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33화>
233화. 수면 아래에서(2)
아무리 청년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완숙의 경지에 들어 최고수 소리를 듣던 네 명의 미래의 절대자들이 수하들까지 이끌고 합공을 할 정도였다면, 그가 얼마나 고수였는지 알 수 있었다.
혈우대마종은 심장에 검이 박힌 후 피를 대량으로 뿜어냈다. 문제는, 그들이 싸운 천장단애는 들어온 쪽만 길이 있고 나머지는 빠져나올 구멍조차 없는 만장단애라는 것이었다.
구문황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그를 나머지 세 명이 연달아 공격했다. 결국 온몸이 난자된 그는 낭떠러지로 떨어졌고, 끝내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시신을 봐야 안심할 수 있다며 낭떠러지를 내려가려고 한 무림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낭떠러지가 호리병처럼 안으로 깎인 형태라서 도저히 올라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 이상 미련을 버렸다.
그렇게 이 갑자 전에 죽은 절대마종으로 회자되던 그가 예전과는 달리 혈교라는 거대한 세력까지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중원 무림인들이 안다면, 아마 경악을 넘어 원나라의 침공에 가까운 공포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구문황과 비견될 정도라고 보십니까?”
최학의가 그를 모셔 오는 동안 혈우대마종이 누군가를 칭찬한 것은 구문황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아직 얼굴도 보지 않고 단지 보고서로만 접한 악불군을 칭찬하자, 최학의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혈공자와 혈낭자가 감시를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되어 걸렸다고 적혀 있다. 내가 제법 쓸 만하게 가르쳤다고 생각한 아이들을 말이다. 더욱이 그 아이들과 장보주를 단번에 연계했다는 점도 뜻밖이구나. 심지어 장보주를 꺼내 이것을 찾으러 왔냐고 물었단다. 실로 대단한 배짱이 아니더냐?”
“그럼 천호무적검이 장보주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혈뇌전의 예상이 맞았군요?”
“분석을 잘한 셈이지.”
“그럼 지금 감시하는 혈공자들과 혈낭자로는 장보주를 회수하기 어렵겠군요?”
“장보주를 떠나, 이 아이는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 무공의 진보가 터무니없이 빨라. 이런 아이는 시간을 주면 안 된다.”
혈우대마종은 요새 악불군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모아 직접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이, 젊을 적 자신보다도 더 빠르게 무공이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패를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아까운 아이이긴 하지만 제거하는 것이 맞을 거야.’
혈우대마종은 이미 마의 극의를 깨닫고 초마지경을 넘어 마신지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림 역사상 초마지경에 도달한 마도인조차 손으로 꼽을 지경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얼굴과 말투 그리고 행동만 보면 오히려 정파인 같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반드시 제거하는 과단성과 잔혹함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럼 제거하라고 마전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무리 급하게 죽일 자라도, 황제를 만나러 간다는 데 건드리는 것은 문제 소지가 많다.”
“그럼 돌아올 때 제거하라고 전하겠습니다.”
* * *
주원장이 황도로 삼은 남경에서는 새로운 황궁을 짓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남경의 성곽에는 빽빽하게 군사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더욱이 천 명이 넘는 군인들이 성문의 양옆으로 도열해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모습은 누구든 위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직 원나라가 하북에 버티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열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니까, 아직은 경계가 심한 편입니다.”
“태양천에서 지금 무림인들을 암살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있던데, 황상께서도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금의위에서도 이미 그 정보를 듣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이곳은 못 들어옵니다. 우선 남경 전체를 이십만에 달하는 구문제독부의 군사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성문을 들어올 때 받는 비표가 없으면 누구든 불문곡직 잡혀가게 되지요. 특히 황궁의 궁벽 외부는 구문제독부의 최정예인 십기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자객이나 살수가 들어오려면 어딘가 숨어야 하는데, 숨을 곳조차 없다고 봐야지요.”
“제가 듣기로 황상의 친위대는 금의위가 가장 강력하다고 했는데, 장령께서는 어디를 맡고 계십니까?”
“금의위는 경계나 호위를 하는 곳이 아니라 황실의 체제를 수호합니다. 그래서 구문제독부의 군사들과 함께 불순분자들을 체포하거나 역모를 꾸미는 자들을 잡아들이지요.”
“그럼 궁내의 경계는 어디가 합니까?”
“황상의 친위대는 금의위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축인 어림군이 황궁의 경계를 맡고 있지요.”
오선두가 황궁의 경계까지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악불군에게 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지로 황궁에 경계에 대해 알려고 하는 자체가 역모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장령께서 하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황실의 수호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법이니까요.”
악불군의 말에 오선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황상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악불군이 인정해 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도착이군요.”
잠룡세가의 본가는 절강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장원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황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엄청난 크기도 크기지만, 새롭게 지어지는 전각에 들어가는 재료들도 보통 사람들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고급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 그것을 보는 악불군의 마음은 그리 편치는 않았다.
황제는 천자(天子)라고도 불린다. 즉, 인간이 아닌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미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하늘의 아들이 머무는 황궁이 크고 화려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란으로 상권이 붕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집과 터전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며 살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는 지금, 이렇게 화려한 궁을 짓고 있다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악불군은 곧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어린 시절에 깨달은 그였다. 그 불공평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특별 안내를 받아 악불군과 담수련이 도착한 곳은 상당히 운치 있게 꾸며진 정원에 딸린 소축이었다.
황궁의 내원은 어림군과 금의위를 제외한 누구도 무기를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악불군 일행에게는 무기 소지가 허용되었다. 실로 파격적인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황상이 우리를 아주 좋게 본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기 소지는 소군을 황상이 믿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저희와의 만남이 아주 짧았는데 그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원래 신뢰라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단지 눈빛만 보고도 형성될 수 있다고 하더라. 어린 나이에 내가 소군을 한 번 보고도 그렇게 좋았던 이유도 그런 거 아닐까?”
애늙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이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녀에게 악불군은 정말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심지어 담무룡조차 왜 담수련이 그렇게 악불군을 좋아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아가씨 말씀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아가씨를 한 번 보고는 하늘의 선녀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은 아가씨를 위해 살겠다고 결정했지요.”
누구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만남을 앞둔 자리에서도 달달한 대화를 이어 가던 악불군과 담수련은, 서로를 한 번 보더니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황상이 소군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할 거야. 그때 소군이 어떤 대답을 할지 한번 연습해 볼까?”
“지금 말입니까?”
오는 동안 연습을 할 시간이 충분했는데 하필 여기에서 하자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악불군의 반문에, 담수련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태사령 나으리까지 보낸 것을 보고 대충은 생각을 했는데, 황궁에 도착해서 어떤 대접을 받나 봐야 확실하게 의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런데 여기 빈청도 그렇고 다과 준비한 거나 무기를 압수하지 않은 것 등을 보고 확신이 들었어.”
“그럼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만약 황상이 황궁에 좋은 자리를 권하면서 자신의 옆에 있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할 거야?”
“아가씨를 제가 계속 모실 수 있다는 보장만 해 준다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가씨를 위협하는 자들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
“잠룡세가에서 안전을 이유로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하셨는데 또다시 같은 이유로 황궁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가씨께서 행복해하실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담수련은 뭐든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악불군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소군의 말은 알겠지만, 그래도 거절할 때 상대의 마음까지 생각해야 해. 더구나 황상이잖아.”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선 대단히 감격했다는 듯 좀 과장되게 고마워해. 그러면서 관에서 일할 만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해. 특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부각해야 해. 할 수 있겠지?”
“상당히 어려운 지시지만, 아가씨께서 원하시는데 잘해야겠지요.”
“그럼 두 번째 제안이 들어올 거야. 이게 아주 중요해.”
“말씀해 보십시오.”
[내 짐작이 맞다면 황상은…….]
담수련은 대화를 전음으로 바꾸더니 자신이 예상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응?]
담수련의 말을 다 들은 악불군은 미묘한 표정으로 담수련을 자세히 보며 물었다.
[혹시 아가씨, 미래가 보이십니까?]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봐?]
[마치 상황을 옆에서 보고 오기라도 한 듯 너무 구체적으로 예측을 하시니, 혹시 미래로 갔다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내 생각대로 하실지는 나도 몰라. 다만 만약 그런 제안을 하면 그렇게 답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우선 염두에 두자는 거야.]
[아가씨 말씀을 들으니 결국 전 황상의 이용물일 뿐인 것 같습니다.]
[오늘 회담이 끝나면 소군에게 생각지도 않은 부와 명예가 따라올 거야. 무림인들 역시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고, 무림에 대한 영향력도 급상승하겠지. 하지만 언제라도 희생양이 되어 내쳐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잘 대처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가씨의 예측대로 황상께서 그런 제안을 한다 해도, 제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잘못하면 황상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다는 말이 돌 수도 있습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해도 생긴 권력을 착한 데에만 사용한다면 나쁠 것도 없어. 그렇게 따지면 승상이나 태사령 등 모든 조정의 신료들은 황상의 명을 뒤집어쓰고 호가호위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능력은 이미 충분히 보여 주고 있잖아?]
악불군의 성정을 너무나도 잘 아는 담수련은 이미 그가 어떤 고심을 할지를 파악하고 있었던 듯, 전혀 막힘없이 그를 달랬다.
[잘못하면 정파와 마도 모두를 적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가만 있어도 그들은 우리의 적이 될 거야. 아무리 숨기려 해도 내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니까. 무림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들과, 너무 잘나가는 소군을 시기 질투하는 자들이 소군을 음해하려고 할 거야. 우린 그런 자들을 상관하지 말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 그냥 밀고 나가면 돼.]
담수련의 말만 듣는다면 어려운 일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사실 그녀가 지금 한 말들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무림에 거대한 돌풍을 일으킬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가씨, 황상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딱 알맞게 오시네.”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을 향해 섰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