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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22화 (222/472)

<천검지애 222화>

222화. 정리(1)

“엄청난 명성까지 얻었다고?”

“예, 천호무적검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원래 무림인들은 명호가 세 번쯤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얻은 명호에 무적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대단하다는 증거로군.”

“예, 거기다 지금 천호방이라는 방파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방주가 되었다는 말이냐?”

“소문이 그렇게 나 있습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 사파를 징치했다고 합니다.”

“형은 한 나라의 황제가 되고 아우는 방파의 방주가 되었으니, 겉보기에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황상, 예전에는 호형호제라는 말을 하셔도 됐지만, 이젠 그 말은 하시면 안 됩니다.”

“유백온, 지금 명나라가 반석에 올랐다고 생각하나?”

“황조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온 백성들이 황상의 치적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반석에 이미 올랐다고 봅니다.”

“그래, 나는 백성들의 지지 덕분에 황제가 됐지. 하지만 힘이 없는 황제는 언제라도 무너진다. 원나라는 초기에 태양천이라는 엄청난 무력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무림을 힘을 제압할 수 있었지. 하지만 현 황조는 무림인들이 돌아서면 황조 자체가 흔들린다.”

“그들은 이미 황상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지금은 내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난 그들이 필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고 싶네. 그러려면 무림을 힘으로 압도해야 하는데, 아직 부족해.”

“금의위가 곧 자리를 잡으면…….”

“금의위는 근본적으로 무림인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 내가 키운 금의위로 탈바꿈을 시키려면 최소한 이십 년은 더 필요하다.”

주원장은 전쟁으로 넘쳐 나는 고아들 중 무재가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무공 수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장성하여 지금의 무림인들을 기반으로 하는 금의위를 완전 대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악불군도 무림인입니다. 그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믿을 수 없지. 하지만 자네가 조사한 대로, 악불군은 현 무림인들과의 연관 관계가 분명치 않다. 그를 키워, 짐이 완전한 힘을 구축할 때까지 방패로 삼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황제와 형제라는 명분은 주어야 무림이라는 거대한 힘을 막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지 않겠느냐?”

권력욕이 강한 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의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악불군에게 호형호제라는 말을 꺼낸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용해 먹기 위해서였다.

물론 악불군이 권력에 욕심만 내지 않고 자신의 반대편에만 서지 않는다면 끝까지 지원해 줄 생각이기는 했다.

“많은 무림인들 중에 그를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 생명의 은인이 아니더냐? 거기다 첫 인상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 내가 주원장이라는 것을 알고도 전혀 반응이 없더란 말이지.”

주원장은 악불군의 첫 만남에서 그가 보였던 모습을 생각하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유야 어쨌든 황제가 스스로 뒷배가 되어 준다면 악불군에게 날개가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군산은 호남과 호북에 걸쳐 있는 거대한 섬들의 집합체이자 장강의 수많은 수적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원나라 때부터 수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수군들이 출동했지만, 너무 많은 섬에 결국 수적들을 찾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수적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적들이 군부의 수군보다 더 무서워하는 무림인들이 무림맹을 창설하고, 그 총단은 군산에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번 무림맹은 예전의 무림맹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원나라와 싸우기 뭉쳤던 영웅회 소속의 모든 문파가 참여하면서 명실공히 정파 무림의 완벽한 연합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맹주는 천무성궁의 천제무황이 맡았다. 전대 무림의 원로들은 수십 년을 원나라와 싸우면서 실전 경험까지 충분한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런 원로만 오십 명이 넘는 데다 삼십 명에 가까운 호법단과 백이십 명에 달하는 장로 등, 무림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가장 크고 강력한 조직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런 대규모의 조직은 역모를 두려워하는 황실에서 절대 용납지 않기 때문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 전 한 약속 때문에 지금의 황실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무림맹은 성대한 창맹식을 하고는 천하에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을 발표했다.

첫째는 무림맹은 명을 지지하며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리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원나라 이전 존재하던 정파들을 다시 부활시킴과 동시에 세력권 역시 그대로 인정하며, 만약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은 무림맹의 공적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정파들이 사라진 지역에 새롭게 패권을 잡았던 문파들로서는 날벼락 같은 공표였다.

마지막 세 번째.

무림맹은 중원을 배신한 자들과 원나라에 부역한 모든 무림인과 세력들을 소탕하겠다 선포했다.

이 조항은 사실 둘째 조항을 정당화하는 대단히 무서운 선포였다.

실지로 원나라에 부역한 자들은 물론, 정파들이 자신의 세력권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세 번째 선포로 인해 제거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배신이나 부역을 하지 않았다 해도 무림맹의 행사에 방해가 되거나 무림맹에 속한 문파와 원한이 있을 경우 부역자로 몰아가면 죄도 없이 멸문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횡포나 다름없었지만, 무림의 본질을 모르는 양민들은 정파가 다시 부활한다는 하나만으로도 환호를 터뜨렸다.

그동안 사파들에게 너무 많은 착취를 당한 그들은, 정파가 다시 나타나면 악인들을 제거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이 혈풍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아직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아가씨, 잠룡세가에 대해 잘 아십니까?”

추명혼의 질문은 사실 우문(愚問)이었다. 담수련은 잠룡세가에 나고 자란 천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질문의 의도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전 잠룡세가에 대해 잘 몰라요. 어려서부터 내원에서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으니까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십 년이 넘게 잠룡세가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육관에서의 수련과 담수련을 호위하는데 보냈기 때문이었다.

“백인막 시절 점룡세가로부터 많은 청부를 받았습니다. 그 덕에 어쩌면 잠룡세가의 실체에 대해 아가씨보다 제가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지금 잠룡세가가 다 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제가 아는 바로는 잠룡세가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잠룡세가는 오룡세가 중 가장 강하다는 말을 들었고, 실지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으로 압니다. 비록 아버님의 무공이 높고 원나라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잠룡세가의 전력이 약하다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담 가주께서 자체적으로 육관이라는 수련관을 만들고 수하들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잠룡세가가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뭔가 다른 원인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저와 방주님 둘만 잠룡세가에 잠입할 생각이에요.”

“두 분만 들어가신다고요?”

담수련의 말에 고철황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래야만 해요.”

“그건 너무 위험하십니다.”

“지금 잠룡세가의 상황을 확실하게 아는 분은 단 한 명뿐이에요. 그리고 그분을 설득하려면 제가 들어가야 해요.”

“그럼 방주 호법들이라도 데리고 가십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은신술만은 십대고수라도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아이들입니다.”

추명혼의 말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단, 절대로 싸우면 안 됩니다.”

“두 분의 신변에 위험만 없다면 모습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오늘 밤 들어갈 것이니 준비하라고 해 주세요.”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이미 무림맹이 창설됐어요.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우리는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확고한 세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향후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지금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당장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 * *

잠룡세가의 군사였던 문창현은 창가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가주님과 저 보름달을 보며 대화를 나눴던 것이 고작 일 년 정도밖에 안 지났건만, 마치 십 년은 된 것 같구나.’

대공의 명을 받고 잠룡세가에 들어온 것이 삼십 년 전이었다. 당시 담무룡은 무서운 것이 없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엄청난 무재로 나이에 맞지 않는 초절정 무공을 지니고 있던 담무룡은 대공의 명이 떨어지면 어떤 어려운 임무도 반드시 수행해 나가며 대공의 신임을 얻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내겐 가장 행복한 때였어…….’

문창현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냉정하며 조금의 실수도 용납지 않던 담무룡이었지만 그에게만은 정말 잘해 주었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한 번 의리로 맺어진 수하들은 정말 잘해 주었다.

문창현은 담무룡과 형제 같은 주종으로 계속 지낼 것으로 믿었다. 대공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결국 담무룡을 배신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각오까지 하며 그를 도운 것도, 그에 대한 존경과 인간적인 의리를 저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국대광과 방조위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십니까?”

약간 불만조의 목소리에 문창현은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이라도 내고 문을 열어야 하지 않겠소?”

“우리의 움직임 정도는 이미 감지하고 계셨을 텐데, 굳이 인기척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국대광의 말에 문창현은 잠시 그를 보더니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신 게요?”

“무림맹에서 중원 무림의 배신자들과 부역자들을 모두 소탕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노리는 것인지는 너무 뻔한 것 아닙니까?”

“노부가 보기에도 지금처럼 문을 닫고 계속 버틸 수만은 없을 것 같소이다. 문 군사, 대책을 말해 보시오.”

“금령군주까지 우리를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게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그거야 원나라가 너무 빨리 무너진 것이 원인이지,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 않소이까?”

“남 탓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잘못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지요.”

“문 군사, 지금 문 군사의 행동을 대공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되겠소?”

“그래서 죽이시게요?”

문창현의 도발적인 말투에 방조위는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지금 문 군사의 이런 모습을 보셨다면 아마 살아 있지 못했을 거요.”

“그럼 어떤 방책을 원하시는지 말해 보시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우리에게 이곳을 사수하라고 했소.”

“그래서 사수하시렵니까?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를 문 군사에게 묻는 것 아닙니까?”

국대광이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문창현은 그런 국대광을 딱하다는 듯 보더니 물었다.

“그럼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십시오. 이곳의 사수입니까, 아니면 살 길을 찾으실 겁니까?”

순간 국대광과 방주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수하고 싶어도 지금 사방이 모두 적이었다. 사면초가라는 말을 절감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태양천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 줄 거라는 희망도 이젠 접은 지 오래였다. 문제는, 살기 위해 잠룡세가를 버리고 떠난다 해도 살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뚫고 원나라가 있는 하북 지역에 도착한다 해도 사수하라는 명을 어긴 그들을 반겨 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결정이 안 되신 모양이군요. 우선 그것부터 결정을 하신 후 다시 오십시오.”

문창현의 축객령에 방조위와 국대광의 얼굴에는 분노의 표정이 올랐지만, 둘은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공 전하께서 왜 문 군사에게 이곳의 지휘권을 주셨는지 이해가 안 되오.”

방조위는 한마디 하고는 국대광과 함께 나가 버렸다.

“그 이유를 모르신다니 참 딱합니다. 대공은 그대들을 믿지 못한 것이오.”

[그럼 대공이 문 군사는 믿은 모양이네요?]

갑자기 귀에 들리는 전음에 문창현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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