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21화 (221/472)

<천검지애 221화>

221화. 정비(2)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좀 안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차운규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 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건이요? 어느 방이 방도를 받으면서 조건까지 맞춰 줍니까?”

“방에 큰 힘이 되어 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간의 조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내가 듣기로 여러분들은 잠룡세가의 외문 출신입니다. 여러분들을 본 방의 방도로 받아들이는 자체가 현 상황에서는 본 방에 상당한 위험 요인이라는 것은 아십니까?”

“그, 그건…….”

“본 방주는 한번 받아들인 사람은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흑야신의 말을 따라 여러분들은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방도가 될 생각이라면 수석 장로님의 말을 따르시고, 싫다면 이대로 떠나 주십시오.”

악불군의 단호한 말에 차운규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잠깐만요.”

그때 아무 말 없던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말하십시오.”

“저분들이 조건까지 말할 정도면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이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방주님께서 직접 시험을 한번 해 보시지요. 만약 방주님의 삼 초를 받아 낸다면 저들의 조건을 받아 주시는 겁니다.”

“솔직히 굉장한 파격인데, 문주님의 말씀이시니…….”

악불군은 짐짓 생각하는 척하더니 차운규를 보며 다시 말했다.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해보겠습니다.”

“대신 삼 초를 못 받아 낸다면 본 방의 규칙을 그대로 따르고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좋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다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차운규로서는 너무 반가운 제안이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무공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사실 잠룡세가의 외문 분타주는 여간한 문파에서라면 당주급의 절정 고수였다.

연무장으로 걸어간 악불군은 차운규가 앞에 서자 말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하시죠.”

차운규는 악불군의 소문이 원체 대단해서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우선 보기에 상당히 젊었고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엄청난 고수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삼 초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포권을 한 차운규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유마칠검을 펼쳤다.

“윽!”

차운규는 악불군의 검이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자 침음성을 터뜨렸다.

‘이게 뭐지? 사술인가…….’

분명 자신이 공격을 했고 악불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눈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악불군의 검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에 닿은 것이다. 조금만 더 찔렀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은 명약관화했다.

“다시 해보겠습니까?”

악불군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으며 물었다.

삼 초는커녕 일 초도 버티지 못했다. 그런데 승복하지 않는다면 추하게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차운규도 알고 있었다.

차운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방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의 규칙에 따라 시험을 보겠습니다.”

차운규가 무릎을 꿇자 보고 있던 잠룡세가의 무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방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역시, 무림인들을 무릎 꿇리기에는 강함만큼 확실한 것이 없네.’

악불군의 한 수에 단번에 상황이 정리되자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더 이상 잠룡세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후 누가 물어도 잠룡세가에 대한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아예 잊으세요.”

악불군의 말은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운규를 비롯한 모두는 머리를 땅에 대며 크게 외쳤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숨느냐 죽느냐 두 개의 선택지에서 고심하던 그들에게 악불군은 구세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 * *

생각 외로 쉽게 상황을 종료시킨 악불군은 고철황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안에서는 천호십영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가, 악불군이 들어서자 포권을 했다.

이십 명의 백인막 특급 살수 중 천호십영을 제외한 나머지는 천호부영으로 임명되어 도창과 남창을 보호하고 있었다.

“모두 앉으세요.”

악불군과 담수련이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총단을 마련하고 조직하느라 수석 장로님께서 너무 수고가 많았는데, 제 집무실까지는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고철황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십영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의 수장이 자신만의 집무실도 없다면 천하가 웃습니다.”

“설마 웃기까지 하겠습니까?”

“태상호법님께서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방주님께서 너무 겸손하셔서 정말 큰일입니다.”

고철황의 말에 추명혼이 웃으며 받았다.

“수석 장로 말이 맞습니다. 한 문파의 장이 되면 그 권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제부터 방도들에게는 말을 놓으십시오.”

백인막의 막주로서 한 조직을 이끈 경험이 있는 추명혼이 고언을 했다.

“제가 말 놓는 것엔 적응하기 어렵더군요. 거기다 대부분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고 하니까 더 어렵습니다.”

“본 방의 방도가 아닌 경우에는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방도들에게는 수장의 권위라는 것이 있지요. 하나의 규칙을 정하시지요.”

“규칙이요?”

“당주 이상의 간부와 당주 이하의 방도 중 육십이 넘은 경우에만 존댓말을 쓰십시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방도들에게 말을 놓으시는 겁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기정경을 보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천호방의 장로인 기정경입니다. 그럼 간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천호방의 첫 번째 간부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우선 방의 운영을 위한 조직도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고철황과 추명혼 그리고 기정경이 초안을 만들었고 담수련의 검토를 거친 것이었다.

우선 흑석영을 필두로 한 네 명의 천호십영이 방주호법단에 뽑혔고, 나머지 다섯 개의 당주와 총관에는 나머지 천호십영이 지목되었다.

방도들의 교육과 수련은 태상호법인 추명혼이 전담하고, 수석 장로인 고철황의 직속으로 총관인 구여풍과 정보당의 나여송을 두어 방의 모든 재정과 정보를 전담하게 했다.

특히 갑자기 너무 많은 방도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강 확립을 강화하기 위해 기정경에게 집법 장로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직속으로 형당과 집법당을 밑에 두어 방도들을 감시하게 했다.

정파를 표방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별했다고는 하나 모두가 협의를 지닌 자라고는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광한궁과 영운산장이 도창과 함께 분타로 칭해졌고, 얼마 전 새로 합류한 평위광에게 천호방 부속 천호표국의 국주자리를 맡겨 절강의 모든 표물을 전담하게 하여 재정 확충을 하도록 했다.

대룡상단 역시 천호방의 보호를 받는 상단으로 공표하기로 했다.

“솔직히 이 조직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철황의 말에 추명혼도 거들었다.

“제가 나름 백인막의 막주로서 조직을 건사해 봤지만 사실 저희들이 만든 초안은 좀 엉성했습니다. 조직도만 있고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적재적소에 간부들을 지명한 것을 보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보고 나니 아! 그렇구나 싶더군요.”

“세 분 어르신들께서 너무 완벽한 초안을 마련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저 혼자라면 못했을 겁니다.”

둘의 말을 들은 담수련이 겸손하게 말하자, 악불군이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방이 세워진 지 두 달도 안 되어 이렇게 완벽한 조직을 체계화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방주님의 명성에 풍부한 재정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정경까지 거들자 악불군이 입을 열었다.

“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제게는 정말 하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말하지만 전 여러분들게 부귀영화는 약속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를 저의 가족이자 형제로서, 절대 배신하지 않고 생사고락만은 함께할 것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악불군의 말은 너무 진정성이 있었다.

“방주님의 명이라면 도산검림이라도 들어갈 것입니다.”

모두는 허리를 굽히며 커다랗게 외쳤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담수련의 눈가에는 감격의 눈물이 살짝 비쳤다.

하지만 감격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귀도신영도 마찬가지였다.

천면이니 신투니 하며 명호까지 있을 정도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근본적으로 도둑놈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무림 문파에서 뭔가를 잊어버리면 무조건 그를 의심하며 추격을 하는 통에 평생을 도망만 다녔다.

그런데 그가 어엿한 방파의 수석 장로라는 최고위직에 올라 예전 같으면 쳐다보기도 어려운 특급 살수들을 부리는 위치까지 올랐으니, 그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백인막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인들은 숨어서 살행을 벌이는 살수들을 무림인은커녕 사람으로조차 치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살수는 천한 인간백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수의 삶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특급 살수인 천호십영조차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번 살수가 되면 어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물론 살수였다는 것을 숨기면 새로운 삶이 가능했지만, 숨기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제 숨어서가 아니라 정식 무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감격 그 자체였다.

모두가 활짝 웃는 가운데, 고철황이 갑자기 생각난 듯 악불군에게 물었다.

“방주님.”

“예.”

“혹시 황상과 아십니까?”

“황상이요? 주원장 대장군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예, 이번에 명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지 않습니까?”

“안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안면은 좀 있습니다. 왜 그로십니까?”

“황상께서 방주님을 찾는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고철황에게 향했다. 비록 새 황조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권력은 무림인들의 권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황제의 비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천하 전체와 적이 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나를 왜 찾는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고 장로님.”

듣고 있던 담수련이 뭔가 떠오른 듯 불렀다.

“예, 아가씨.”

“그 정보는 확실한 것인가요?”

“저와 친한 정보 상인에게 들은 것이니 확실할 것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은밀하게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흠~ 황제가 찾는단 말이죠…….”

담수련은 나쁜 조짐은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든 듯 다시 말했다.

“본 방에 나쁜 일은 아니에요. 우선 우리만 알고 있도록 해요.”

“나쁜 일이 아니라면 먼저 연락을 취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찾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맞아요. 황제의 사신이 총단에 나타나 정중하게 초청을 한다면 방주님의 권위가 한층 더 올라갈 거예요.”

“정중하게 초청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분명 아주 정중하게 초청할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면 방주님을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담수련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 * *

강소성의 남경을 황도로 삼은 주원장은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장군 서달에게는 군사를 주어 원나라를 계속 압박하도록 했고, 승상 이선장과 함께 새로운 법령과 나라의 체계를 갖추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는 매우 패도적이고 잔인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빈한하고 천한 생활을 한 때문에 양민들에게는 대단히 우호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황상.”

자신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주원장은 유백온의 예를 갖추자 모두에게 나가라고 명을 했다.

“태사령, 어서 오게. 뭐가 바빠서 얼굴 보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모두를 내보낸 주원장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제가 바쁜 것이 아니라 황상께서 너무 바쁘신 것이옵니다. 용체도 생각하시오 쉬어 가시면서 정사를 보십시오.”

“난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얼굴 보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인가?”

“황상께서 찾으시던 악불군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유백온의 말에 주원장은 얼굴에 반가운 미소까지 떠올랐다.

“계속 아무 소식이 없어 혹 전란의 상황 속에서 죽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는데, 무사했구만.”

“무사한 정도가 아닙니다. 무림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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