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19화>
219화. 시작(2)
“뭐라고 할까요?”
“우선 이러는 이유부터 알아 봐라. 지금 싸우기에는 우리가 저놈들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그러니 오늘은 싸움까지 가지 않도록 조절해.”
“아, 알았습니다.”
조탁은 상당한 고수였지만 문 앞에 널려있는 삼십 구가 넘는 시신을 보자 긴장한 듯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잔양문의 내당 당주인 조탁이오. 천호방에서 보낸 서찰을 잘 받았소. 본 문에서 귀 방과 시비가 있었던 듯한데,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소이다. 우선 나와서 대화로 풀어 보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자식들 겁먹었는데? 어떻게 백교방이나 하는 행동이 이렇게 똑같냐?]
[저놈도 죽였으면 좋겠는데 문 밖으로는 안 나오네. 어떡할래? 가만 보니까 더 이상 안 나올 것 같은데, 누가 나가서 약 좀 올리는 게 어때?]
천호오영 대독관과 천호칠영 나여송은 언제나 숨어서 살행을 하던 백인막 때보다 지금처럼 대놓고 죽이는 것이 훨씬 재미있는 듯했다.
[공포를 조성하라고 하셨는데 약 올리는 걸로 될까? 그냥 담을 넘어갈까?]
[잔양문주가 지금 와 있다.]
[알아.]
[우리보다 고수야. 대놓고 안으로 침입하면 희생자가 많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방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는 저들이 나오지 못하게만 하라고 하셨다.]
[그럼 시간을 좀 끌어야겠네. 내가 나가마.]
말을 마친 나여송은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
조탁은 시신들 사이에서 나여송의 모습이 스르르 올라오자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시신들 사이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네 말대로 살수 놈이 분명하구나.]
경룡마수는 나여송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며 굳어진 얼굴로 엄기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보통 살수가 아닙니다. 저 정도의 살수를 지닌 곳은 백인막 정도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백인막은 아니다. 그놈들은 이런 식으로 살행을 하지 않는다. 다행히 대화할 용의는 있는 것 같으니, 우선 들어 보자.]
경룡마수 역시 나여송을 보자 백인막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아는 백인막과는 너무 달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천호방에서 오신 분이오?”
조탁은 나여송을 아래위로 한 번 보더니 포권을 하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저놈이!’
완전히 하대를 하며 거만을 떠는 나여송의 모습에 조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경룡마수의 명이 있으니 성질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본 문과 귀 방 간에 어떤 원한도 없는데 다짜고짜 이런 살수를 펼치는 이유가 뭐요?”
“사람 죽이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
조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나여송의 말은 살인을 재미로 하는 살인마나 할 법한 말이었다.
“강호에는 도의란 것이 있지 않소이까? 어찌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일 수 있단 말이오?”
“내가 듣기로 잔양문은 재미로 양민들을 죽인다던데, 잔양문의 내당 당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매우 웃기구나? 넌 사람들 웃기는 경극 배우가 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너무 치욕적인 말에 조탁은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참아! 저놈들을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우선은 저놈들의 목적을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
그는 경룡마수의 전음에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보아하니 우리와 같은 사파 같은데, 지금처럼 사방이 위험한 시기에 사파끼리 이렇게 싸울 필요가 있겠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와 의논해서 타협점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사파? 본 방의 방주님께서는 사파를 제일 싫어하신다. 갖다 붙일 데에 붙여라.”
‘이, 이놈이 말끝마다 부아를 돋우는 재주가 있는 놈이군……!’
너무 안하무인적인 나여송의 말투에 조탁의 인내가 점점 바닥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참는 것은 경룡마수의 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이 넘는 문도들과, 비록 끝자락이지만 백대 고수에 이름까지 올린 문주가 있었다. 그런데 이를 개의치 않고 나여송이 보여주는 오만한 말투와 자세는 그를 극도로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겁이 나서 참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를 말해 보라는 말이외다!”
“잔양문 놈들이 양민들을 악랄하게 괴롭힌다는 소문이 방주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하여 방주님께서는 잔양문을 없애기로 결정하셨다. 서찰을 보내신 것은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도저히 못 참겠구나!”
조탁의 오른쪽에 서 있던 대주 한 명이 인내가 바닥이 난 듯 대감도를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나여송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는 정문을 벗어나자마자 나여송의 손짓 하나에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아악!”
백인막의 살수들은 각자 최적화된 수법을 하나씩 익히고 있었다. 나여송의 절기는 암기술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대주의 얼굴에는, 이십 개는 넘어 보이는 박침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비켜라!”
결국 보다 못한 경룡마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서슴없이 정문을 나섰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여송의 암기가 그를 향해 날아갔지만 경룡마수는 가볍게 암기들을 날려 버렸다.
“경룡마수란 이름이 어떻게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렸는지 알려 주지!”
당장 나여송에게 손을 쓰려고 하던 경룡마수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건?’
경룡마수는 커다란 마차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자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강력한 위험 신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문주님, 천호방입니다.”
엄기철은 마차에 달려 있는 깃발을 보자 급히 말했다. 깃발에는 천호방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안다.”
경룡마수의 목소리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마차를 모는 흑석영 때문이었다.
그는 백인막의 살수 중 특출하게 무공이 높았다. 경룡마수 같은 백대고수에 들어가는 자들을 살수행이 아닌 정면 대결로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경룡마수는 흑석영이 내뿜는 기세에, 그의 무공이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런 자를 마부로 부리는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여송은 급히 마차로 달려가더니 문을 열고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방금까지 광오하다 할 정도로 안하무인한 행동을 보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드디어 발이 먼저 보이고 검을 품에 안은 한 청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순간 잔양문의 모든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심지어 경룡마수조차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기도에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담수련의 위엄을 보이라는 말에 악불군은 처음으로 자신의 기를 밖으로 내보였다.
거기에 그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절대자의 기도까지 더해지자 단번에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를 뿜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란 것은 잔양문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살수들은 물론 나여송과 대독과 심지어 흑석영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역시 악불군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 영주.”
“예!”
나여송은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로 크게 답했다.
“왜 잔양문이 아직도 남아 있나?”
“죄송합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마치 집 앞에 놓인 쓰레기를 처리하는 듯한 매우 치욕적인 대화였지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천호방주님이십니까? 저는 잔양문의 문주인 호인걸이라고 합니다.”
경룡마수는 극도로 공손한 자세로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가 자신의 명호를 말하지 않고 이름을 말했다는 것은 최대한 자신을 낮춘 것이었다.
“내가 보낸 서찰을 안 읽으셨습니까?”
“그게…….”
“읽건 안 읽건 상관은 없습니다. 전 이미 경고를 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쪽이니까요.”
“무림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던 잠룡세가도, 이런 식의 공격을 할 때는 이유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천호방은 무조건 문을 해체하고 절강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천하의 어떤 무림 세력이 그런 경고에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그럼 따르지 않은 책임을 지셔야지요.”
악불군의 말투는 나여송과 비교하면 너무 예의 발랐고 점잖았다. 하지만 경룡마수는 그게 더 불안했다. 마음을 바꿀 여지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절강의 절대자가 되시려고 하신다면 본 문은 무조건 천호방을 돕겠습니다. 저희가 이래 보여도 방을 운영하는 자금만은 확실하게 모아서 드릴 수 있습니다.”
“매년 얼마 정도를 모아서 줄 수 있습니까?”
경룡마수는 희망을 본 듯 급히 말했다.
“잠룡세가에도 저희가 매년 금자 천 냥 가까이 바쳤습니다.”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어렸을 적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 어린 나이임에도 일을 했고 대부분은 음식으로 삯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해 받은 음식을 품에 안고 집으로 가곤 했는데, 그것을 아는 주위의 아이들에게 음식들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들 역시 너무 배고파서 그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잔양문이 있는 지역은 절강에서도 상당히 못사는 지역이었다. 좋은 구역은 잠룡세가가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신들이 쓸 돈을 빼고 금자 천 냥을 바쳤다면 얼마나 양민들의 고혈을 빨았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휙!
툭!
누구도 예상 못 했고,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
검의 길이는 석 자.
악불군과 경룡마수의 거리는 무려 오 장.
그런데 악불군의 검이 뽑히는가 싶더니 경룡마수의 목이 그대로 잘려 땅에 떨어진 것이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누가 있어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초절정 고수를 이렇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서 있는 경룡마수의 잘린 목에서 그제야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모두 죽이세요.”
이어 들려오는 악불군의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잔양문의 문도들은 사방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최고수인 문주가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목이 잘리는 것을 본 그들에게 전의란 있을 수 없었고, 살행에 최적화된 백인막 살수들에게 도망가는 적은 가장 죽이기 쉬운 상대였다.
* * *
커다란 군막 안.
한 명 한 명이 절대자의 기도를 지닌 아홉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태양천의 구대전왕이었다.
그들은 전면 상단 태사의에 앉아 있는 대공의 계획을 경청하고 있었다.
“지금 원 황실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대 칸을 도와 천하를 복속시켰던 본 태양천이 다시 나서 황실을 구해야 할 때이다. 지금 내가 말한 계획대로 전왕들이 움직여 준다면 이 위기를 넘기고 다시 한번 태양천의 위엄을 천하에 알릴 수 있다. 그러니 전왕들은 본 천주의 계획에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겠다.”
대공의 말이 끝나자 전왕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고 전왕입니다. 적들의 준비가 예전과 다릅니다. 반군들의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떠난 태양척살단 중 반 이상이 죽거나 행방불명입니다. 그런데 또 같은 방식의 계획을 말씀하시니 솔직히 불안합니다.”
“내 분명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공명심에 사로잡혀 계획도 없이 마구잡이로 암살을 하라고 보내니, 실패한 것이 아니더냐?”
고 전왕이 더 말을 못 하고 입을 닫자, 대공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분명 말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세운 계획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경우에는 아무리 부족을 대표하는 전왕들이라 해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원나라를 구성하는 아홉 부족의 대표인 전왕들은 천주에게도 따질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평화 시기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 천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 천주님의 계획을 누구에게 지휘하도록 하실 생각이십니까?”
“소천주에게 맡길 생각이다.”
“야 전왕입니다. 소천주께서는 태양로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나도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데 삼 년이 걸렸다. 지금의 정세를 보면 알겠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기에, 내가 마지막 관문의 통과는 상황이 끝난 후에 처리하라고 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보고가 들려왔다.
“천주님, 소천주님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그러자 군막의 천이 열리며 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철룡세가의 소가주인 철무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