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34화 (234/472)

<천검지애 234화>

234화. 황제(1)

먼저 들어선 것은 삼십여 명에 달하는 어림군이었다.

그들은 악불군과 담수련의 주위를 둘러쌌다. 만약을 위한 조치였다.

곧이어 이번에는 오십 명은 됨직한 금의위가 들어서더니 양옆으로 도열해 길을 만들었다.

“하하하하! 이거 참,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 되는데 황제라는 자리가 귀찮은 점도 꽤 많아. 이해하게.”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곤룡포를 입은 주원장이 오선두와 같은 장령 복장을 한 중년 무인 네 명과 유백온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상께 인사드립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했다.

예절에 관한 문제는 이미 유백온과 조율한 터라 오선두처럼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주원장이 상단에 위치한 옥좌에 앉자 어림군들은 포위를 풀었다.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다고 하니 좀 불편하더라도 참게나.”

세상에서 가장 많은 암살 위협을 받는 사람이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닙니다.”

“옆에 낭자는 그때 보았던 소저 같은데, 오늘은 소개시켜 줄 수 있겠나?”

그러자 담수련은 얼굴을 가린 면사를 떼어 내고는 다시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천신문 문주인 천상신녀입니다.”

담수련은 예쁘기는 하지만 천하절색이라 부르기는 좀 애매한 얼굴로 역용을 하고 있었다.

“천신문이라? 상당히 품위 있는 이름이로군. 그래,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강호를 떠도는 중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새 방을 두 개나 세웠다니 대단하구나!”

“황상께서 빠르게 천하를 안정시켜 주신 덕분입니다.”

담수련의 말에 주원장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나타났다.

“짐이 전에 말했듯이 나를 구해 준 보답을 하고 싶은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무공을 배운 무인으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황상께서 어려움에 처했고 저희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굳이 고마움을 표시하신다면 하늘에 보답하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보답해라? 짐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니 당연히 하늘에 고마움을 표시는 해야겠지. 그래 너는 어떻게 보답하기를 바라느냐?”

“우선 황하와 장강에 수많은 이재민들이 생겨 굶어 죽는 사람들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우선 그들부터 구휼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방금 하늘에 보답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백성이 하늘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황상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그게 바로 하늘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하하하하! 아주 간단한 논리인데, 어찌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다는 대신들이 그런 생각을 못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오랜만에 즐거운 듯 파안대소를 터뜨린 주원장은 잠시 악불군의 얼굴을 주시하더니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새롭게 건국한 황조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정치(政治)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치안이 확립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우리는 의식주라고 하지. 하지만 치안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말이야, 치안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세력이 있는데 그게 바로 무림이란 말이다. 무림인인 너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구나. 어떻게 해야 무림이 치안을 방해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겠느냐?”

“황상께서 무림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하실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의미냐?”

“무림인들을 양민들과 같이 관에서 제어하실 생각이신지, 아니면 무림인들에게 자율권을 주실 것인지, 만약 자율권을 주신다면 그 상한선을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신지 등에 따라 대처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불군의 답을 듣던 주원장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마치 악불군이 자신이 무엇을 물을지 알고 있었다는 듯, 생각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즉각즉각 자신의 의견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자네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나?”

“본 방이 지향하는 것이 양민을 보호하자는 것입니다.”

“자네가 세운 방이 지향하는 것이 ‘양민을 보호하자’라고?”

“예.”

“하하하하하! 정말 재미있어. 짐이 이렇게 웃어 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래, 어떻게 양민을 보호할 생각이냐?”

“우선 제 세력 안에서는 양민들을 괴롭히는 흑도왈패와 사파부터 일소할 생각입니다. 또한 지금 상권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들이 이익을 낼 때까지 보호비도 최대한 적게 걷을 생각입니다.”

“지금 네가 한 말들은 관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으로는 아직 원나라가 건재하고, 태양천이 사방에서 요인 암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이 정비되어 제대로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무림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치안 유지를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황상께서 어디까지 용인해 주시느냐가 관건이겠지요.”

“내가 허락을 안 하면 안 하겠다는 말이냐?”

“전 황상께서 방을 해체하라고 하시면 당장이라도 해체할 것입니다. 당연히 황상의 허락이 없는 행동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주원장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명을 건국한 지 고작 한 달 남짓이었다.

황제를 칭하고 황궁까지 짓고 있지만 여전히 중원의 반 이상은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새롭게 성주와 현령들을 임명하여 지방 관아를 정비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서 무림 세력은 주원장이 새로운 황조의 기틀을 잡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짐이 원래는 네게 황궁 내에 높은 지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네 말을 듣다 보니, 궁보다 밖에서 나를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구나.”

“일개 무부인 제가 황상께 도움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짐은 지금 무림 세력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 그들이 또다시 정파와 마도로 나뉘어 끝없는 전쟁을 시작한다면 오히려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부담이 될 수도 있어. 한마디로 무림 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부담이 너무 간다는 얘기다.”

주원장의 말을 듣던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담수련을 한 번 슬쩍 봤다. 세세한 것은 약간 달랐지만 전체적인 대화의 맥락이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황상께서 제게 힘을 좀 실어 주신다면, 제가 전쟁을 막아 보겠습니다.”

“가능하겠나?”

“지금 무림은 남무림의 구천마성과 북무림의 무림맹 그리고 서무림의 혈해사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선 제가 세력권으로 삼은 절강과 강서 북부 지역은 정확하게 남무림과 북무림의 중간입니다. 황상께서 제게 힘을 실어 주신다면 그 두 세력은 천호방의 세력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전쟁도 없는 거지요.”

“어떻게 힘을 실어 주면 되겠나?”

“관과 무림 간에 문제가 생길 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든다고 공표해 주십시오.”

“관과 무림 간의 창구?”

주원장은 슬쩍 유백온을 쳐다보았다.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관례가 없는 상황에서 황실에 어떤 이해득실이 있을지 의견을 물을 것이다.

그러자 유백온이 악불군에게 물었다.

“악 방주.”

“예.”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소?”

“원나라는 어찰단을 만들어 직접 무림을 억압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상당히 큰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원나라 초기 지리멸렬했던 무림 세력들이 영웅회를 조직해 강력하게 원나라와 싸운 것도, 관에서 직접 무림을 제어하려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큰 이유였다고 들었습니다.”

유백온은 자신도 그 문제로 고심하고 있던 터라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구를 만들면 다를 것이라는 이유가 있습니까?”

“무림인들은 무공이 강한 사람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합니다. 즉, 무림을 통제하려면 강한 자들을 통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요. 그리고 강한 자들은 억압이 아닌 유화만이 제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황실과 직통할 수 있는 창구로 지명되는 사람이나 세력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명예와 반대급부를 준다면, 무림인들은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무림인 출신인 주원장은 무림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림 세력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주원장은 지금 개국 초기이고 힘이 있을 때 밀어붙여 무림을 황실에 완전히 복속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실패했을 경우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악불군의 제안은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좀 있었지만 유화책을 원하던 유백온이 주원장에게 권하던 방식이었다.

당장 무림 세력이 없다면 여러 가지로 나라를 경영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그들을 적으로 삼기에는 아직 나라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짐의 성정이 그런 유화책을 별로 안 좋아한다.”

말이 다 들은 주원장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유화책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라고 생각하십시오.”

“황상, 우선 악 방주의 말을 좀 더 들어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 계속 말해 봐라. 그리고 짐이 어떻게 힘을 실어 주기를 바라는지도 말하고.”

“예.”

주원장에게 공손히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악불군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황상께서 직접 인정한 열 개의 신물을 만들어 무림인 열 명에게 준다고 공표하시는 겁니다. 당연히 그 신물을 받은 사람은 각 성의 성주조차 예를 갖출 정도로 우대를 해 주어야 합니다.”

“무림인에게 종삼품인 성주가 예를 갖추도록 한단 말이냐?”

“그 정도는 되어야 신물에 권위가 생길 것입니다. 또한 그 패를 가진 자가 민원을 제기하면 최대한 들어주는 파격적인 권한도 부여되어야 합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구나.”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분들이라면 그런 패가 없다 해도 여간한 민원은 다 처리할 힘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공표를 함으로써 명예만 올려줄 뿐, 실질적으로 다를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게 무림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무림맹주님과 구천마성주 그리고 혈해사계주는 이미 무림에서 무황으로 불리는 분들이니, 그 신물을 그냥 하사하십시오. 그리고 나머지 여섯 개는 황상께서 일 년 후 백 명의 고수들을 초빙해 무림 대회를 열어, 여섯 명을 뽑아 하사할 것이라고 공표를 하시는 겁니다.”

“황상, 진짜 묘안인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게 알려지면 무림인들은 그 무림 대회를 준비하느라 딴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마도나 사파보다는 정파가 화가 많이 나 있습니다. 당장 무림맹에서 부역자를 제거할 것이라고 공언까지 했습니다.”

“사실 황상께서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신다오. 부역자를 처단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나 그들에 대한 원한으로 미루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본다면 사방에서 부역자를 죽인다고 피바람이 불 텐데 그건 또 다른 혼란이 아니겠소?”

“정파인들이 중요시하는 것이 명분 말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명예입니다. 황상께서 직접 주재하시는 무림 대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분명 모든 문파는 전쟁보다는 우선 자파의 명예를 얻기 위해 무림 대회 준비를 먼저 할 것입니다.”

주원장은 유백온을 보며 물었다.

“묘안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나?”

“예, 무림 대회를 연다는 생각을 왜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는 명예를 주면서 서로 간에 경쟁까지 붙여 분열을 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유백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주원장은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네가 앞서 말한, 힘을 달라는 것은 무엇이냐?”

“세 분 무황께 신물을 하사할 때, 저도 거기에 끼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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