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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38화 (238/472)

<천검지애 238화>

238화. 혈교(1)

‘이 방법을 생각 못 했군!’

지금까지 악불군은 구슬 속의 그림과 표면에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무언가를 찾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런데 굴러가던 구슬이 불빛 앞을 지나면서 순간적으로 벽에 특이한 그림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악불군은 등잔을 앞에 놓고 그 뒤로 구슬을 놓은 뒤 방향을 바꿔 가며 벽에 만들어지는 그림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무수히 많은 그림을 만들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몇 번 해 보고 포기했을 정도로 지루한 작업이었다. 거기다 그것이 진짜 답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육관에서도 교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치지 않는 끈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방향과 각도를 바꿔 가며 만들어지는 수많은 그림을 머리에 담던 그는, 어느 순간 움직이던 구슬을 멈췄다. 이미 한 시진이 넘게 지난 후였다.

‘지금까지 동물로 보인 그림이 열아홉 개, 나무는 열 개, 산은 스물네 개, 그리고 지도로 보이는 그림이 여섯 개였어. 그중 이 그림이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 같은데?’

한 시진 동안 찾은 그림자는 거의 이백 개에 달했다. 대부분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그림 사이에서 나름 뭔가 유추가 가능한 그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의 기억력만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었다.

장보주를 다시 품에 넣은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림들을 종이에 그리기 시작했다.

* * *

[저놈들을 감시하기로 한 혈성은 왜 안 보이는 거야?]

[난 아무래도 뭔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악불군이 머무는 객잔이 훤히 보이는 나무 위에 자리 잡은 혈수와 혈창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악불군을 제거하라는 교주의 명에 따라 혈궁을 나온 인원은 혈공자 둘과 혈궁전사 이십 명이었다.

보고된 악불군의 무공을 기반해 죽일 수 있는 전력을 보낸 것이었다.

물론 먼저 보낸 혈성을 비롯한 세 명의 혈공자와 두 명의 혈낭자가 합세한다는 전제하에 계산된 전력이었다.

한데 막상 악불군을 찾아오니, 있어야 할 자들이 한 명도 연락이 안 되고 있었다.

[만약 혈성과 혈기 등이 당했다면 우리만으로는 저놈 못 죽인다.]

[어차피 공격은 틀렸어. 마차하고 서너 명의 호위만이라고 했는데, 객잔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의 수가 백 명에 가깝다.]

[결국 거기로 가야 하나? 거긴 가기 참 싫은데.]

혈수는 어디를 말하는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처리를 못하는 이상, 방법이 없잖아.]

둘은 아깝다는 듯 객잔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몸을 날렸다.

* * *

“이게 뭐야?”

식사를 마치고 마차에 탄 담수련은, 악불군이 종이 뭉치를 건네자 의아한 듯 물었다.

“어제 장보주를 이리저리 비추다 발견한 그림들을 그린 것입니다.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몰라서 아가씨께서 한번 봐 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종이를 받은 담수련은 악불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소군, 이미 다 알면서 괜히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정말 몰라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난 아닌 거 같을까? 가끔 소군의 머리가 나보다 더 뛰어난 것 같거든?”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그런 생각은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소군의 생각이 나보다 더 나을 때도 많았는데,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확신이 아니라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사실 아가씨께서 안 계시면 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무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담수련이 자신보다 낫다며 칭찬만 하는 악불군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악불군이 그녀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소군도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거든!”

“그래도 아가씨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추국이 안 되겠는지 슬쩍 나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제가 보기에는 두 분 다 맞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건 두 분만 계실 때 결론을 내시고, 지금은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추국의 말에 고개를 돌린 담수련은, 사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살짝 발개지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잘 모셔라.”

“예~”

사화에게 어색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 악불군은 말을 몰아 선두로 나갔다.

천호방이라는 쓰인 깃발을 높이 단 마차 주위를 백 명이 넘는 천호방도들이 호위하며 움직이는 모습은 예전 잠룡세가의 담무룡이 행차할 때의 위세를 다시 보는 듯했다.

“절강은 완전히 천호방의 손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주루 창가에서 천호방의 행렬을 유심히 보고 있던 중년 무인이 앞에 앉은 노인에게 말했다.

“황보 대협.”

“예.”

“천호방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까?”

“젊은 나이에 너무 고수라는 거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천호방의 방도가 무려 천 명이 넘는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대충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충 계산해도 한 달에 금자 만 냥 이상은 필요합니다.”

“방도 한 명당 매달 은자 한 냥씩은 들어갈 거고 거기에 식비와 의복, 망가지는 무기들도 계속 보충해야 할 테니 진짜 그 정도는 들어가겠군요.”

“도창에 분타를 가졌고 항주에도 총단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총단은 금자 이만 냥을 주고 샀다고 하더군요.”

“어르신께서는 그 자금 출처가 수상하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것 같군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젊은 고수도 사실 아주 특이한 경우지요. 그런데 그 고수가 돈까지 많습니다. 무공은 산속 깊은 곳에서 익히고 나와서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돈은 절대로 갑자기 나타날 수가 없지요.”

“하긴 저희 황보세가만 해도, 지금은 몰락했지만 예전에는 커다란 자체 상단을 가지고 있었지요.”

“제가 알아보았는데, 천호무적검은 어떤 상단과도 연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황보 대협께서는 아직까지는 절강의 책임자이십니다. 대협의 보고서는 제갈 군사님께서 신뢰하실 것입니다.”

황보 대협이라 불리는 중년인은 무림맹의 절강 책임자인 백룡신권 황보준백이었다.

악불군만 아니었다면 무림맹 분타를 커다랗게 세우고 분타주로서 절강에서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을 그였지만, 지금은 허울뿐인 책임자였다.

지금 그의 임무는 천호방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보이면 즉시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짓 보고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짓을 보고하라는 것이 아니라, 수상한 점을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황보준백은 의아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며 물었다.

“종산은자 선배님, 혹시 천호무적검과 악연이라도 있으십니까?”

노인은 뜻밖에도 담수운을 조종하던 종산은자였다.

“만난 적도 없는데 악연이 있을 턱이 있겠소? 다만 노부의 경험상 대단히 위험한 자라는 느낌이 와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럼 선배님께서 직접 보고서를 올리시지 그러십니까?”

“노부의 지위나 임무상, 앞으로 나서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영웅회 때 얘기지요. 이제 원나라도 북으로 밀려 나갔고, 어찰단도 없습니다. 선배님께서 그동안 세운 공이 얼마나 큰데 계속 음지에 계신단 말입니까? 제갈 군사님께서도 선배님의 공은 인정하실 겁니다. 찾아뵙고 이제 떳떳하게 지위도 받으시고 보고도 직접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노부의 말대로 보고서를 올려 주십시오.”

“천호방주가 꽤 멀리 간 것 같습니다. 전 그들의 뒤를 따라야 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선배님께서 보고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정리해서 제게 주십시오. 제가 검토한 후에 맞다 생각되면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항주로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예,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황보준백이 주루를 나가자, 종산은자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인이 앉았다.

“얘기는 잘되셨습니까?”

“해 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황보준백은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협의심이 많아 제갈우명이 매우 신뢰하는 무인 중 한 명이니, 그가 보고서를 올린다면 분명 신중하게 검토할 겁니다.”

“그런데, 담수운까지 보고서에 올린다면 저희가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담수운이라는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겠지요.”

“그럼 분명 죽이자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담무룡의 아들입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자이지요.”

“하지만 영웅회를 도왔습니다.”

“정파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집일 뿐입니다. 정의와 협의를 위해서는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다고 봅니다. 거기다 담수운은 그럴 가치도 없는 자이지요. 종산은자께서는 제가 시킨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종산은자는 그래도 마음 한편에 큰 부담을 느끼는 듯 무겁게 답을 했다.

* * *

“내가 보기에 이 그림들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 같아.”

점심을 위해 주루에 들른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그림을 펼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전부 다야?”

“제가 의미가 있다고 느낀 것들만 그린 겁니다. 다른 그림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럼 같이 봐야겠다.”

“뭐가 미진합니까?”

“확실치는 않아.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이 그림들 봐 봐. 약도 같지 않아?”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지역의 약도인지를 모르면 어떻게 찾겠어? 장보주가 이름 그대로 구슬에 그린 장보도라면 분명 그 안에 또 다른 단서가 있을 거야.”

“그럼 총단에 도착하면 같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 그림들은 소군이 갖고 있어.”

“예.”

악불군이 그림들을 품에 넣자 담수련은 조그맣게 다시 입을 열었다.

“소군.”

“예.”

“이번 황상과의 만남으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다 얻었어. 그렇게 쉬울 줄은 몰랐는데, 전부 다 소군을 황상이 잘 본 덕분이야.”

“그것보다는 아가씨께서 제게 말씀해 주신 것이 너무 주효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가씨 덕입니다.”

“…….”

“…….”

말 없이 서로의 눈만 보며 침묵하던 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 그냥 우리 덕이라고 하자.”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후속 조치가 필요해.”

“어떡할까요?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고 장로님께서 가져오신 정보들을 분석하면서 몇 가지 생각한 것이 있어. 뭐냐면, 잠룡세가를 미워하는 세력들은 대부분 절강성에서 가까이 있던 문파들이야.”

“당연히 그러겠지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우군이 필요해.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는 우군을 구하기 힘들어. 어떻게 얻었다 해도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 들어가면 당장 적으로 변할 거야. 하지만 멀리 있다면 좀 달라질 거야.”

“멀리라고 하시면?”

“사천.”

“사천이요? 거긴 너무 멀지 않을까요?”

“사천 지역의 무림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세력은 태룡세가야. 그들에게 억압을 당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사천은 여전히 수복이 안 됐어.”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사천으로 원정을 갈 거야.”

“이유 없이 가면 백안시할 텐데요?”

“이유를 만들어야지. 그리고 사천에 도착하면 즉시 태룡세가를 공격하는 거야. 천호방에서 태룡세가를 제거하고 사천을 원래 사천 무림 세력에게 돌려준다면, 그들은 분명 우리의 원군이 될 거야.”

“…….”

악불군이 즉답을 하지 않자 담수련의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소군은 내 생각이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순간 이크! 한 악불군이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너무 놀라운 생각이라, 잠시 감탄하느라 답을 못한 것뿐입니다.”

“아닌데? 나를 거기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거 아니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실지로 그가 답을 안 한 것은 그녀가 걱정되어서였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그녀를 편하게 해 주고 있는데, 다시 사천으로 간다면 그녀는 힘든 마차 생활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를 두고 가면 되지만, 그것은 그나 담수련이나 아예 머리에 있지 않았다.

“걸렸다기보다는 아가씨께서 힘드시지는 않을까 잠깐 걱정은 했습니다.”

“내가 소군하고 천하를 유람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었지?”

“그러긴 하셨지요.”

“이번은 사천지역을 유람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내가 책에서 봤는데, 사천은 중원과 또 다른 특색이 있다고 하더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천에 가기 전에 하나 더 해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악불군은 담수련의 표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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