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23화>
223화. 정리(2)
“아니, 어떻게……?”
문창현은 담수련의 모습이 스르르 나타나자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녀의 무공으로 이곳까지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물며 이 방에는 그와 더불어 최고수들인 방조위과 국대광이 있었다.
“제가 나타나서 놀랐나요?”
문창현은 그녀의 뒤로 악불군의 모습이 나타나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악불군, 너는 아가씨를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이 위험한 곳에 아가씨를 모시고 오다니, 네가 진정 미쳤구나.”
“문 군사님,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이런 때 쓰는 거 같네요. 소군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가주님께서는 소군에게 정치와는 상관없이 아가씨를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전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가의 신변에 위험이 생긴다면 가주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아버님을 생각하시는 분이, 아버님은 어떻게 배신하셨을까요?”
“세상에는 자신이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 군사님의 행동은 불가항력이었다 이 말인가요?”
“제가 가주님을 배신하지 않았다 해도 가주님은 대공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가주님께서도 그것을 아시니까 소가주님과 아가씨를 저도 모르게 피신을 시키신 것이겠지요.”
“그럼 아버님은 애초에 문 군사님을 믿지 않으셨다는 말이네요?”
“글쎄요, 그건 가주님만이 아시겠지요. 간신히 빠져나간 이곳을 다시 찾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전 문 군사님을 믿어요.”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버님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는 거예요.”
“제가 배신한 것은 가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방금 아버님께서 믿는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가주님밖에 모르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배신은 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 그걸 믿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아가씨, 하시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절 죽이러 오셨다면 죽이시면 됩니다.”
“문 군사님의 무공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대단한 수준이라고 들었어요. 저희가 죽이려 한다고 쉽게 죽으시겠어요?”
“저도 악불군에 대한 소문은 들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제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죽이신다면 달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럼 죽지 마시고, 아버님이 어디 계신지나 말해 주세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돌아가시지는 않았다는 의미인가요?”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그럼 이제부터 문 군사님이 제 군사가 되어 저를 도와주세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문창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상황을 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문 군사님과 여전히 아버님께 충성하는 잠룡세가인들을 제 밑으로 들어오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어불성설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습니다. 문 군사님은 죽어도 상관없을지 몰라도 다른 분들은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어야 할까요? 부역자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아버님과 간부들은 몰라도, 명을 따르기만 한 분들까지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죽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가씨께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구해 주십시오. 하지만 전 안 됩니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문 군사님이 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못 합니다.”
“전 문 군사님께서 아버님을 배신한 것에 대한 속죄의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인데 그렇게 단번에 거절하시니 정말 유감이네요.”
“가주님을 한번 배신한 저입니다. 아가씨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 안 하십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봐 온 문 군사님은 아버님과 형제 같은 분이셨어요. 또한 배신할 분도 아니었지요.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은 잘 보는 편이에요. 게다가 문 군사님께서는 제 학문 사부님이시기도 하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어요.”
“그럼 아가씨께서 잘못 보셨다는 것이 이미 증명이 된 셈이군요?”
“아니요. 문 군사님께서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시고 배신을 안 하는지 알았어요.”
문창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아가씨 말씀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아십니까?”
“왜요? 전 말이 된다고 보는데요. 문 군사님께서는 대공과 먼저 약속을 하셨을 거예요. 충성 맹세를 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그 약속대로 아버님을 배신했어요. 이제 그 약속은 끝났으니, 저와 약속을 하자는 거예요.”
“제가 그럴 것 같습니까?”
“대공과는 이제 인연을 끊을 생각 아니신가요?”
문창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런 추측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버님께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의 잠룡세가의 움직임에 대해 알아봤어요. 그리고 확신했지요. 누군가 잠룡세가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요. 전 그 사람이 문 군사님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본 가가 움직이지 않은 것은 저 때문이 아니라, 가주님을 따르는 수하들과 가주님을 배신한 수뇌부 간에 알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문 군사님의 능력이라면 그런 알력 정도는 분명 해결할 수 있었을 거예요. 전 일부러 해결하지 않았다는데 무게를 더 두고 싶네요.”
“아가씨를 뒤에서 부추기는 자가 누굽니까? 종리 단주입니까, 아니면…….”
문창현은 악불군을 쳐다보며 말을 흐렸다.
“제가 누가 부추긴다고 넘어가고 하는 사람으로 보이세요?”
“제가 아는 아가씨와 너무 달라서 그럽니다.”
“예전에는 제가 좀 이상했나 보네요?”
“솔직히 예전은 정상적이었고, 지금이 이상해 보입니다.”
“그래요? 전 지금이 정상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는 담수련을 보는 악불군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도 지금이 이상하다는 문창현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지금 모습도 여전히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악불군.”
문창현은 갑자기 악불군에게 말을 걸었다.
“예.”
“천호방의 방주가 바로 너냐?”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보호하라고 네게 다시없을 은혜를 베풀었는데, 어찌 네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이냐?”
“왜 소군한테 그러세요? 천호방을 세운 것은 저를 더 잘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제가 문 군사님께 이런 제안을 하는 것 역시, 잠룡세가의 힘을 이용해 제 보호를 더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몸을 숨기고 조용히 있어도 중원 무림인들의 추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잠룡세가의 수하들까지 흡수하신다면 그들의 촉각에 즉시 걸릴 것입니다. 이곳은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생각을 접으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냥 흡수하면 그들에게 걸리는 것은 맞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잠룡세가를 멸문시킨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담수련의 말에 문창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가씨께서 잠룡세가를 멸문시키실 예정이라는 겁니까? 아가씨, 지금 숨죽이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잠룡세가의 저력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문 군사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전 아버님을 아직도 가주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을 피신시킨 후, 이곳을 칠 생각이에요. 보아하니 밖의 정보를 계속 모으고 계신 것 같으니 아시겠지만, 무림맹이 창설됐어요.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잠룡세가가 될 확률이 농후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제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계속 고심한 것이 바로 그 경우예요. 그래서 며칠을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수운 오라버니 그리고 소군까지 모두 안전하기 위해서는 같이 못 간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포기라면 무엇을 포기한다는 말입니까?”
“아직 아버님을 따르는 분들까지 모두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문 군사님도 포함이 되겠지요.”
문창현은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는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하나 그를 믿고 지지해 줌으로써 방조위와 국대광의 압박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 수하들까지 죽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는 상황이 변화하기를 기대하며 최대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수하들을 대피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였다.
바로 담수련과 악불군이 빠져나간 지하의 비밀 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문창현이 대답하지 않자 한마디 더했다.
“상대가 무림맹이라면 비밀 통로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희가 공격하면 비밀 통로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통로는 저희가 더 많이 알아요. 막히면 독 안의 든 쥐가 될 것이고, 문 군사님께 배운 진을 쳐 놓으면 치명적인 함정으로 변할 거예요.”
“아가씨께서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면 저보다 더 뛰어난 군사 같은데, 굳이 저를 군사로 받아들일 이유가 있습니까?”
“저도 몰랐는데 머리가 좀 좋은 것 같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한 가지밖에 생각을 못 해요. 하지만 문 군사님은 아버님께 계획을 제시할 때 언제나 대안을 같이 만드시더군요.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결정해 주세요.”
문창현은 처음에는 담수련의 말을 치기 어린 허황된 제안으로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그럼 제가 승낙한다면 어찌하실 것인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말해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들은 후에는 거절은 안 됩니다. 그래도 들으시겠어요?”
“가능성이 있는 계획인지는 알아야 결정하겠지요.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문 군사님께서는 매우 합리적인 분이라고 아는데, 생각 외로 극단적인 면모도 있으시네요?”
“무림에 몸을 담은 사람들은 모두 극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아요. 말씀드리지요. 전 천호방과 천신문을 정파로 탈바꿈할 생각이에요.”
“중원 무림은 일 갑자가 넘게 절치부심하며 오룡세가를 노렸습니다. 그런 그들이, 잠룡세가의 사람들이 있는 방파를 정파로 인정해 주겠습니까?”
“당연히 잠룡세가라는 것을 숨겨야지요.”
“아가씨, 그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조사하면 다 알게 됩니다.”
“조사하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희가 잠룡세가를 멸문시키면 의심을 할지언정 조사는 못 할 거예요.”
“정말 잠룡세가를 멸문시키실 생각이십니까?”
“문 군사님께서 죽이라고 명단을 만들어 주세요. 그럼 그자들만 죽일 겁니다.”
“결국 알아낼 것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들이 알아도 건드릴 수 없는 전력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알아도 모른 척할 거예요.”
“그 정도로 강력한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주님께서 삼십 년 넘게 온 힘을 다해 잠룡세가를 키웠지만 간신히 절강성 하나만 장악하는 데 그쳤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 문 군사님께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일각 가까이 심각하게 고심하던 문창현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충성 맹세는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지막 충성은 가주님께 바칠 생각입니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부터 잠룡세가 멸문 계획을 말할게요.”
드디어 문창현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담수련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미소를 지었다.
* * *
무릉도원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꽃이 가득한 정원에는 화려함을 뽐내며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그마한 연못이 보였고 그 연못을 가로지른 무지개 색깔의 난간을 가진 다리는 실로 천도원의 선녀들이 건너다닌다는 천선교 같았다.
그 다리를 건너자 선남선녀라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잘생기고 아름다운 남녀들 수십 명이 여기저기 몰려 앉아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새나 자세들은 민망하다 할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일월신마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커다란 덩치에 관우수염을 한 노인이 나타나자, 대화를 나누던 청년 한 명이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물었다.
그런데 일월신마라니…….
그는 지금 무황으로 불리는 세 명의 절대자보다도 전대의 마두로,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중요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청년에게 존댓말을 붙인 것이다.
“지금 혈담에서 낚시를 하고 계시니, 그곳으로 가 보십시오.”
청년의 말에 일월신마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일월신마라는 대마황의 등장을 금방 잊은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