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18화 (218/472)

<천검지애 218화>

218화. 시작(1)

“문주님! 밖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잔양문을 경계하는 경비대장 오진산과 총관 육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지금 회의하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는 것이냐!”

외당 당주 엄기철은 벌떡 일어서더니 대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수하들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죽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희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서찰이 정문에 붙어 있었습니다.”

오진산은 손을 떨며 봉투 하나를 두 손으로 올렸다.

“오진산!”

엄기철은 당장 오진산의 목을 자를 기세로 소리쳤다.

“예 엣!”

“수하들이 죽고 있으면 당장 나가서 범인을 잡아 죽여야지, 경비대장이란 놈이 범인이 서찰을 남겼다고 그걸 문주님께 직접 가져와?”

“그, 그게…… 유순평이 수하들 이십 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들조차 그대로 다 죽었습니다. 계속 나가는 것은 피해만 커질 것 같아서…….”

“네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수하들을 잘 챙겼다고 피해를 따져! 네놈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 것 아니냐!”

“저, 저,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진산은 조탁의 말에 진땀을 흘리며 말까지 더듬었다. 한마디만 실수해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엄 당주!”

“예!”

“너무 윽박지르지 말고 서찰부터 가지고 와 봐라.”

다짜고짜 살인부터 저지르는 행위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수법이라는 것을 경룡마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봉투의 전면에는 천호방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경룡마수는 모두를 보며 물었다.

“천호방이면 요즘 절강 북부 지역에서 세를 넓히고 있다는 신생 문파 아니냐?”

“어중이떠중이 낭인들까지 다 방도로 받아들여 방도 수는 상당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그들 간에 세력이 겹치는 곳은 없어서, 그들과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놈들이 원한도 없는 우리에게 와서 살인을 저지르는 거지?”

고개를 갸웃한 경룡마수는 봉투의 봉인을 뜯고는 서찰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문주님?”

조탁은 뭔가 안 좋은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문을 해체하고 절강을 떠나라고 통보를 했다! 심지어 따르지 않을 경우 오늘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까지 써 놨다.”

경룡마수의 말에 간부들의 대노하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미친 거 아닙니까? 문주님! 명령만 내리시면 우선 밖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제거한 후, 천호방 총단까지 달려가 쓸어 버리고 오겠습니다.”

외당 당주 엄기철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도발을 한다는 것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신중해라.”

“이놈들이 지금 밖에서 본 문의 수하들을 죽이고 있는데, 우선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엄 당주는 먼저 나가 봐라. 상대가 어떤 놈들인지 아직 모르니까 경솔하게 덤비지 말고 신중하게 대응해라. 우리도 곧 나가겠다.”

“예!”

엄기철은 오진산과 육곽을 보며 따라 나오라는 듯 눈짓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너희들, 천호방에 대해서 다른 것은 아는 것이 없느냐?”

“…….”

경룡마수의 말에 남은 간부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꿀 먹은 벙어리야? 설마 같은 절강에 세워진 문파인데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거냐?”

“근래 절강에 세워진 고만고만한 신생 문파가 이십 개는 넘습니다. 더욱이 저희랑은 거리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세워진 곳이 항주 부근이라고 하는데, 거기는 지금 잠룡세가를 노리는 자들이 몰려들고 있어서 오래 못 버티고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던지라…….”

“이런 바보 같은 놈들! 그래도 최소한 방주는 누구인지, 어떤 놈들이 방도로 있는지 정도는 알아놨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아는 것이 없다면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조 당주는 당장 비상을 걸어 모든 문도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켜라. 우선 우리 애들을 죽인 놈들부터 제압한 후 다시 의논하겠다. 뭐해! 빨리 나가지 않고.”

“예!”

모두가 나가자 경룡마수는 품에서 검붉은 가죽 장갑을 꺼내더니 손에 끼기 시작했다.

* * *

“뭘 그렇게 읽어?”

악불군이 고철황이 보내 온 보고서를 다시 읽고 있자 담수련은 의아한 듯 물었다. 악불군은 뭐든 한 번 보면 다 외워 버리기 때문에 또 읽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서하기 어려운 자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오로지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던 악불군이 생각에 변화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해남도로 가는 동안 많은 양민들의 어려운 삶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을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것이 오로지 자신 때문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약간은 불만이었던 그녀였다.

“소군 말이 맞아. 세상에는 나쁜 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사실 난 환경이 그렇게 만들 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런 자들도 죽이는 것보다는 교화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어. 하지만, 현실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어.”

“저도 아가씨께서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압니다. 사실 힘으로 남을 괴롭히는 자들을 교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소모적이고 어렵다고 봅니다.”

악불군은 백교방을 멸문시키면서 상당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그의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백교방이 사라지고 천신문이 양민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던 남창성의 백성들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소군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내가 계획을 세우는 데 좀 편해지는 것 같아.”

“정의는 관용만으로 세워지지 않는 것 같더군요. 백 명의 악인을 죽여 선량한 양민 수만 명이 행복해 질 수 있다면 해야겠지요.”

그러자 담수련은 기회라는 듯 품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이것 좀 봐 봐.”

“절강 지도 아닙니까?”

“응, 거기 내가 점찍은 곳 있지.”

“예.”

“모두 제거할 곳이야.”

“이렇게 많습니까?”

지도에 찍힌 점은 아홉 개나 되었다.

담수련은 제거할 곳을 이미 정해 놓았지만 악불군에게는 잔양문만 얘기했었다. 악불군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수석장로가 보내 준 보고서에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세력만 추린 거야. 잔양문하고는 달리 근래 새로 생긴 신흥 세력인데, 몇 곳은 흑도패들에 가까운 사파들이라 간부 몇 명만 제거해도 그대로 소멸할 거야. 하지만 이곳과 이곳은 모두 제거해야 해.”

“극락교와 마기방이군요?”

“극락교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특히 교리 자체가 너무 음탕해. 여기에 들어갔다가 자결하거나 사라진 여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어.”

“저도 읽으면서 그곳은 반드시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기방은 광귀신마라는 자가 세운 방인데, 수석장로 말이 구천마성에서 세운 하부 조직 같다고 했어. 처음부터 구천마성은 절강성에 발을 못 붙이도록 뿌리를 뽑아야 해. 안 그러면 금방 그들의 마수가 뻗칠 거야.”

“듣고 보니 아가씨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들어올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추국은 의식적으로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다 보니 저절로 들려오는 둘의 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진짜 두 분 너무 잘 통하신다.’

* * *

엄기철이 잔양문의 정예 이십여 명을 끌고 나타나자, 무기를 밖을 향해 겨누고 있던 경비 무사들은 표정이 환해지며 급히 옆으로 비켰다.

나가기만 하면 죽어 나가는데 흉수는 보이지 않으니 바짝 겁을 먹고 있었던 터에, 고수인 엄기철이 나타나자 살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문 앞에 도착한 엄기철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시신이 이십여 구에 달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모습이 매우 특이했다.

‘살수다!’

암기와 단검, 심지어 독으로 죽은 것처럼 피부색이 푸르게 변한 자들도 있었다.

엄기철은 부당주를 보며 급히 말했다.

“아무래도 살수 무공을 쓰는 놈들 같다. 일급 방어진을 형성해라.”

“알겠습니다.”

대답한 부당주는 수하들에게 경계할 장소를 가리키며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진산.”

“예!”

“수하들 열 명을 데리고 나가 시신들을 수거해 와라.”

“지, 지금 말입니까?”

나가기만 하면 죽어 나가는데 나가라니……. 오진산은 엄기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이지, 저 시신을 그대로 놔둘 생각이었냐?”

“아닙니다. 당장 나가서 수거하겠습니다.”

오진산은 엄기철의 목소리에서 살기를 느끼자 급히 열 명의 수하를 불렀다. 그에게 호명을 당한 수하들의 얼굴은 즉시 사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거부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명령 거부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고문을 당한 후 죽게 되기 때문이었다.

오진산은 열 명의 수하들에게 원형진을 펼치게 한 후 자신은 가운데에 들어갔다.

‘대장까지 시켜 줬는데 하는 거 봐라?’

엄기철은 오진산이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는 모습에 혀를 찼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실지로 그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부당주]

[예.]

[분명 숨어서 공격하는 놈들이 있을 게다. 놈들이 어디에서 공격하는지 찾아라.]

[예!]

그들은 숨어 있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한 미끼였다. 그래도 다년간 한솥밥을 먹은 수하임에도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들을 사지로 몬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열 명의 수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안전하기 위해 원형진의 가운데 들어갔던 오진산은 사색이 되어 다시 잔양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무공으로는 불가능했다.

“아아악!”

누구보다도 처절한 비명을 지른 오진산은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두 손 사이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최소한 이십 개는 넘는 바늘이 박혀 있었다. 살수들이 많이 사용하는 박침이었다.

오진산은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듯 땅을 기어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침에는 독이 있는지 곧 경련을 일으키더니 쭉 뻗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자들에게는 실로 공포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봤느냐?]

엄기철은 굳은 얼굴로 급히 물었다.

[보긴 봤는데,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너도 그렇게 봤느냐?]

오진산을 비롯한 열 명의 수하를 죽인 것은 한 명이 아니었다.

‘최소한 일급 살수로 보이는 자들이 열 명 이상이야……. 천하에 이렇게 많은 살수를 보유한 곳이라면…… 설마 백인막?’

순간 엄기철의 얼굴에 문 앞으로 나올 때의 호기는 사라지고 오진산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변했다. 만약 백인막이 맞다면 잔양문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거냐? 당장 나가서 잡아들이지 않고!”

그때 경룡마수가 간부들과 함께 나타났다.

“문주님, 아무래도 적이 살수들 같습니다.”

“살수? 천호방이라고 했잖아?”

“오 대장과 열 명의 수하에게 시신을 수습하라고 내보냈는데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암기들이 날아드는 모습이, 분명 살수 무공이었습니다.”

“천호방이 낭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않았냐?”

경룡마수도 죽어 있는 수하들의 모습을 보자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우습게 볼 놈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탁!”

“예, 문주님.”

“대화를 한번 시도해 봐라.”

“대화요?”

“그래, 감정적으로 대처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경룡마수는 길을 가다가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양민의 목을 그대로 잘라 버릴 정도로 잔인하고 과격한 자였다.

그런 그가 대화를 시도해 보라고 말을 했다는 것은 은근히 겁을 먹었다는 방증이었다.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실로 사파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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