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31화 (231/472)

<천검지애 231화>

231화. 만남(2)

철무정이 이끄는 태양척살단은 중견 정파인들을 무차별 암살하고 다녔다. 그 와중에 감숙에서는 마룡세가와 혈해사계 간의 커다란 충돌이 일어났고, 사천 역시 당가와 청성파 그리고 아미파의 연합 세력이 태룡세가를 공격하면서 중원 곳곳에서 피가 난무하고 있었다.

반군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황조가 세워지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던 와중에 벌어진 무림의 전쟁은 또다시 백성들을 불안감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아악!”

“소, 소가주님…… 어, 어 어억!”

‘또 시작이네……. 이거 무서워서 어디 호위나 서겠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전각을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는 무인들의 표정에는 공포감이 선명했다.

그때 두 명의 무인을 대동한 노인 한 명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경계하는 무인들의 지휘자인 듯 중년 무인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몇 명째냐?”

“네 명째입니다.”

노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갔다.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구나?”

“증세도 증세지만 더욱 잔인해지고 계십니다. 어제는 시녀의 시신을 뜯어먹고 피까지 마셨습니다. 또한 경계 무사들 중 두 명이 빨리 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습니다.”

“이지(理智)는 아직 살아 있더냐?”

“제가 간청하면 멈추시는 것을 보면 아직 이지는 남아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노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소가주님, 엄황섭입니다.”

그러자 마치 유부 마귀의 목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듣기 거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들어와!”

문을 연 엄황섭은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잠시 흠칫했지만, 최대한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소가주님, 가주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걱정? 크하하하하! 아버님이 나를 걱정한다고? 괴물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걱정한다고 하면 내가 감격이라도 할 줄 알았더냐?”

엄황섭은 주위에 잔혹하게 훼손된 네 시녀의 시신과 공포로 넋을 잃은 채 구석에 몰려 있는 한 명의 시녀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

“가주님께서는 소가주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 혈독불사마공을 시술하지 않았다면 소가주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으아아아악! 악불군 이놈! 내 반드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담수련 그년을 잡아 평생 내 시중을 들며 노예로 살게 할 것이야!”

그는 마룡세가의 소가주인 사도비류였다. 금지된 마공인 혈독불사마공은 그를 몇 배나 강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의 몸에 주입된 인독의 부작용으로 오관은 완전히 문드러졌고 피부 곳곳이 터져 썩은 고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악귀조차 놀라 도망칠 정도로 공포스러운 괴물의 모습이었다.

혈해사계를 고전하게 만든 것도 그였다. 처음 자신의 모습을 본 그는 모든 것이 악불군과 담수련 때문이라며 당장 달려가 둘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혈해사계와의 전쟁으로 떠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무공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부작용은 역시 점점 더 심해지며 이젠 사람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뒤였다. 더구나 그렇지 않아도 잔인했던 성정은, 더 이상 인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오늘 밤, 대풍야에서 혈해사계와 커다란 싸움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가주님께서 아무래도 소가주님께서 나서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싸움만 끝나면 난 악불군과 담수련을 찾아 떠날 것이다.”

“소가주님, 지금 천독마의가 소가주님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하고 있습니다. 우선 혈해사계를 없애야 소가주님을 치료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기다리라고 한 것이 벌써 육 개월이 지났다.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할 것이냐?”

“천독마의 말로는 아무리 길어도 일 년 안에는 치료약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크으으으으…… 아버님께 전해라. 만약 일 년이 지난 후에도 나를 고치지 못한다면 그땐 나도 참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대풍야로 갈 것이니 준비해라.”

“예!”

이미 괴물로 변한 사도비류. 그가 감숙을 떠난다면 얼마나 참혹한 일이 벌어질지…….

* * *

“악 방주께서는 황상을 뵙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문사인 유백온이 오랜 여행이 힘든지 가마에 타자, 오선두는 기회라는 듯 악불군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가 두려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황상께서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시는 분이지요. 악 방주님께서는 황상을 뵌 적이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두렵기보다는 정말 패도적인 기를 지니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황상께 그런 표현은 좀 불충하시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황상께서 그 표현을 좋아하실지 싫어하실지 오 장령께서는 여쭈어 보셨습니까?”

“그거야…….”

주원장이 패도적인 성정을 지닌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패도적이라는 표현을 주원장이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감히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없으시군요?”

“황상께 감히 그런 질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불충한 표현인지 아닌지도 모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선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무림인인 악불군이 처음부터 탐탁지 않은 그였다. 무림인 출신인 그가 무림인을 싫어하는 것은 좀 모순적이긴 했다.

물론 그가 무림인들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열 차례 이상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싫어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믿었던 자에게 속아 죽음의 위기에 빠진 적조차 있어 지금은 무림인이라면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악불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유백온으로부터 주원장의 생명을 구해 준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후로 최대한 대우를 해 주려고 했는데 또다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악 방주의 그 자신감이 오만함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필시 자신의 가벼운 입을 후회할 날이 있을 겝니다.”

“제가 장령께 어떤 말이건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했는데 여전히 생각을 너무 빨리 입으로 내보내시네요? 입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아마 저보다는 장령께 먼저 생길 것입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촌철살인을 벌이는 둘이었지만 그 뜻은 아주 달랐다.

오선두는 악불군을 비꼬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악불군은 진정으로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한 조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그때 악불군의 눈이 한곳으로 향했다.

혈성이 그의 눈에 띈 것이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악불군은 오선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혈성이 서 있는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제가 어제 한 경고를 농담으로 받아들이신 모양입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소이다. 다만 그런 경고에 움츠러들 제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요.”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아까운 목숨을 잃고 이승으로 떠나지요.”

“하하하! 천호무적검께서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럼 저도 경고를 하나 할까요?”

“말씀해 보시지요.”

“가지고 계신 장보주를 제게 넘기십시오. 그럼 얼마간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 주겠습니다.”

“장보주요? 아~ 그 구슬의 이름이 장보주군요? 어제는 모르는 물건이라고 하시더니, 갑자기 탐이 나신 모양입니다?”

순간 혈성의 표정에 당황함이 나타났다.

‘장보주가 뭔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장보주의 중요성도 모르고 있는 악불군에게 괜히 정보를 주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서 신경도 안 썼는데, 갑자기 우리 물건이라는 것이 생각난 것뿐입니다.”

혈성은 급히 얼버무렸다.

그때 혈성의 주위에 다섯 명의 금의위가 떨어져 내렸다.

“제가 아는 사람인데 어찌 이러십니까?”

악불군은 자신에게 다가온 오선두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악 방주께서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황상의 명을 수행하는 금의위의 행사를 방해한 자는 장령인 내 판단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 무엇을 방해했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닥쳐라! 금의위의 행사를 보았으면 눈에 띄지 않게 숨거나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꼿꼿이 서서 우리의 행사를 보고 있었으니 그 죄가 작지 않다.”

오선두는 악불군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을, 혈성을 통해 풀 생각이었다. 또한 금의위를 우습게 보면 어떻게 되는지도 이번 기회에 악불군에게 주지시켜 줄 생각이었다.

지금 보이는 오선두의 행동은 어쩌면 무림과 금의위 간에, 넓게는 황실 간에 벌어질 갈등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휙!

강압적으로 소리치던 오선두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혈성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든 다섯 명의 금의위가 피를 뿌리며 앞으로 엎어진 것이었다.

“이, 이놈이 감히 황궁의 금의위를 죽이다니! 역적이었구나!”

오선두는 당황하여 크게 소리쳤다. 다른 금의위들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그쪽이 아니겠소?”

혈성은 오선두를 보며 조롱하듯이 말하고는 그대로 오선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내친김에 오선두까지 죽일 생각이었다.

휭이이잉!

빠르게 날아가던 혈성은 엄청난 파공음을 날리며 그의 등을 찔러 오는 강력한 기를 느끼고는 급히 공중을 발로 차며 두 바퀴나 회전을 했다.

그러자 그를 찌르던 기는 간발의 차이로 그를 비껴 나갔다. 일류급의 무공 실력만 있어도 공격을 한 악불군이나, 이미 공중으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그것을 피한 혈성이나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절묘한 수법들이었다.

결국 땅으로 착지한 혈성은 자신을 공격한 물체를 보더니 검미를 찌푸렸다. 그것은 바로 천륭검이었다.

첫 공격을 실패한 천륭검은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또다시 맹렬한 소리를 내며 혈성을 향해 날아갔다.

‘이기어검?’

[시작해!]

혈성은 예상을 뛰어넘는 악불군의 무공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 누군가에게 전음을 날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펑!

검과 검이 부딪쳤다면 당연히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 들린 소리는 폭음에 가까웠다. 거기다 그 여파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주위의 나무들 가지가 모조리 꺾여 날아갔고 땅까지 상당히 많이 파이며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탕! 탕! 펑!

말의 고삐를 당기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오선두는, 여전히 흙먼지에 갇혀 싸우고 있는 혈성을 보자 경악한 표정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금의위 다섯 명을 단 한 수에 제거하는 것은 오선두로서는 불가능했다. 더욱이 그 상태에서 자신을 공격할 때 그는 방어는 생각도 못하고 죽었구나 하고 자포자기까지 했었다.

그런 혈성을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고 말로만 듣던 이기어검으로 궁지로 몰아붙이는 악불군의 무공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저자의 소문이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었구나…….’

오선두는, 악불군이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라도 죽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검을 조종하던 악불군의 표정이 일변했다.

담수련이 탄 마차 쪽으로 혈성과 비슷한 기를 풍기는 자들이 다가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법들은 아가씨의 마차를 보호해라. 적들이 아가씨를 노리고 있다.]

악불군은 방주 호법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악불군의 약점이 무엇인가 의논하던 혈공자와 혈낭자들은 담수련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혈성이 악불군을 잡고 있는 동안 나머지가 담수련을 납치하는 것이었다.

낮을 택한 것도, 금의위의 철통 경계에 밤이 더 어렵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맞았지만 방법에 큰 문제가 있었다. 악불군의 무공이 그들의 예상을 넘었다는 것과, 담수련의 주위에 숨어서 요인을 암살하고 납치하는 데 최고의 기예를 가지고 있는 백인막의 특급 살수가 네 명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마차를 모는 마부는 백인막 사상 최고의 기재인 흑석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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