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35화 (235/472)

<천검지애 235화>

235화. 황제(2)

악불군의 요구는 얼핏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 함축된 의미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인정하는 열 명의 대표자 중에는 세 명의 무황이 있고, 그들에게 대회 참가와 상관없이 신물을 먼저 준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할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그 셋은 정파와 마도 그리고 사파를 대표하고 있으니 균형 면에서도 아주 적절했다.

한데 문제는 그들과 같은 대우를 악불군이 받는다면, 무림의 세력 판도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이미 지각 변동이 있다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이미 십대고수를 능가하는 명성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무림인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무황들과 동급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하나가 빈다 해서 좀 의아했는데, 그걸 네게 달라는 말이었구나?”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가 남무림과 북무림 간의 중립지대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악 방주.”

악불군의 말을 듣고는 뭔가 생각하던 유백온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예.”

“악 방주께서 무황급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지요?”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럼 분명 악 방주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악 방주를 해하려 들 텐데, 괜찮겠소?”

유백온은 무림인은 아니었지만, 주원장의 뜻을 따라 무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무림인들의 성향이었다.

그리고 그가 분석한 무림인의 성향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자신보다 잘나갈 경우 절대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저를 인정하지 못하는 많은 무림인들이 제게 시비를 걸 것입니다. 하지만 황상께서 인정하신 이상, 단체가 나서서 대놓고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집단이 아니라면 버텨 낼 자신이 있다는 말이구나?”

“자신이 있다기보다는, 해야 할 일이니 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하하하! 역시 내가 정확하게 봤구나. 그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느냐?”

“만약 황상께서 흡족한 결과를 얻으신다면 제가 부탁하는 것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알았다.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지만, 네가 반역을 꾀한 것만 아니라면 다 들어주마.”

주원장의 말에 담수련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나타났다. 이번 외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지금 주원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 * *

[호법님, 연락이 왔습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던 잔인잔마는 수하의 전음에 급히 물었다.

[뭐라고 하더냐?]

[군사님 예상대로 대풍야에 혈추광마가 마룡세가의 무력 집단과 함께 나타났다고 합니다.]

혈추광마는 혈해사계에서 사도비류에게 붙여 준 명호였다.

[이진과 삼진에도 연락해라. 도착 즉시 쳐들어간다.]

[예!]

전음을 마친 잔인잔마는 어두컴컴한 장원을 주시했다.

마룡세가는 감숙에서는 삼십 년 넘게 황제와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수많은 방문객으로 떠들썩했고, 밤에도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룡세가는 너무 조용했다. 원나라가 하북까지 밀린 이후에는 마룡세가를 찾는 사람들도 완전히 끊겼고, 며칠째 장원에 불이 켜지지도 않았다.

하늘을 보던 잔인잔마는, 달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며 주위가 더욱 어두워지자 때가 되었다는 듯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오늘 마룡세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마룡세가 안에 살아 있는 것은 개미 새끼까지 모두 죽인다. 공격!]

그의 전음이 끝나자 수백 명의 흑영들이 마룡세가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 * *

“태양척살이대가 무림맹에 의해 전멸했습니다.”

“태양철기단 오대 역시 큰 피해를 입고 지금 피신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추적이 집요해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철무정은 태양척살단 단주 요목결과 태양철기단 단주 찰나금의 보고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림 요인 암살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어 갔다. 하지만 무림맹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태양천의 피해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특히 예전과 달리 정보망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소천주님, 안가들이 거의 해체되면서 저희들의 행적을 무림맹에서 알아냈습니다. 이대로 계속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요 단주, 이번 계획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잊었소?”

철무정이 이끄는 태양척살단과 태양철기단의 임무는 무림의 중견 무인들의 제거였다. 어떤 조직이건 굳건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기둥을 형성하는 중견 무인들이 중요했으니, 그들의 계획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실지 그들의 임무는 무림맹의 이목을 끄는 것이었다.

“저희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많은 수하들이 개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천의 원로들이 곧 도착하실 것이니 조금만 더 견딘다.”

그때 안으로 태양척살단 부단주가 들어섰다.

“소천주님,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뭐냐?”

“마룡세가가 멸문했다는 소식입니다.”

“마룡세가가? 혈해사계와의 전투에서 자주 이긴다고 해서 잘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이구나.”

“혈해사계의 유인책에 빠진 모양입니다.”

“유인책?”

“대풍야를 통해 혈해사계가 대규모 이동이 있다는 말에, 정예들을 대풍야로 보낸 모양입니다. 그때 비어 있는 마룡세가의 본진을 혈해사계에서 쳤다고 합니다. 보고로는 가주 이하 마룡세가의 지휘부가 모두 몰살했고, 총단은 불에 잿더미로 변했다고 합니다.”

“쯧! 쯧! 쯧! 혈해사계보다 인원도 적으면서 세력을 둘로 나누다니 미련한 놈들…… 그럼 혈해사계의 피해는 어느 정도라고 하더냐?”

“지금 혈해사계는 대풍야로 갔던 마룡세가의 마지막 전력을 제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는데, 혈추광마 때문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계략에 빠지고 기습까지 당했는데 큰 피해까지 줬다니, 오룡세가의 일원답군. 요 단주.”

“예!”

“원로님들께서 어디쯤 오셨는지 아직 모르느냐?”

“아직 보고가 들어온 것은 없습니다.”

“그래? 마룡세가가 무너졌다면 이제 서쪽까지 본 천에서 막아야 하는데, 큰일이군…….”

철무정은 초조한 표정으로 지었다.

“그리고 소천주님께서 알아보라고 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말해 봐라.”

“일주일간 황도에서 머문 천호무적검이 다시 절강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천호무적검이 잠룡세가의 그 호위 무사 놈이 확실한지부터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알아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전 금령군주께서 그자와 담가 계집의 용모파기를 그려서 현상금 수배를 한 적이 있어서 그것과 대조해 보려고 했는데, 그 전단지도 없다시피 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내가 그놈을 직접 봐야 한다는 말이군.”

대화를 듣고 있던 찰마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호무적검이 근래 소문의 중심지에 있긴 하지만 우리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는데, 왜 그자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많으십니까?”

“아직은 말해 줄 때가 아니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해 주겠다. 그럼 이만 떠난다. 삼 일 후 다음 장소에서 만나자.”

“예!”

대화가 끝난 듯 모두의 모습이 곧 사라졌다.

* * *

남경으로 갈 때는 수십 명의 금의위를 동행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절강으로 돌아가는 지금은 아주 단출했다.

“주군, 일이 잘 풀리신 모양입니다.”

“흑 호법도 그렇게 느끼십니까?”

“저 같은 살수가 황궁에서 그런 대접을 받을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악불군과 담수련은 물론 수행원에 불과한 사화와 흑석영까지, 황궁에서는 과분하다 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다.

“황상과 이런 연결 고리가 생긴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도 되겠지만, 위험 부담도 같이 증가한다는 것은 아시지요?”

“당연하지요. 원래 큰 권력자와 가까이 있으면 권력도 생기지만, 위험도도 권력에 비례해 점점 더 커지는 법이니까요.”

“흑 호법께서 아시니 얘기하기 편할 것 같습니다. 황상께서 저를 단지 예뻐서 우대를 해 주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본 방의 방도들에게 더욱 몸가짐에 주의하라고 하십시오.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당주들에게 잘 얘기하겠습니다.”

가장 까칠하던 흑석영은 근래에는 악불군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좀 쉬고 계십시오. 손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관도 주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노인 한 명을 보자 미소를 지며 말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노인을 향해 말을 몰아가자 은밀하게 따르던 다른 방주 호법들이 마차 주위로 다가와 매복했다.

“어르신께서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노인 앞에 도착한 악불군이 말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를 하자, 노인은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너무 유명해져서 나 같은 거지는 얼굴 내밀기도 힘들구나.”

노인은 개방의 태상호법인 사해신개였다.

“제가 어찌 어르신의 명성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어르신 앞에서 저는 언제나 말학 후배일 뿐입니다.”

“그런 놈이 한 번도 나를 안 찾냐?”

“저도 어르신을 뵙고 인사도 드리고 여러 가지로 의논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럼 왜 안 찾아와?”

“어르신께서는 정파의 최고 어르신 중에 한 분이신데 저 때문에 괜한 오해를 받거나 곤란해질까 걱정이 됐습니다.”

“너 천호방의 방주 아니냐?”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천호방은 정파를 표방한다고 공지했던데?”

“예, 정파 맞습니다.”

“그럼 정파끼리 만나는데 오해할 것은 뭐고, 내가 곤란해질 일은 또 뭐냐?”

“후일 기회가 되면 제가 어르신께 다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용서를 빌어? 너 나한테 죄 지은 거 있냐?”

“직접적으로 지은 것은 없지만…….”

“난 내 밥을 빼앗아 가는 놈 아니면 다 친구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제가 어르신의 밥을 빼앗아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는 안 되고, 내게 대접을 해야지.”

“언제든지 찾아만 오십시오. 그러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접을 하겠습니다.”

사해신개는 마차를 슬쩍 보더니 물었다.

“잠깐 대화할 수 있겠냐?”

“예, 시간 있습니다.”

“정파를 표방하면서 무림맹과는 전혀 연계를 하지 않더구나?”

“무림맹에 제가 아는 분도 없고, 어떻게 연계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아는 사람을 소개해 주고 연계할 방법을 알려 주면 연계하겠냐?”

“정의를 수호하고 협을 행하는 일에는 언제라도 도움을 드릴 생각입니다.”

“음…… 도움은 주지만 무림맹에 들어올 생각은 없다, 그 말이냐?”

“어르신께서는 제가 무림맹에 입맹하기를 바라십니까?”

악불군의 반문에 사해신개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 생각은 아니지만 누구 부탁을 받았다.”

“거절할 수 없는 분인 모양이군요?”

“내가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다. 혹시 만진선생 제갈우명이라고 들어 보았느냐?”

“천하제일지자라는 말을 듣는 분 아니십니까?”

“천하제일인지는 모르지만 보통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나보다 어린 그 친구를 존경하는 이유는, 머리보다는 모든 일을 조금의 치우침도 없이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그 성품 때문이야.”

“어르신께서 존경할 정도라니 저도 한번 뵙고 싶군요.”

“보고 싶다라……. 결국 무림맹에 들어올 마음은 없나 보구나?”

“제가 무림맹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생겼습니다.”

“생겼다? 이유가 갑자기 생겼다는 말인데, 그럼 혹시 이번에 황상과 만난 것 때문이냐?”

“약조 때문에 지금 말씀은 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무림맹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절도 미워하기 어렵게 거절하는구나?”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천호방을 어느 정도까지 키울 생각이냐?”

“무슨 의미이신지?”

“절강을 총단으로 삼고 강서북부를 분타로 삼았다. 네가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 세력권으로 삼은 지역은 대단히 중요한 지역들이다. 거기다 신생 문파의 세력으로 보기에는 너무 커.”

“그런가요?”

“작게 시작해서 점점 넓혀 가는 과정에서 적도 생기고 우군도 생기면서 합종연횡을 하며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순리지. 그런데 너 같이 갑자기 큰 세력권을 형성하면 우군은 없고 적만 생길 수가 있다. 거기다 우군이 될 수 있는 무림맹의 가입마저 거절한다면 정파까지도 적이 될 수 있다.”

“개방은 그래도 제 편이 되어 주실 것 아닙니까?”

“나는 네 편이 되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개방은 이미 무림맹의 일원이야. 무림맹에서 천호방을 적대시한다면 개방 역시 적대는 안 해도 도울 수 없다.”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이 결심한 듯 말했다.

“누가 저를 적으로 삼건, 그건 상대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상대가 옳은 일을 하느냐 불의한 일을 하느냐로 적을 정합니다. 전 저와 적이 되는 행동을 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해신개는 악불군의 신념에 가득 찬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탄성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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