성 그리고 아미의 연합 세력이 공략할 예정이어서 사실 쉽게 수복할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새외 연합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새외 연합이 태룡세가를 돕고 있단 말입니까?”
당문의 당무기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사천 지역은 그들의 뿌리였다. 반드시 찾아야 할 그들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예전의 성세를 찾기 위해서는 피해 역시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외 연합이라는 강력한 집단이 태룡세가를 돕는다면 생각 외로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지도 몰랐다.
“태룡세가에서 새외 연합에게 사천의 서쪽 절반을 넘기겠다고 약속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사천으로 넘어왔다는 징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그들을 설득할 생각입니다.”
설득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잘 아는 모두의 표정은 굳어졌다. 감숙은 몰라도 사천만은 반드시 정파에서 탈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천의 반을 달라는 자들을 설득할 수 있겠소?”
“새외 연합은 미련한 자들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원나라가 물러나면 태룡세가가 오래 버티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말을 마친 제갈우명은 이번에는 장강 남부를 가리켰다.
“다른 지역도 급하지만, 현재 가장 급한 곳은 여기입니다.”
“구천마성 때문이오?”
양가장의 양표가 물었다.
“현존하는 위협은 구천마성이 맞습니다. 하지만 본 회에서 수십 년간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비밀 조직이 또 있습니다. 전력은 구천마성과 맞먹거나 더 강할지도 모르고, 그 은밀함은 어찰단조차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정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조직이 있었다니, 어찌 우리가 아직까지 몰랐던 것이오?”
“오래전부터 그들을 주시했지만 알아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천호무적검 덕에 약간의 단서를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천호무적검이라는 말에 잠시 웅성거림이 있었다. 그들 역시 지금 소문이 자자한 천호무적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비밀 조직은 정체가 무엇이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무공을 분석한 결과, 마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간 모두의 표정이 확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