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37화>
237화. 격동하는 천하(2)
“군산에는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요. 전 각 섬에 연공실을 준비하고 각 문파에서 영웅대회에 나갈 분들을 선별한 후 이곳에 모여 수련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웅대회의 일정이 확정되면 무림맹 자체적으로 비무를 열어, 미리 어느 정도 순위를 정한 뒤에 대회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제갈우명의 제안에 모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림맹 내에서 수련을 하고 자체적으로 비무를 한 후 검증된 자들만 무림 영웅 대회에 나간다면, 마도나 사파에게 방해받을 기회를 원천 차단하고 정파끼리 생사를 겨루는 싸움을 피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묘안이었다.
하나, 묘안이 모두에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정파에서는 자파의 무공에 대해 강력한 폐쇄성을 유지했다. 무공을 수련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할 정도로 큰 죄가 되었다.
거기다 폐관을 할 경우에는 익히고자 하는 자파의 무공 비급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문파의 최고수가 비급까지 가지고 나와 밖에서 수련한다는 것은, 무림맹에서 아무리 개인적인 연공관을 준비해 준다 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휴우~ 예상대로구나…….’
제갈우명은 전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그의 제안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속으로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제갈우명이 다시 말했다.
“이 문제는 조금 더 많은 분들의 의견을 취합한 후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사안에 대해 질문해 주십시오.”
결국 찬성도 반대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의 남궁세민입니다. 여기에 보면 영웅대회에서 여섯 분을 뽑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패는 먼저 하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중 세 분은 누구라도 짐작하실 겁니다. 황상 역시 무림 사정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니 그런 결정을 하셨을 거구요. 그런데 나머지 한 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군사께서는 그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남궁세민의 질문은 사실 모두가 의아해하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천제무황을 비롯한 무황들은 누구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인 천외천의 인물들인지라, 모두는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우명조차 즉답을 하지 못했다.
황궁에서 보내온 서찰에는 먼저 하사할 네 개의 황룡무패를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세 명의 무황이 받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만약 그 셋 중 누구라도 빠진다면 황룡무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하나인데, 제갈우명은 짐작이 가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오직 추정만으로 말하기는 힘들었다.
“저도 거기에 대해서는 받은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황실에서 결정한 것이니 허투루 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다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 합니다.”
“제갈 군사 같은 분이 전혀 짐작이 가는 인물도 없다는 말입니까?”
남궁세민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짐작만으로 말한다면 열 명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입니다. 짐작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것이지요.”
제갈우명의 답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인 천제무황과 황제까지 연루된 사안에 짐작으로 뭔가를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개방의 헌원신개입니다. 저번 회의에서 부역자 제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한 후 알려 주신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계획은 마련되긴 한 건지, 아니면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명분상 대외적으로는 중원을 배신하고 원나라를 도운 부역자 처벌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기고 떠도는 여러 문파들의 재건을 위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나라에 의해 원나라가 물러나면서 소림파는 이미 숭산의 본사를 장악하고 문파에 대한 정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방은 아직 총단이 있는 개봉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궁가방의 전력이 아직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역자들의 징치는 무림맹이 세워진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당장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도 퇴로를 열어 주면서 몰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생결단식으로 덤빌 수가 있으니까요. 분명 말씀드리지만 한두 달 안에 그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본 노개가 걱정하는 것은 영웅대회로 인하여 본 맹의 가장 중요한 계획에 문제가 생길까 하는 것입니다.”
헌원신개의 말에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개방과 달리 부역자 문제가 문파의 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은 문파는, 이미 부역자보다는 영웅대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부역자 척살이 시작되면 각 문파에서 최고수들이 앞장을 서야 했다. 원나라는 물러났지만 부역을 했던 세력들은 여전히 전력을 유지한 채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웅대회를 준비하는 각 문파는 고수들이 부역자 소탕에 나서는 것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황상이 제대로 우리에게 한 방 먹였군. 누구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자로군…….’
제갈우명은 주원장이 무림을 견제하기 위해 분명 일을 벌일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웅대회는 정말 조금도 예측 못 했던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모두를 보며 심란한 표정을 짓던 제갈우명은 천제무황을 슬쩍 보았다.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던 천제무황은 남궁우명이 자신을 보자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만 회의를 파하라는 의미였다.
결국 전체 회의는 제대로 된 의제 하나 확정하지 못했고, 심지어 당면한 문제들 역시 제대로 의논조차 못 한 채 파하고 말았다.
* * *
[방주님, 예상대로 저희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보고입니다.]
강소성을 지나 절강에 들어선 악불군은 사효조의 전음을 받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몇 명이나 됩니까?]
[대충 열 명 정도 됩니다.]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습니까?]
[정면으로 싸운다면 일대일로는 제가 이기기 힘든 고수들입니다.]
[도대체 그자들의 정체가 뭐기에 그런 고수들이 계속 나타날까요?]
[분명한 것은 알려진 세력이 아닙니다.]
[어찰단이나 태양천에서 정말 이자들을 몰랐을까요?]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 호법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 절대 그자들 가까이는 가지 마십시오.]
[예, 저도 주의를 주었습니다.]
[최 호법.]
[예, 방주님!]
악불군의 부름에 최욱걸이 급히 답했다.
[가장 가까운 천호방 분타로 달려가 방도들 백 명 정도 끌고 우리를 마중 나오라고 하십시오.]
악불군은 지금 또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악불군을 쫓는 자들이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것을 느끼자, 방도들 백 명 정도를 불러 호위를 하게 하여 그들이 스스로 공격을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최욱걸이 사라지자 악불군은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또 그자들 같습니다.]
주원장과의 면담을 끝내고 계속 후속 조치에 대한 계획을 짜던 담수련은, 악불군의 전음을 받자 창문을 살짝 열며 물었다.
[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자들과 한편 맞아?]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 너무 멋있다…….]
대화와 완전 동떨어진 뜻밖의 말에, 악불군은 의아한 듯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신지?]
그러자 담수련은 얼굴이 발개지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잠시 딴생각했어. 도대체 그자들의 정체가 뭘까? 이렇게 고수들이 많은 것을 보면, 지금까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
[제가 보기에 현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은 이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 구슬 말이야? 장보주라고 했지?]
[예.]
[그걸 한번 자세히 살펴봐. 아무래도 거기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가씨께서 직접 보시겠습니까?]
[난 무공이 약해서 자세히 살피기 힘들어. 소군이 샅샅이 살피고, 이상한 것을 발견하면 그때 내게 말해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자들 어떻게 처리할 거야?]
[굳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가까운 분타에서 방도들을 오라고 했습니다. 수가 많아지면 함부로 덤비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하긴……. 그자들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최대한 종적을 숨긴 것으로 미루어,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극구 피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게 할까요?]
[어떻게?]
[추적을 잘하는 자들이 본 방에는 아주 많습니다.]
백인막을 그대로 흡수한 천호방은 천하에서 가장 많은 추적자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자들의 무공이 너무 강해. 추적을 시켰다가 걸리면 살아서 도망치기는 거의 불가능할 거야. 적설을 이용하면 안전하지 않을까?]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설이 원래 그들의 것이었는데, 적설을 이용하다가 오히려 다시 그들 편이 될 수도 있어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하긴 그런 문제가 있네……. 알았어. 우선 두고 보자고. 어쩌면 그들이 내 계획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악불군이 다시 정면으로 말을 몰아가려 하자 담수련이 급히 불렀다.
[소군.]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야. 그냥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그랬군요.]
그녀의 말에 악불군은 이상하게 붕 뜬 듯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총단에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늦어도 모레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힘 안 드니까 걱정 마. 난 소군이 며칠째 말만 타고 있어서 소군이 더 걱정인데…….]
[저도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힘이 들어도 아가씨를 보면 금방 힘이 나기도 하고요.]
분명 심각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들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위하는 달달한 대화로 변해 버린 둘이었다.
* * *
‘자연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인공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객잔에 멈춘 악불군은 담수련과 사화가 방에 들자 그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담수련의 말대로 정보주를 꺼내 불빛에 비춰 보았다.
장보주는 구슬 자체만으로 보면 큰 가치는 없어 보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야명주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귀물(貴物)도 아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구슬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이었다. 아무리 살펴도 이어붙인 흔적은 없었다. 어떻게 구슬 안에 그림을 그렸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불빛에 한참을 비춰 보던 악불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고철황이 이것을 훔친 후, 그자들은 구천마성의 호법들과 맞먹는 고수를 여러 명 동원해서 추적했다. 심지어 영물인 적설까지 사용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절실하게 회수를 원했다면 이 구슬의 가치가 금자로 수십만 냥이 나가거나, 아니면 중요한 뭔가가 구슬에 있어야 했다.
‘금자 천 냥 가치도 안 될 거야. 결국 이 안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건데 전혀 보이는 것이 없네?’
그림을 자세하게 살폈지만 거기에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부숴 볼까? 아니야, 좀 연구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부수는 것이 맞는 순서야.’
한 시진 넘게 장보주를 조사하던 악불군은 깨 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슬을 부수고 안을 살피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아무래도 내 머리로는 어려울 것 같군……. 아가씨께 도움을 청해야겠어.’
다시 반 시진을 더 투자하며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 알아낸 그는, 포기한 듯 구슬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탁자가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지 구슬이 탁자 위로 구르기 시작했다.
떨어지기 직전 구슬을 받아 낸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