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40화>
240화. 동정어옹(1)
“중원에 무림사기라고 불리는 네 명의 은거기인이 있습니다. 물론 진짜 은거는 아니고, 어찰단의 등쌀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거하신 분들이지요. 무공은 모두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렸으니 초절정 고수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 무림사기 중 대형으로 불리는 분이 동정어옹 동방 대협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은 왜?”
“그분께서 며칠 전에 본 방에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오신지는 아십니까?”
“본 방에 입방하고 싶으시다는군요.”
백대고수에 드는 초절정 고수를 보유한 문파와 그렇지 못한 문파는 그 위상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추명혼과 흑석영의 무공은 당연히 백대고수급이었고 다른 십영들도 거기에 버금간다 할 정도로 대단한 고수들이긴 했지만, 그들은 명호조차 없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전력상으로는 대단한 힘이 될 수 있지만, 문파의 위상을 높이는 데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사기로 불리는 동정어옹이 방도가 된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런 분이면 받아주겠다는 문파가 많을 텐데요?”
“당연히 들어가겠다고만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분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방파에 속해 본 적이 없던 분입니다.”
“받아들이세요.”
듣고 있던 담수련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무림사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 분은 방에 들어오는 자체로 좋은 거예요.”
“그분의 배분이나 무림에서의 명성을 생각하면 어떤 지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철황과 동정어은의 명성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까지는 아니지만 대단히 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수석 장로라는 것이 좀 걸리는 그였다.
“장로 지위를 드리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네요.”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서운객잔에 머물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셔 올까요?”
“아직 방도가 되신 것은 아닙니다. 후배인 제가 찾아뵙는 것이 예의겠지요.”
“방주님께서 직접 찾아가시게요?”
“방도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 정도의 명성을 가지신 분이면 직접 얼굴을 뵙고 대화를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을 이해는 하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방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수련이 누구인가…….
악불군의 마음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그녀답게, 즉각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좋아요. 저도 같이 가요.”
“당연히 같이 가셔야지요.”
* * *
객잔에 딸린 주루는 식사 시간이 지나서인지 상당히 한가했다.
창으로 항주의 광경을 보던 동방소령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동정어옹을 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이곳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한 것 같지 않아요?”
“너도 그렇게 느꼈느냐?”
“악양은 물론 동정호 근처의 도시들은 대부분 대감도를 들고 설치는 작자들 때문에 굉장히 시끄럽잖아요? 상인들도 언제나 긴장을 하고 있고요.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표정이 굉장히 편해요.”
잠룡세가를 멸문시킨 천호방에 감히 대항할 세력은 항주에는 없었다.
담무룡은 소소한 흑도 왈패들은 그냥 놔두었다. 그들은 때가 되면 벌어들인 돈을 상납하기도 했고, 그들을 이따금 징치하는 척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달랐다. 항주에 총단을 세운 이후,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양민들에게 보호세를 뜯던 흑도 왈패들을 소탕한 것이었다.
특히 도박장은 아무리 작게 하더라도 걸리면 큰 벌을 주었고, 염왕채를 하는 자들은 다시는 절강에 발을 붙일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 거지를 만들어서 쫓아냈다.
당연히 염왕채로 고통받던 양민들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좋은 무림 세력이 들어서면 양민들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동정어옹은 양민들을 정말 편하게 살게 했던 한 무림 세력을 머리에 떠올렸다.
동방소령은 사람도 없는 동정호반 깊숙한 곳에서 수련과 낚시만 하던 오두막을 떠난 것이 너무 좋은지, 얼굴에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계속 밖으로 보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동정어옹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정말 천호방에 들어갈 거예요?”
“넌 언제나 도시 생활을 소망했지 않느냐? 항주는 악양 못지않은 큰 도시이니, 이 할애비가 천호방에 들어가면 너도 여기서 생활할 수 있으니 좋지 않으냐?”
“당연히 저야 좋긴 한데, 너무 뜬금없으니까 그렇지요. 저한테는 이유를 말해 줘도 되지 않아요?”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궁금해하지 마라. 그리고 누가 오더라고 아무 말 말거라. 잘못 말해서 안 되면 다시 동정호로 돌아가야 한다.”
“절대로 입 안 열 거예요.”
동방소령은 동정호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에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입을 꾹 닫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할아버지! 저 오빠, 그때 악양에서 봤던 그 오빠 맞지요?”
동방소령의 말에 고개를 돌린 동정어옹은, 말을 탄 두 명의 청년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한 명은 악불군이었고, 또 한 명은 남장을 한 담수련이었다.
“부를지 올지 궁금했는데 오는 것을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은 것 같구나.”
“할아버지께서 기다린 사람이 저 오빠예요?”
“소령아, 네 나이 열세 살이면 어린애가 아니다. 아직 모르는 남자에게 오빠라고 호칭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 열여덟은 된 줄 알아요.”
그녀의 말대로 열세 살의 나이치고는 키도 크고 상당히 조속해 보였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별로 좋은 거 아니다.”
“피!”
“오시면 공손하게 대하거라. 오빠니 뭐니 하면서 무례하게 굴면 동정호로 돌아갈 수 있어.”
“알았어요!”
동방소령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동정호로 돌아간다는 말에 급히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닫았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며 미소를 지은 동정어옹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악불군과 담수련이 계단을 올라왔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동정어옹이 자신들이 올라오는 순간에 맞춰 일어나 포권을 하는 것을 보자 급히 그 앞으로 다가가 같이 포권을 했다.
“어르신께서 일어나 저희를 맞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동정어옹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림에서는 명성과 실력이 높은 사람이 어른이지요. 앉으십시오.”
“그래도 연세가 저보다 훨씬 많으시고 배분도 높으신데 어찌 제가 먼저 앉겠습니까? 어르신께서 먼저 앉으십시오.”
“나이야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먹는 것이지요. 그리고 배분은 누가 높은지는 아직 모르지요. 그래도 오늘은 첫 만남이니 노부가 먼저 앉겠습니다.”
순간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배분이 누가 높은지 모른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어르신의 명호를 듣고 누구신지 기억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뵈니 예전에 악양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방어옹이 자리에 앉자, 악불군은 둘을 번갈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저희들과는 그냥 스치듯이 한번 본 것밖에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기억을 하십니까?”
동정어옹은 악불군이 자신을 본 것을 기억하자 놀란 듯 반문했다.
“소낭자께서 갑자기 소리를 치며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희 뒤를 꽤 오래 따라오셨지요?”
“그런 적이 있었어요?”
담수련이 전혀 몰랐다는 듯 물었다.
“예, 당시는 저희를 추적하는 자들이 많아 꽤 긴장해서 경계하던 때라 기억을 합니다.”
“그렇다 해도 노부와 손녀는 멀리서 천천히 따라갔는데 그것을 감지하셨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동정어옹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말하자 악불군이 곧장 말을 받았다.
“느껴지는 기운이 대단히 청명해서 더욱 기억에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 방에 입방하겠다고 오셨다던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방주께서는 무림이 원나라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금나라와 원나라가 번갈아 중원을 유린할 때, 무림의 상황은 사실 원나라 때보다 더 안 좋았습니다. 약간의 이권에도 사파와 마도는 물론 정파까지 서로 나눠 먹기 위해 협잡질을 일삼았고, 양민들에 대한 수탈도 엄청 심했습니다. 아마 중원 무림 역사상 무림인들과 양민들 간에 가장 사이가 안 좋았을 때가 바로 원나라의 침공 직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원나라 때가 더 좋았다는 겁니까?”
“정치적으로 원나라는 너무 폭압적으로 나라를 다스렸기에 전체적으로 좋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무림인들이 양민을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대폭 줄었습니다. 무림인들은 태양천과 어찰단을 상대하기에 바빴고, 실질적으로 무림을 다스리던 오룡세가는 무림인들에게는 잔혹했지만 양민들에게는 오히려 너그러운 편이었으니까요.”
뜻밖의 말에 악불군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그동안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에 놀란 듯했다.
“어르신은 무림사기의 일인으로 정파인들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를 생각하지 않고 무림인으로서의 느꼈던 점을 말한 것뿐입니다. 노부가 존경하던 한 분께서는 강한 자는 그 강함을 약한 자를 보호하는 데 사용해야지, 괴롭히는 데 쓰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지요.”
“어떤 분이신지는 몰라도 진정한 무인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천호방의 방훈이 ‘양민과 더불어 산다’라는 말을 듣고 방도가 되시기로 하신 것입니까?”
“방훈이 ‘양민과 더불어 산다’입니까? 허허허~ 정말 신선하고 무림 세력으로는 파격적인 방훈이군요. 물론, 노부는 그 방훈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럼 그것도 아니라면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정어옹은 갑자기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악 방주님과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노부의 손녀와 잠시 저쪽 자리로 옮겨 주실 수 있겠소?”
“이분은 절대로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악불군이 단번에 거절하자 담수련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小) 동생, 우리 저쪽으로 자리를 옮길까?”
“앉아 계셔도 됩니다.”
악불군이 말했지만 담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방주님께서 아무리 저를 믿는다 해도, 제가 계속 있는 것은 여기까지 찾아오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동방소령은 담수련의 소 동생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 듯 살짝 아미를 찌푸렸지만, 선선히 일어나 담수련과 함께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방주님께서 대단히 아끼시는 분 같은데, 노부가 큰 결례를 한 것은 아닌가 싶군요.”
“아닙니다. 자리를 옮기신 것은 스스로의 결정이시니 마음에 두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말씀해 주시지요.”
동정어옹은 악불군이 가슴에 품고 있는 검을 유심히 보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전음을 날렸다.
[그 검은 어떻게 취득하셨습니까?]
[……이 검에 대해 아십니까?]
순간 깜짝 놀랐으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악불군이 반문했다.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혹 말하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제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주셨습니다.]
동정어옹은 악불군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듯 다시 말했다.
[누구에게 언제 얻었다는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노부가 알고 싶은 것은 그 검을 봤을 때의 느낌이 어떠셨는지입니다.]
[그것을 알고 싶으신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예, 방주님의 답을 들은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악불군은 자신이 천륭검을 잡았을 때의 상황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대단히 좋은 무기들을 많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게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고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 검 앞에 섰을 때……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검이 제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잡아 달라고요.]
[저, 정말입니까?]
악불군의 말을 들은 동정어옹은 감격한 말투로 반문했다.
‘점점 이해를 못 하겠군.’
악불군은 뜻밖의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