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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26화 (226/472)

<천검지애 226화>

226화. 움직이는 세력들(1)

의도치 않게 모두의 표정이 숙연해지며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방주님의 뜻은 알았으니까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의견을 교류하는 시간을 가져 볼게요. 우선 태상호법이신 추 호법님부터 천호방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추명혼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면이 문제라고 하기에는…….”

추명혼이 의견을 말하는 동안 모두는 조용히 경청했다.

“그럼 이번에는 수석 장로님이신 고 장로님.”

백인막주의 제자에서 시작해 삼십 년 가까이 살수의 삶을 살다가 이십 년간 백인막주로서 한 문파를 운영해보았던 추명혼뿐이 아니었다.

고아로 자라 거지로 살다가 도왕의 제자가 되면서 도둑의 길로 들어선,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온 고철황. 그리고 잠룡세가에서 수십 년간 군사로 있으면서 온갖 문제를 대처해 온 문창현까지.

대부분의 무림 세력에서 열리는 간부 회의가 수장의 눈치를 보느라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로 흐르는 것과는 달랐다.

악불군의 묵인 속에 그동안 자신들이 간직했던 여러 경험에 입각한 실용적인 의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자, 간부회의는 어느새 열띤 토론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식이면 천호방은 금방 어느 세력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전력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책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지식으로는 미처 생각도 못 했던 여러 의견을 듣자,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본 방의 방훈을 말하겠습니다.”

천호방의 전반적인 운영에 대한 회의가 끝나자 악불군이 나섰다.

대부분 듣고 질문만 하던 악불군이 방훈을 언급하자 모두는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방훈은 ‘양민들과 더불어 산다.’입니다.”

악불군의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방훈은 무림 세력의 방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주님. 우리가 정파를 표방하니 양민들을 도울 수는 있지만, 방훈 자체를 그렇게 정한다면 다른 문파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말은 ‘의아하게’라며 돌렸지만 그 속내에는 무림인들이 그 방훈에 조롱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제 방훈은 천호방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것입니다. 본 방은 양민들을 위한 방이 될 것입니다. 방의 운영을 위해 보호비를 받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어떤 문파보다 적게 받을 것입니다. 또한 무료 의원을 개설해 아픈 양민들의 병을 고쳐 줄 생각입니다.……”

그 얘기 외에도 악불군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양민들을 위한 그의 생각은 꽤 길었다. 그리고 듣는 모두의 표정은 다시 숙연해지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정파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파나 마도인도 아니었다. 그저 무림인들에게 천시받으며 살아 온 그들이었다.

평생을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만 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교육 자체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이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던져 주고 있었다.

“하하하, 방주님 말씀을 듣다 보니 여기가 무림 세력인지 관청인지 헷갈립니다. 어쨌든…….”

너무나 조용한 상황에 고철황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어렸을 때 꿈이 커서 관원이 되어 양민들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관원은 못 됐지만, 무림인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겠지요.”

“하하하! 맞습니다. 방주님께서 그게 어렸을 때 꿈이라고 하시니, 저희도 방주님 꿈을 이루는 데 한 손을 보태야지요.”

추명혼까지 가세를 하자 문창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대공부터 담무룡 그리고 금잔화까지 세 명의 윗사람을 모시고 회의를 진행했지만 이렇게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지금까지는 세력 확장이나 재정 충당을 위해 누구를 칠 계획만 짰는데, 양민들을 위한 계획을 짜는 것도 그에게는 아주 신선했다.

그때 나여송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총관으로서 밖을 지휘하느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주님, 배첩이 들어왔습니다.”

“배첩이요?”

천호방이 잠룡세가를 멸문시키고 절강의 패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절강의 토호나 유지들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배첩이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먼저 구철황에게 전해져 그의 손에서 걸러지고 남은 것만 악불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한데, 나여송이 직접 회의 중임에도 가지고 온 걸 보면 배첩을 보낸 상대가 대단한 인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보낸 사람이 누굽니까?”

“태사령 유백온이라고 합니다.”

순간 구철황의 눈이 커졌다.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유백온이 얼마나 대단한 권력자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주님, 유백온이면 황상의 오른팔로 불리는 자입니다. 승상인 이선장보다 지위는 낮지만 권력은 더 크다고 소문이 난 자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높은 관원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악불군의 반문에 고철황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손님을 대하는 데는 여러 급이 있었다. 고철황은 어떻게 대할지 담수련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담수련은 천신문의 문주로서 명목상은 다른 문파의 장이지만, 모두는 이미 그녀를 천호방에서 악불군과 동격이나 이인자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선 빈청으로 모시고 가장 좋은 차와 다과를 대접하세요. 방주님은 곧 오실 거라고 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 장로님.”

“예!”

“주위에 아는 모든 정보망을 통해, 황상이 유백온 태사령까지 보내 방주님을 모셔간다고 소문을 내세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만약 안 좋은 일로 왔으면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일로 사신을 보낸다면 군대를 보내는 것이 맞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금 온 사람은 황제의 오른팔이에요.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니 걱정 말고 소문을 퍼뜨리세요. 저희가 떠나기 전에 무림맹 귀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떠나시다니요?”

“그냥 할 말만 하고 갈 거라면 칙서를 보내면 되지, 태사령이 와서 배첩을 올릴까요? 방주님을 데려가려고 하는 걸 거예요. 방주님이 가시면 당연히 저도 가야지요.”

너무 빨리 상황 파악을 끝낸 담수련의 모습에 모두가 놀랐지만, 더욱 놀란 것은 문창현이었다.

그도 담수련과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무림맹의 귀에 들어가도록 소문을 낸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가씨의 저 능력은 거의 와룡 수준이신데……. 악불군의 무공에 아가씨의 저 머리, 거기에 백인막과 풍부한 재정까지…… 정말 잘하면 우리가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잠룡세가를 뛰어넘는 큰 세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자 모두 이만 나가 보세요.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나자고요.”

유백온이라는 초거물의 등장으로 모두는 긴장했지만 나갈 때는 아주 편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정말 아가씨가 가시려고요?”

모두가 나가자 악불군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여기 놔두고 소군 혼자 가려고?”

“그건 안 되지요. 아가씨 옆에 제가 없으면 누가 아가씨를 보호해 주겠습니까?”

“이젠 소군이 없어도 보호해 줄 사람들은 많은 것 같은데?”

담수련은 모른 척 한마디 했다.

“아무리 많아도 제 눈에 안 보이시면 제가 불안해서 안 됩니다.”

“그런데 왜 혼자 가려고 해?”

“제가요?”

“방금 그랬잖아? 나 갈 거냐고?”

“그건 전 안 가고 싶다는 말이지요.”

“소군은 안 가고 싶어?”

“권력자와 가까워지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군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하고 좀 다르네? 권력자와 친해져야 권력도 생기고 돈도 생기고 하지 않나?”

“역사적으로 권력자와 가까웠던 자들은 대부분 그 말로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아가씨께서요.”

“아~ 내가 그랬구나! 그냥 가까이 있던 자들이 아니라 권력에 기생해서 자기도 권력을 휘둘렀던 자들이라고 바꿔야겠다. 소군은 권력 같은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황제는 아름다운 여인만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한다고 합니다. 위험한 행동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뜻밖인지 눈이 커졌다가는 환한 미소를 지며 반문했다.

“소군, 지금 나 보고 아름답다고 한 거지 맞지?”

“단순히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럼 지금 다른 여인을 걱정하는 거야?”

담수련의 입술이 삐죽거리자 악불군은 급히 말을 바꿨다.

“아가씨랑 같이 가는데 다른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아가씨께 천하제일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당연히 아름다우신 거지요.”

“뭐래? 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관심도 없거든! 소군 생각을 말해 보라니까? 나 아름다워 안 아름다워?”

“아가씨는 정말 귀엽습니다.”

“누가 귀엽냐 안 귀엽냐 물어봤어?”

악불군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했다.

“지금 내 질문이 그렇게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이야?”

“아름답습니다.”

“그냥 아름답기만 해?”

“다른 게 또 필요하십니까?”

“앞에 추임새 같은 게 있어야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담수련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군도 정말 멋있어. 잘생기기도 했고.”

순간 둘은 동시에 얼굴이 붉어졌다.

황제의 사신이 나타나면서 천호방은 물론 그들의 이후 행보까지 정말 중요한 사안을 얘기하는 도중 이상한 데로 대화가 흘렀지만 둘은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이야기가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 * *

“굉장히 단출하군.”

빈청을 둘러본 유백온은 검소하다 못해 누추해 보이기까지 한 청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갔다 댔다.

“태사령 나리께서 오셨는데 이런 곳으로 모시다니, 너무 무례한 것 같습니다.”

척 보기만 해도 대단한 무공이 느껴지는 중년인은 상당히 기분 나쁜 듯 말했다.

“오 장령.”

“예, 나으리.”

“밖에 공사하는 거 못 봤나?”

“봤습니다.”

“이곳도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건물이야. 이 정도는 이해해야지. 그리고 악 방주는 황상폐하께서 직접 모셔오라고 황지까지 내린 분이네. 함부로 행동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장령이라 불린 오선두는 자신을 쫓아온 어찰단 십여 명을 혼자 죽이면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자였다.

곽자흥이 군사를 일으키자 무림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빨리 그의 수하가 되었고, 주원장 휘하에 배치된 이후 급속도로 그의 심복이 되었다.

장군 지위까지 올랐던 그는 주원장이 황제가 되면서 금의위 장령으로 발탁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주원장의 특별 명령으로 유백온을 호위하며 온 그는, 같이 온 금의위 오십 명을 천호방에서 들어올 수 없다고 막은 것 때문에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다른 문파였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유백온의 만류에 단둘만 빈청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악불군이 홀로 안으로 들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천호방의 방주 악불군입니다.”

유백온의 앞에 선 악불군은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노부는 태사령 유백온이라 하오. 그리고 이쪽은 금의위 장령 오선두 장군이요.”

“금의위 오선두라고 합니다.”

답하는 오선두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명나라의 최고 실세인 유백온을 보고도 포권으로 인사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왜 서 계셨습니까?”

“새로운 총단을 지으시는 것 같아서 건물 구경을 좀 했소이다.”

“아직 누추합니다. 우선 앉으시지요.”

유백온이 앉자 오선두는 그의 뒤에 가서 섰다. 악불군의 그의 그런 모습에서 약간 동질감을 느낀 듯 목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높으신 태사령 나으리께서 이곳까지 친히 오신 것입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유백온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주시하더니 물었다.

“혹시 노부를 기억하시겠소?”

“몇 달 전, 주원장 대장군님…….”

챙!

순간 검을 뽑는 소리와 함께 오선두가 대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무례한 자가 있나? 감히 황상의 함자를 입에 담다니!”

하나 악불군은 오선두의 행동을 이미 예견이라도 한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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