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28화 (228/472)

<천검지애 228화>

228화. 격동하는 천하(1)

“운이 좋군.”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쉽게 저놈을 관찰하게 될 줄은 몰랐네?”

주루의 이 층 창가에 앉은 두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여인은, 말에서 내리는 악불군을 유심히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희보다 잘생겼는데? 교주님 명만 아니면 딱 내 취향인데.”

여인이 눈웃음을 치며 말하자 청년 중 한 명이 얼굴이 구기며 물었다.

“혈채, 넌 성깔만 더러운 줄 알았는데 남자 보는 눈까지 그렇게 낮을 줄은 몰랐다.”

“남자 보는 눈이 낮은 나한테조차 넌 남자로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존재감이 없는지 알겠지?”

혈채라 불린 여인은 청년의 스윽 보더니 비소를 흘리며 오히려 한 방 먹였다.

“이게 예쁘게 봐 줬더니 말을 너무 함부로 하네? 나 화나면 너도 죽일 수 있어!”

“혈루, 우리 임무를 잊지 마라.”

둘이 그러든 말든 악불군만 주시하던 다른 청년은 혈루라 부른 청년의 말의 수위가 높다고 생각했는지 질책하듯 말했다.

그들은 혈교의 교주의 친위대로 불리는 혈공자와 혈낭자였다. 외유를 나간다는 말에 모든 혈공자와 혈낭자가 서로 나가겠다고 지원하는 와중에 뽑힌 셋이니, 그들은 행운아라고 할 만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악불군을 보던 그들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가 유백온과 함께 객잔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를 따르던 마차에서 면사를 쓴 여인과 네 명의 시녀가 나오는 것을 끝까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방주라고 했지?”

“분명 그랬어.”

“방주에다 명성까지 높은데, 마차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안으로 모시기까지 한다? 좀 이상하지 않아?”

“천호무적검이 천상신녀라는 계집을 호위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저 계집 아니야?”

혈채는 정말 악불군이 마음에 들었는지, 담수련이 그의 호위를 받는 것이 영 비위에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혈기 네가 보기에 저놈이 강해 보이냐?”

혈루는 아까부터 그것이 계속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느끼는 악불군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정도의 상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우리보다 강해서 느끼지 못한다면, 아예 느껴지는 것이 없어야 맞지 않냐? 하지만 내 느낌에는 대충 사십 년 정도의 내공은 느껴지는데? 자신의 내공의 일부만 느끼게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잖아?”

“중원 무림이 실력도 없는 놈을 그렇게 띄울 정도로 형편없다면, 본 교가 지금까지 기다렸겠냐? 거기다 지금 황제가 불러서 가고 있다. 교주님 명대로 우린 저놈에 대해서 모조리 조사해서 보고서만 올리면 된다.”

“혈성하고 혈국은 어디 간 거야?”

“객잔에 방을 얻었다.”

“금의위가 객잔 전체를 빌렸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방을 얻었대?”

“저들이 객잔 내방만 빌려서, 혈성과 혈국은 외방에 얻었다. 우린 여기서 대기하면서 혈성이 보내는 신호만 기다리면 된다.”

“혈성은 나를 데리고 가지, 왜 혈국을 데리고 갔지? 악불군을 유혹하려면 혈국보다는 내가 더 잘할 텐데?”

“유혹하는 것이 아니니까 혈국을 데리고 간 거다.”

그때 혈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객잔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냥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던 악불군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설마 저기서 나를 느낀 것은 아니겠지?’

마치 우연인 듯 금방 고개를 돌리고는 안으로 사라지는 악불군을 보며, 혈기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 * *

“제갈 군사님, 소문 들었습니까?”

현기수사가 다급하게 군사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제갈우명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황상이 천호무적검을 황궁으로 초대해, 천호무적검이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갈우명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보고서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소문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입니다. 유백온 태사령이 직접 찾아가서 모시다시피 하며 황궁으로 가고 있다는군요.”

“유백온 태사령이면 황상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입니다. 맹주님도 아직 부르시지 않은 황상이 천호무적검을 먼저 부른 걸 보면, 다른 생각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으흠!”

현기수사의 말에 제갈우명은 나직이 침음성을 뱉었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갈 군사님, 장로회에 의제로 올리고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상이 천호무적검을 부른 이유도 모르고 만난 후에 어떤 얘기가 오갈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명분으로 의제를 올린다는 말입니까?”

“군사께서는 황상이 본 맹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천호무적검을 사용하려고 한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아직 확실치 않은 일에 먼저 행동해 버리는 것은 보기 그렇습니다.”

“확실해진 다음에는 늦을 수도 있습니다.”

“새 황조가 세워지고 무림을 견제하는 것은 언제나 있던 일입니다. 그래도 황상께서는 무림맹을 창설한 것에 대해 축하한다는 황지까지 보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레짐작으로 장로회에서 의제로 올려 왈가왈부한다면 오히려 황상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부군사께서는 지금 장로들 중에 황실에 선을 대고 정보를 흘리는 분들이 없다고 자신하실 수 있습니까?”

제갈우명의 말에 이번에는 현기수사가 즉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제갈우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천호방은 누구도 무사할 수 없는 세력이 됐습니다. 스스로 정파를 표방하고 있으니 우선 본 맹에 가입을 권유해 볼 생각입니다.”

“그가 본 맹에 가입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우리에게 타진했을 겁니다. 거기다 천호방에서 방도를 뽑는 방식이나 방도가 된 자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면을 말하시는 겁니까?”

“천호방에 살수로 보이는 자들이 많이 가입해 있다고 합니다. 살수 집단들은 대부분 부역자로 이미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아직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또한 살수로 보인다고 해서 진짜 살수라고 증명이 된 바도 없고요. 저도 지금 다각도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군사님께서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이미 황상의 부름까지 받은 자를 증거 하나 없이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보고만 있다가는, 세력이 점점 커진 후에 표변하면 또다시 큰 적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본 맹에 가입하라고 해야지요. 무슨 일이든 도모를 하려면 명분을 축척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최대한 우대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면 명분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현기수사 역시 정파인으로서 명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염려하는 것은 악불군이 진짜 무림맹에 가입하겠다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그를 공격할 방법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명성을 높여 온 속도로 미루어, 오히려 무림맹에서 그의 입지가 더욱 커질 수도 있었다.

현기수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갈우명이 부언하듯 한마디 던졌다.

“광활한 산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호랑이를 잡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작은 구역에 몰아넣으면 훨씬 적은 수고로도 잡을 수가 있는 법입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계획 없이 호랑이를 잡으려 들면 오히려 잡아먹힐 수도 있습니다.”

제갈우명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 * *

악불군의 황궁행은 담수련의 계획대로 천하를 다시 한번 흔들었다.

황제까지 찾는 천호무적검이 되면서 악불군의 명성이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간 것은 저절로 따라온 부수적인 수입이었다.

“군사, 천호무적검과 계약을 맺은 것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거 아니오?”

구천마성의 장로인 단대경은 상당히 마음이 불편한 듯 물었다. 만통광심이 아무 말도 없자 이번에는 호법인 광상오가 다시 물었다.

“군사, 단 장로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어찌할 것인지 말해 보시게.”

광상오까지 나서자 만통광심은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는 구천마황을 슬쩍 보더니 목례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원전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더니 목봉을 들었다.

“여러 간부님들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저도 압니다. 여기 지도를 보시면 지금 본 성의 세력권은 광동과 광서, 복건 그리고 강서 동남부에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본 성과 대척점에 있는 곳이 화룡세가와 거기서 세운 위성 문파인 정천보가 있습니다.”

모두는 만통광심이 가리킨 지역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다시 단대경이 입을 열었다.

“화룡세가는 어차피 본성에 상대가 안 되오. 제가 말한 것은 강서 북부와 절강이오. 강서 북부는 본 성에서 거의 장악했는데 천신문과 천호방에 빼앗겼소. 거기다 복건까지 다 장악했는데도 천호방에 의해 절강성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있소이다. 천호무적검과의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 때문에 북진의 계획이 모두 막혀 버린 것 아니냔 말이오.”

“지금 명이 원나라를 계속 압박하고 있습니다. 공격이 원체 거세서, 태양천조차 명군을 막느라 지금 무림에는 상관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감숙의 혈해사계는 마룡세가에 막혀 동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무림맹은 아주 손쉽게 하북 이남에서 호남 중부까지는 모두 다 장악해 버렸습니다. 그럼 천호방에 대해 보겠습니다.”

만통광심은 절강에서 강서 북부에 이르는 천호방의 세력권에 선을 긋더니 다시 말했다.

“본 성의 북진을 막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림맹의 남진 역시 천호방이 막아 주는 형세이지요. 본 성에서 단숨에 장강 이남을 다 먹어치운다는 계획은, 우리가 밀던 진우량이 너무 쉽게 패퇴하면서 차질이 생겼습니다. 더욱이 영웅회가 무림맹을 창설하며 전력을 정비한 지금은, 북진이 아니라 그들의 남진을 우리가 걱정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통광심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림맹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니오?”

“주원장이 황제가 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것이 정파의 모임인 영웅회입니다. 숨었던 모든 정파를 모으는 구심점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지금 본 성과 무림맹이 정면으로 붙는다면 이기기 힘듭니다. 그런데 천호방이 그들의 남하를 막아 주고 있으니, 다시 한 번 우리도 전력을 정비할 시간을 번 것입니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구천마황이 자세를 바꾸더니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우선 지금 확보한 지역을 완벽하게 본 성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면서, 화룡세가가 장악한 지역을 먼저 우리의 세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남무림은 완벽하게 본성의 세력이 됩니다. 예전보다 두 배 이상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엄청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무림맹에서 그냥 두고 보겠느냐?”

“그들이 우리를 견제하려면 호남을 통하는 수밖에 없는데, 거리가 너무 멉니다. 거기다 본성의 본진이 있는 광동은 천호방에 막혀 못 옵니다. 무림맹이 어떤 짓을 하건 저희들은 대처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천호방은 정파를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천호방이 무림맹에 흡수된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네.”

광상오의 말에 만통광심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주원장이 왜 천호무적검을 황도로 불러들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원장은 무림맹이 계속 커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거기다 황조의 시작인 지금 무림 세력 간에 전쟁이 일어나서 천하가 다시 혼란스러워질 상황은 극도로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주원장이 천호방을 이용해, 무림 세력 간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말이냐?”

“제 생각에는 분명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무림을 평정하는 동안 혈해사계가 마룡세가를 몰아내고 동진을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무림맹은 본 성에만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아직 사천을 완전 수복을 못한 상황에서 혈해사계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그리고 지금 숨어서 호시탐탐 무림을 노리는 혈교도 다시 활동을 시작하다면, 저희에게 기회가 곧 다시 올 것입니다.”

혈교란 말이 나오면서 모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구천마성은 이미 혈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