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17화>
217화. 변화(2)
“몇 명이나 죽었다고요?”
“스물일곱 명입니다.”
태극검자의 보고에 백천학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금잔화를 쫓은 무인들은 영웅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영웅무단의 무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무공이 그렇게 높았습니까?”
“단순히 무공에 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악한 사술을 구사한다는 소문이 진짜인 모양입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편끼리 싸운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우리 편끼리 싸워요?”
“예, 거기다 마지막 남은 자는 자결한 것 같다고 합니다.”
“할아버님께서 그녀와 맞서고 죽은 자들의 모습이 금지된 마공인 섭혼금령제혼술 같다고 하셨는데, 정말인 모양이군요.”
“섭혼금령제혼술은 실전된 마교의 무공이 아닙니까?”
“태양천주와 싸울 때 마교의 마공으로 보이는 무공을 사용했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교의 무공을 사용한다면 강력한 마기를 우리가 느꼈을 텐데요?”
“태양천에서 마교의 무공을 취득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교의 심공은 얻지 못한 듯 많이 변형시켰고 마기도 흘리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녀가 태양천주의 손녀라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이번 작전은 제 실수입니다. 너무 상대를 경시했어요. 제가 직접 움직여야겠습니다.”
“그게…….”
“또 다른 것이 있습니까?”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요? 어디로 말입니까?”
“오십 명 정도가 산을 올랐고, 백여 명은 산 밑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린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를 않아서 올라가 보니, 시신만 남고 그녀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던 백천학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위험을 알면서도 장강을 건넜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빈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가 화석산입니다. 어디에 어떻게 포진하고 있었는지는 아십니까?”
“저도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짐작으로는 이곳에 포진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화석산의 지리를 좀 아는데, 크기에 비해 상당히 험준한 산입니다. 장강에서 올라오는 길은 여기밖에 없고, 내려갈 수 있는 길도 두 곳밖에 없습니다.”
“이 넓은 산에 두 곳밖에 길이 없는 이유는, 왜입니까?”
“이곳과 이곳을 제외하면 거의 다 낭떠러지입니다.”
태극검자는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상세히 설명했다.
“방향은 짐작이 가지만 한 지역을 특정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군요. 어르신.”
“예.”
“개방에 도움을 청하십시오. 화석산 방향에서 호남으로 내려가는 자들 중 수상해 보이는 자는 남녀불문하고 전부 조사해 달라고 하십시오. 특히 그녀가 가마를 애용한다고 하니, 가마를 탄 자들은 무조건 다 검문 바란다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태극검자가 급히 나가자 백천학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우~ 무능한 장수는 수하들의 목숨을 허무하게 잃는다고 했는데, 내가 그 꼴이구나. 천려일실의 자만심으로 귀중한 인재들을 죽였으니 이 죄를 어찌할꼬.”
그러나 그는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배운 셈이었다.
어떤 상대건 예상보다 더 강하다는 전제로 계획을 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 * *
잔양문은 절강 남쪽에 있는 사파였다. 행사가 잔인하고 야비하여, 더 강한 전력을 지닌 세력들도 그들과 엮이는 것을 피할 정도였다.
잠룡세가가 완벽하게 장악한 절강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잠룡세가와 부딪치는 것을 피하면서 때가 되면 알아서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원나라가 물러나고 치안이 무너지며 잠룡세가의 영향력까지 떨어지자, 그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더욱 양민들의 고혈을 빨았다. 오히려 이 혼란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황제에 오르고 이제 보름도 지나지 않았건만 모든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 탓에 잔양문주인 경룡마수는 대낮임에도 간부들을 모아 놓고 회의 중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잠시 허리를 숙이고 비가 지나길 기다리자, 이거냐?”
경룡마수의 반문에 내당당주 조탁은 조심스럽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정파 무림의 연합체인 영웅회에서 원나라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전 무림에 퍼져 있습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잠룡세가조차 외부 활동을 멈추고 거의 봉문 수준으로 꼼짝을 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잠룡세가는 앞장서서 정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당연히 무림인들이 미워하는 거잖아! 우리가 부역을 했냐, 아니면 정파를 탄압했냐? 조그만 구역 안에서 고작 보호비 조금 받아먹을 거 가지고 설마 우리까지 공격하겠냐?”
경룡마수는 억울한 표정으로 주장하듯 말했지만 그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잠시 숨자는 것입니다. 오룡세가야 누구나 다 알지만, 우리 잔양문 같은 경우에는 부역자가 될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숨어서 부역자의 기준을 어느 정도까지로 정하는지를 보고 다시 활동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원나라는 중소 사파들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경우가 많았다. 반원 무림인을 추격할 때 중요한 정보원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은 오룡세가와 달리 그들은 그저 돈만을 쫓는 사파의 행동을 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부역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문제는 그들 때문에 많은 반원 무림인들이 변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고통을 받았는지는 염두에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사신이 그들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 * *
[흑 영주.]
[예, 주군.]
[준비 상황은 어떻게 됐습니까?]
[칠영주 나여송이 칠영 소속 무인 삼십 명을 데리고 먼저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는 시작하지 말라고 했지요?]
[예. 우선 포위한 채 감시만 하기로 했습니다.]
[마부 노릇은 할 만합니까?]
[생각보다는 재미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예!]
악불군이 전음을 하는 동안 담수련은 창을 살짝 열고는 창밖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다른 때와는 달리 처연해 보이자 악불군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어디 불편하신 데라고 계십니까?”
“아니, 괜찮아. 왜 내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절강에 들어선 후 갑자기 말도 안 하시고 표정도 좀 우울해 보여서요.”
“우리가 잠룡세가를 나올 때는 추적자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듯 나왔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돌아가니까 기분이 좀 그래. 사실 우리가 세가를 떠난 지 일 년 정도밖에 안 됐잖아?”
“아가씨, 생일이 저번 달에 지났으니 일 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런데 느낌은 한 십 년은 지난 것 같아. 이번 일 년 동안 내게 벌어진 사건들이 세가에서 십육 년 동안 겪은 사건들보다 더 많았잖아. 무엇보다 절강에 들어서니까 갑자기 아버지 걱정도 몰려오네.”
그녀는 담무룡의 생사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했다.
죽었다고 생각을 하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이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던 중, 절강에 들어서자 담무룡과 잠룡세가의 추억들이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 외유에서 자신과 추억을 가졌던 여러 사람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그녀의 마음을 무척 심란하게 하고 있었다.
“가주님께서는 분명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진짜?”
“예.”
“어떻게 알아?”
“그냥 그런 느낌이 듭니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담수련은 악불군의 느낌까지 믿었다.
“소군이 그렇게 느낀다니까 좀 안심이 되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악불군의 눈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그냥 잘생겨서 봤어.”
뜻밖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추국까지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담수련이 악불군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아니 그녀만이 아니라 사화 모두가 여자의 직감으로 그런 생각을 해 왔다.
하지만 그게 남녀의 사랑인지 그냥 어려서부터 보아 온 믿을 만한 사람에 대한 친근감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담수련의 이 한마디에, 추국은 담수련이 악불군을 남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와아~ 얌전하던 아가씨께서 저런 말도 하시고……. 속담이 틀린 게 없네. 그런데 왜 내가 얼굴이 빨개지냐?’
담수련을 보았던 추국은 급히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추국은 더욱 놀라고 말았다. 여자보기를 돌 같이 하던 악불군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두 분이 여행을 하면서 뭔가 있었어! 분명해…….’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혼자만의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없으면 소군은 정말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면서 훨훨 날아다닐 텐데?”
“아가씨께서 없으셨다면 날기 전에 이미 죽어 땅속에 묻혀 있을 겁니다.”
죽이 척척 맞는 둘의 대화가 얼마나 달달한 것인지 그들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추국이 있는 곳에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주군, 잔양문이 있는 소곡현에 가까워졌습니다. 시작하라고 할까요?]
그때 말을 몰던 흑석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여기서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지금 속도면 반 시진 안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럼 시작하라고 하십시오. 우리가 잔양문을 본보기로 택한 것은 그들의 행사가 가장 잔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는 그들 이상으로 잔혹해야 합니다.]
담수련은 백교방에서 사용한 수법을 잔양문에서도 사용하라고 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데 탁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때처럼 깨끗한 살인이 아닌, 좀 더 잔혹한 살인을 명했다.
[저희가 가장 깨끗한 살인만 수련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럼 계획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예.]
흑석영의 답이 끝나자 주위를 숨어서 따르던 인영 하나가 소곡현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흑 영주가 전음을 보냈어?”
악불군을 향한 담수련의 눈치는 이제 신경(神境)에 들어, 듣지도 못하면서 즉각 알아챘다.
“예, 잔양문 총단이 있는 소곡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석장로님께서 보낸 정보에 의하면 잔양문은 절대 만만한 문파가 아니야. 특히 문주인 경룡마수란 자는 백대고수에도 이름을 올렸다고 했어.”
“나 영주와 최 영주도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으니, 알아서 조심할 것입니다.”
담수련은 미소를 지며 살포시 악불군의 손을 잡았다.
“소군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살까 싶어. 아마 벌써 죽었든가, 아니면 두려움에 떨며 도망다니고 있었을 거야.”
이제 활짝 만개한 그녀의 머리는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물론 다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는 모든 것이 그녀가 예상하는 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 얘기 역시 그녀가 소군이 없을 경우를 상정해서 분석해서 나온 결과였다.
“아가씨께서 없으시면 저 역시 없습니다. 그런 가정은 머리에서 아예 지워 버리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그녀는 미소로 답했지만 속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나도 살고 싶어……. 아니야,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이러다 나 죽으면…….’
이러다 정말 자신이 죽으면 악불군이 얼마나 힘들어할까를 생각하자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악불군이 힘들어할 것이 더 걱정되어, 한때 삶을 포기했던 그녀는 살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 소군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제가 있는 이상 아가씨는 절대 안전합니다.”
“알았어. 그런 안 좋은 생각을 잊고 심기일전하자고. 오늘 드디어 천호방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리는 날이란 거 알지?”
“예.”
“지금까지는 소군 혼자만의 힘으로 이만한 명성을 얻었어. 누가 봐도 기적 같은 일을 해냈으니 난 정말 소군이 자랑스러워. 하지만 이제부터는 무력이 아닌, 소군만의 권위를 세상에 보여야 해. 누구도 함부로 보지 못할 절대자의 위엄을! 할 수 있지?”
자신의 명성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절대자의 위엄이라는 말에 악불군은 자신의 가슴이 서서히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