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20화>
220화. 정비(1)
철무정은 구대전왕에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철무정, 전왕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철룡세가의 소가주일 때와 지금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요. 소천주께서는 포권은 상관없지만 천주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면 안 됩니다.”
태 전왕의 말에 철무정은 허리를 폈다.
자신의 아버지인 철령세가주에게도 반말하던 전왕들이 그에게 존칭까지 하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철무정은 매우 기뻤다.
그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런 권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앉거라.”
대공의 명이 떨어지자 철무정은 빈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그를 위해 마련된 의자였다.
“무정아.”
“예, 천주님.”
“네게 태양철기단과 태양척살단 두 개의 지휘권을 내릴 것이다.”
“반드시 임무를 수행해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영웅회와 구천마성 등 중원 무림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제룡회는 이미 해체됐고, 철룡세가를 제외한 다른 세가는 지금 독자 생존을 하기 위해 우리의 명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예전에는 모두 너를 두려워하고 대접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젠 모두가 적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소천주는 내일 남하할 것이다. 전왕들도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차 전왕입니다. 지금 금령군주께서 태양금령단을 이끌고 장강 이남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천주님께 허락을 받은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금령군주의 행동은 분명 그의 허락 없이 벌인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대공으로서는 그녀가 그런 행동을 벌인 이유를 짐작하고 있기에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내가 허락했다.”
“금령단에는 구대전왕 소속의 전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허락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천륭검보를 찾기 위해서다.”
‘천륭검보?’
천륭검보라는 말에 철무정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구대전왕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모르던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천륭검보는 악불군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악불군? 담수련의 호위 놈…….’
철무정은 점점 관심이 가는 듯 귀를 쫑긋했다.
“일개 호위 무사 놈의 무공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거기다 그놈에게 당한 자들의 몸에 남은 상처가, 전대 천주님께서 기록으로 남긴 첨륭검에 의한 상처의 모양과 아주 비슷하다. 난 그놈이 천륭검보를 익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천주님, 철뇌마궁에 대한 소식은 보고 받으셨습니까?”
“행방불명이라고 하더구나.”
“저희 전왕들은 철뇌마궁이 죽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상, 나쁜 추측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제 말은 금령군주의 무공으로 악불군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전왕들도 알고 있겠지만, 천륭검보는 본 천에 가장 위협적인 물건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일 여력이 없다. 오히려 금령군주가 대신 나서 준 걸 고마워해라.”
“천주님, 제가 남하하는 김에 금령군주를 도와주면 어떻겠습니까?”
듣고 있던 철무정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소천주는 맡은 임무에 집중해라. 태양천은 소천주가 되었다고 저절로 천주가 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실패가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죄송합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빨리 마칠 수 있다면 네게 천륭검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천륭검보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철무정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대공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천륭검가의 가전 무공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본 태양천의 무공을 능가하는 단 하나의 무공이라는 거다.”
순간 철무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아직도 담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취하는 걸 계속 방해해 온 놈이 천륭검보라는 희대의 무공을 익혔을지도 있다는 말에 불같은 질투가 몰려온 것이다.
‘그놈만은 내가 반드시 찢어 죽이리라!’
* * *
영웅회 절강 담당자 백룡신권 황보준백은 보고서를 읽으며 고심에 빠졌다.
“대협, 어떡하시렵니까?”
황보준백은 보좌하는 유운검 소명섭의 말에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 대협, 천호방의 방주가 천호무적검이 확실합니까?”
“소문은 그렇게 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잔양문의 경룡마수를 상대로 일검에 목을 자르고 홍살방을 한 시진도 안 되어 멸문시켰다고 하니, 천호무적검이 아니더라도 대단한 고수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절강의 사파 열두 곳을 보름도 안 되어 모두 제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구려.”
“더욱 놀라운 것은, 천호방은 피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소 대협은 직접 절강을 돌고 왔으니 자세히 말해 보시오.”
“처음 일주일 간은 사방에서 피가 난무하는 혈겁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천호방에서 먼저 문파를 해체하고 절강을 떠나라는 경고를 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파나 마도들이 고작 경고에 떠날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요.”
“이후는 보고서대로 모조리 죽이는 공격이 시작됩니다. 도망을 쳐도 끝까지 쫓아가 죽인다고 하더군요.”
“잔인함이 거의 사파와 맞먹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본보기였더군요. 그렇게 열두 문파가 피바다가 된 후, 천호방의 경고장을 받은 자들은 곧장 방을 해체하거나 절강을 떠났습니다. 천호방이 그렇게 빨리 사파와 마도문을 절강에서 청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처음 보인 손속이 단호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럼 지금 절강은 천호방에 의해 장악된 겁니까?”
“잠룡세가가 있는 항주의 주위 백 리만 빼고는 절강 전체가 천호방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바람에 잠룡세가를 포위하고 있던 영웅회가 지금은 천호방에 의해 포위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천호방이 스스로 정파를 표방한다고 했지요?”
“천호무적검 역시 양민들에게는 진정한 협객이라는 말을 듣고 있지요.”
“그렇다면 만나서 대화를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뭐라고 말입니까?”
“절강은 영웅회에서 이미 장악한 곳이니 복건이나 강서로 떠나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
“이미 장악을 하고 있다면 말이 되는데, 영웅회는 아직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떠나라고 할 명분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접 사파와 마도문을 쫓아낸 천호방이 기득권을 주장할 겁니다.”
“내 분명 여러 차례 절강성에 영웅회 지부를 공식적으로 만들고 행동해야 한다고 건의했건만…….”
황보준백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총단에 연락해 다음 명을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보고는 할 것이지만, 지금 무림맹 창설 문제로 모두 정신이 없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겁니다.”
새로운 황조의 탄생과 무림맹 창설, 그리고 본격적으로 불붙은 마도와 정파 간의 세력 다툼. 그 혼돈 속에 갑자기 나타난 천호방이라는 신흥 문파 하나가, 천하라는 연못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 * *
소호변에 가까운 장원.
얼마 전까지 한적하던 이곳은 지금 수백이 넘는 장한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정문에는 천호방이라는 적힌 커다란 현판이 달려 있었고, 척 보기에도 살벌해 보이는 무인 십여 명이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길게 줄을 선 장한들은 정문 옆에 앉아 있는 중년인 앞으로 가 신분을 밝히고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
천호방에 가입하기 위해 몰려든 무인들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낭인만 몰렸었다. 하지만 천호방주가 천호무적검이고 절강의 사파와 마도문을 한 달도 안 되어 싹 쓸어 버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명호가 있는 무림인들까지도 수시로 방도가 되겠다고 찾아오고 있었다.
장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나누어져 있을 정도로 상당히 컸다. 그리고 그 내원의 연무장에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흑야신!]
[예!]
[왜 모이라고 했는지 너도 모르냐?]
잠룡세가 오송 분타주인 차운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흑야신을 쳐다보았다. 분타주는 잠룡세가 외문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였다. 처음 외문의 무인들을 규합하여 본 가에 저항을 시작한 자도 그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분타주는 세 명이 더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이 그대로 적중했다. 담무룡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에 대한 대처 방법의 차이가 생기면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서로 지휘하려고 하면서 반목이 더 심해지며 이제는 그들이 서로 적이 된 상황이었다.
그나마 그런 그들을 이곳에 모이게 된 것은 잠룡세가의 그늘에서 벗어난 이후 곳곳에서 당한 수모 때문이었다.
더욱이 원나라가 하북까지 밀리고 주원장이 대세가 되면서 조만간 부역자와 배신자에 대한 학살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모두는 두려움에 떨며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나타난 흑야신이 알려준, 출신 성분에 대해 묻지 않는 문파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주었다.
누군가의 추적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조직에 몸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막상 천호방의 총단에 도착해 보니, 그들이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낭인들과 함께 시험을 보고 거기서 결정된 무공 수위를 기반으로 각 당으로 나눠질 거라고 한 것이었다.
차운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지금 그가 이끌고 있는 수하들은 그에게는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들을 각 당으로 분배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만의 수하가 다 사라지는 것이다.
차윤규는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수하들을 주축으로 무력 집단을 만들고 싶다고 역제안했다. 신생 문파에 자신이 끌고 온 세력이라면 큰 힘이 될 것이니 수락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수석 장로라는 노인은, 문파 안에 붕당을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아직 방에 가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 이견이 생긴다면 떠나는 것이 순서였지만, 그는 떠나지 못했다.
절강에는 명 황조가 세워진 후 수많은 중원 무림인들이 몰려들었다. 차운규는 자신들이 천호방을 나가는 순간 그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분타주님, 지금 우리 상황이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닙니다. 천호방이 아니면 진짜 우리를 받아 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가 낭인 생활을 좀 해 봤는데, 그게 진짜 사람이 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냥 여기서 원하는 대로 무공 시험을 받으십시오.]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시험을 보고 뿔뿔이 흩어진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아무 힘도 없이 종속된단 말이다.]
‘이거 참, 괜찮다고 하고 싶어도 아가씨 얘기는 할 수 없고…….’
이미 악불군만이 자신의 목숨 줄이라고 판단한 흑야신이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차운규를 설득해서 데려왔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신임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상황도 인지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악불군과 담수련 얘기를 한다면 마음을 고쳐먹을 것 같긴 했지만, 담수련의 함구령이 떨어진 터라 자세한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
전각 안에서 악불군과 한 청년이 고철황과 기정경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방주님이시다. 모두는 예의를 갖춰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무림인들을 보면 언제나 경계하고 피하던 고철황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분명 달랐다.
청년은 역용을 한 담수련이었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잠룡세가의 무인들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몇몇이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야신.”
악불군의 부름에 그는 급히 앞으로 나서며 크게 대답했다.
“예, 방주님!”
“이분들이 전부입니까?”
“아직 두 분의 분타주님이 이끄는 자들이 있지만, 합류를 거절해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잊어버리세요. 방도들이 차고 넘칩니다. 싫다는 사람들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차운규를 보며 물었다.
“수석 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분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 골치가 아프다고 하시더군요.”
차운규는 악불군의 말을 듣자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말투부터 뭔가 어긋났음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