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24화>
224화. 시작(1)
청년이 가리킨 방향으로 일각쯤 걸어가던 일원신마는 혈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붉은 호수가 나타나자 허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혈담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앉아 있는 노인을 보자 급히 무릎을 꿇었다.
“일월 사제(司祭)가 웬일인가?”
“일월 사제, 교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소문대로라면 이미 이 갑자가 넘는 나이를 지닌 일월신마였다. 그런 그가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인사하고 있었다.
아마 이 장면을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경악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자네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그런 예는 하지 말게.”
“제가 아무리 나이가 먹었다 해도 교주님께는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갖춰야 할 예입니다.”
설마 노인의 나이가 일월신마보다 더 많다는 말인가……
“오늘은 물고기가 입질을 별로 안 하는군. 그만 해야겠다.”
노인이 몸을 일으키자 어디선가 한 명의 중년인이 나타나더니 낚시 도구를 정리했다.
노인이 걷기 시작하자 일월신마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옆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교주님의 예상대로 주원장이 황제에 올랐습니다. 새로운 황조의 탄생으로 지금 중원이 격변하고 있습니다.”
“이미 준비가 다 되었지 않더냐? 계획대로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뭐가 그리 급하더냐? 우선 앉아서 편하게 보고해라.”
“예!”
걷던 노인은 정자가 나타나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과 일월신마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정자 안에는 깨끗이 닦인 탁자 위에 향이 진한 차 두 잔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놓여 있었다.
“앉거라.”
“예.”
차를 한 모금 마신 노인은 차 맛이 좋은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하려고 했던 얘기를 해 봐라.”
“장보주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군. 장보주를 찾는 것은 아주 소소한 일인데 어찌 그 일을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느냐?”
“뜻하지 않은 방해물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구천마성이라도 끼어든 거냐?”
“그건 아니고, 천호무적검이라는 놈이 끼어들어 방해를 했습니다.”
“처음 듣는 명호인데?”
“악불군이란 젊은 놈이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서 예전에 보고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악불군이라는 이름은 들은 것 같긴 하구나. 그런데 어찰단에게 쫓기는 것 같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습니다. 그자가 남무림으로 내려가 천호무적검이라는 명호를 얻었습니다.”
“젊은 놈이 이기어검을 쓴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정파인지 사파인지도 확실치 않다고 했지?”
“지금은 스스로 정파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물론 어느 문파 출신인지조차 아는 자가 아무도 없어, 많은 세력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제거한다 해도 귀찮게 굴 놈이 없다는 거 아니냐?”
“그게 좀…….”
“오늘 좀 이상하구나.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죄송합니다. 사실은 그놈이 저희들과 우연으로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자꾸 부딪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 대해 알고 방해를 하고 있다는 의미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우리의 예상에 없던 변수가 생겼다고 생각하느냐?”
“아직 변수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월신마는 악불군에 의해 방해받은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상세히 보고했다.
“나이가 삼십도 안 된 놈에게 백색마혼과 선풍마강 등이 당했다면 상당히 큰일인데, 그 보고를 왜 지금에야 하는 것이냐?”
“용서하십시오. 제가 너무 만만히 보고 마전의 전주들이 너끈히 처리할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다만 백색마혼은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정황상 그놈에게 당한 것 같다고 추측을 할 뿐입니다.”
노인은 차를 입가로 가져가더니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 하지만 머리로는 분주히 분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놈의 짓이 맞다면, 장보주도 그놈이 가지고 있겠구나?”
“백색마혼이 장보주를 훔친 놈을 쫓다가 당했으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혈응의 행방불명도 그놈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겠지?”
“혈응을 보낸 것이 장보주를 가진 놈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진 것도 추격 중이었고요.”
그의 말은 혈응의 행방불명과 악불군 간에 연관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그럼 아직도 혈응을 찾지 못한 것이냐?”
“혈응사자들이 연락이 끊긴 곳으로부터 사방 백 리 넘게 호각을 불어 댔지만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혈응이 왜 사라졌다고 생각하느냐?”
“혈뇌원에서는 혈응이 그놈을 쫓다가 실수로 당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일월.”
“예, 교주님.”
“네가 혈응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
일월신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노인이 다시 말했다.
“혈응은 영물이다. 심지어 만전의 상황에서는 나도 쉽게 죽이기 어렵다. 그런데 누가 있어 혈응을 죽이겠느냐? 혹 죽었다 해도 그렇게 조용히 죽을 혈응이 아니다. 진짜 당했다면 분명히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그놈이 홍항에 나타나기 전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느냐?”
“그놈이 강호에 나타난 이후에 알려진 모든 행적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혈뇌전의 분석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일월신마는 악불군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꺼내더니 공손히 건넸다.
노인은 보고서를 천천히 읽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한 명의 행적이 분명하냐?”
보고서에는 악불군의 행적이 악양에서부터 자세히 적혀 있었다. 물론 여러 군데 빠진 곳도 있었지만 상당히 자세한 보고서였다.
“소문이 많아서 두세 번에 걸쳐 확인했습니다. 분명히 천호무적검의 행적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노인은 다시 한번 보고서를 읽더니 물었다.
“처음 악양에 나타난 시기가 겨우 일 년 전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는 이 보고서에서 이상한 것을 못 느꼈느냐?”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강하다는 것이 의아하기는 했습니다.”
“강한 것이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처음에 보인 무공과 근래 보인 무공의 차이가 너무 커. 일 년 만에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을까?”
“이자가 변수가 될 것 같으십니까?”
“우리의 계획이 태양천 때문에 수십 년이나 미뤄졌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이놈이 변수가 될지 안 될지는 나도 아직 판단은 안 된다. 하지만 제거해야 하는 놈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각 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분석해, 결과가 나오면 내게 즉시 보고하도록 해라.”
일월신마는 순간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렇게 재조사를 명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보고할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 보거라.”
“예!”
일월신마가 인사하고 정자를 떠나자 노인의 앞에 중년인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혈공자 세 명하고 혈낭자 두 명을 골라, 외유 나갈 준비를 하라고 해라.”
“존명!”
중년인이 사라지자 노인은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어떻게 쉽게 되는 적이 한 번도 없군. 쯧쯧!”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 온화하고 평화롭게 보여서, 누구도 그가 혈교의 교주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 * *
절강성의 항주에서 하룻밤 동안 일어난 사건은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수십 년간 절강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잠룡세가가 멸문한 것이다.
원나라가 물러나고 담무룡까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잠룡세가의 위상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누구도 잠룡세가를 직접 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간한 문파나 세력들에게 잠룡세가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한 달도 안 되어 절강 대부분을 평정한 천호방이 항주 부근에 분타를 세웠다는 소문이 돌면서,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짐은 무림인이라면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분타를 열고 삼 일도 안 되어 잠룡세가를 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의 싸움 장면을 직접 본 항주의 성민들은 사방으로 그때 상황을 퍼뜨렸다. 마치 모두 보라는 듯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리지 않은 초저녁에 공격을 시작했고, 심지어 성안 모두가 들을 정도로 시끄럽게 싸웠기 때문이었다.
잠룡세가에는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천호무적검이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열 명씩 죽었다는 살까지 붙었다.
무림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한 지역의 패자(覇者)로 인정받는 문파를 패배시킨 세력을 다음 패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제 천하의 어떤 세력이건 천호방이 절강의 패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려면 천호방을 쳐서 패배를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영웅회에서 무림맹으로 변신한 정파는 천호방이 절강을 장악해 가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무림맹의 체계가 확실히 잡힌 다음 언제라도 절강으로 쳐들어가 잠룡세가를 제거하면 절강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잠룡세가는 무림맹이 척결 일순위로 선포한 부역 세력들의 대표격이었다.
그러나 천호방이 명실공히 절강의 패자로 등극한 이상 무림맹이라 해도 절강에 들어오려면 천호방의 허락을 받거나 천호방을 제거해야 하는데, 천호방을 칠 명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 * *
“소문은 잘 퍼지고 있나요?”
“예, 최소한 사백 명은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신들은 제가 말한 대로 했지요?”
“항주 북망산으로 옮겨 전부 불태웠습니다. 공동묘지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모아서 같이 태웠기 때문에, 누가 와서 조사한다 해도 사백 명은 죽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추명혼의 보고에 담수련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로단과 호법단 그리고 십영이 아니었으면 제 계획은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이미 저희는 방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아가씨께서 그런 말을 하시면 저희가 방주님께 민망해집니다.”
“고 장로님.”
“예.”
“잠룡세가에 숨겨진 재산들은 없던가요?”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그래도 금자 삼만 냥 정도의 현찰과 전표를 찾아냈고 상당수의 골동품들을 획득했습니다. 제값만 받는다면 골동품도 금자 이만 냥을 될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에게 나눠 주는 바람에 그럴 거예요.”
고철황은 이미 믿고 있었고, 추명혼을 비롯한 백인막 출신들은 그들 역시 부역자로 몰리는 상황이라 담수련이 잠룡세가의 천금이라는 것이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비축한 돈이 꽤 되기는 하지만 수입보다 지출이 현재 너무 많아서, 제 보물 창고를 좀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아주 다급할 때 사용할 거예요. 그리고 재정은ㅁㅅ 이게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담수련이 내놓은 것은 잠룡세가의 재정 장부였다. 거기에는 그동안 잠룡세가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어 왔는지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장부는 대단히 중요해서 문창현은 금잔화에게까지 숨기던 것이었다.
“이대로만 하면 진짜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고철황은 장부를 살피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항주를 감시하던 영웅회 무인들은 어떤가요?”
담수련은 외당 당주인 마진우를 보며 물었다.
“조용히 감시만 하던 자들이 요 며칠간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마 잠룡세가가 어느 정도로 무너졌는지를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냥 두고만 두세요. 어차피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정파라고 정의로운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강성은 광동과 더불어 가장 많은 무역상들이 들어오는 곳이고, 항주의 소호는 천하 곳곳의 수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수입이 대단히 많은 곳입니다. 무림맹은 완전히 정비가 끝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압박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대로 포기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명분을 잃었어요. 그리고 곧 황상이 방주님께 사신을 보낼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저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담수련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준비를 다 한 듯 거침없이 술술 대책을 말했다.
“무림맹의 만진선생을 정파에서는 천하제일의 책사라고 한다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가씨야말로 천하제일이신 것 같습니다.”
추명혼이 정말 감탄했다는 듯 말하자, 아무 말 없이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악불군은 뭐가 좋은지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살짝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