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41화 (241/472)

<천검지애 241화>

241화. 동정어옹(2)

악불군은 동정어옹을 자세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공이 아주 정순해. 이런 기를 가진 분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거지?’

[지금 어르신의 행동이 저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악불군의 말에 동정어옹은 미안한 표정을 지며 다시 물었다.

[노부의 행동이 너무 뜬금없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지금 묻는 것이 노부에게는 정말 중요합니다.]

[더 물을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 가지고 계신 검이 천륭검이란 것은 아십니까?]

이어지는 말에 악불군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무림에 나온 뒤, 자신의 검과 무공을 알아보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천륭검을 알아보다니…….

[강호에 나와 제 검을 알아보신 분은 어르신이 처음입니다.]

[천륭검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군요. 그럼 천륭검보도 익히셨습니까?]

여간해서는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는 악불군의 눈이 커졌다.

[음…… 쉽게 답하긴 어려운 질문이군요. 그 답은 이유를 들어야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기어검을 사용한다는 말에 제 짐작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지켜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계속 들려오는 소문을 확인하고서, 방주님께서 천륭검보를 익혔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천륭검가의 노복입니다.]

악불군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그는 천륭검가가 대공이 이끄는 태양천과 오룡세가의 연합 세력에게 멸문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동정어옹이 진짜 천륭검가의 노복이라면 그는 동정어옹의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천륭검보와 천륭검은 천륭검가가 멸문할 때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천륭검가의 원수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천륭검가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천륭검가가 세워진 것은 일백 년 전입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천륭검가는 존재했습니다. 다만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지요. 천륭검가는 일인 전승 문파입니다. 그리고 전승이 될 때마다 새로운 문파를 세워 왔습니다.]

사실 천륭검가의 뿌리는 대단히 오래되었다. 물론 그때의 이름은 천륭검가가 아니었다.

육백 년 전 고금 최고의 검수로 불리던 천상검문의 문주 천상검신은 천상무오검식이라는 전설의 검식으로 천 년마교의 침공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싸움 이후 천상검신은 사라졌고, 천상무오검식 역시 실전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일인 전승으로 계속 계승되어 왔는데, 그것이 후대에는 천륭검보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륭검보는 원래는 천상무오검식인 것입니까?]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천륭검보는 익히는 분들께서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식으로 초식을 만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제 짐작이 맞다면 방주님께서는, 검황으로 불리시던 천륭검가의 가주님께서 펼치시던 검식과는 완전히 다른 검식을 펼치고 계실 것입니다.]

악불군은 천륭검보의 각 장에 적힌 자세를 조합한다면 무수한 초식을 만들 수 있음을 이젠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천륭검가의 원수라면 어쩌시렵니까?]

[저희는 천륭검과 천륭검보를 익힌 분을 주군으로 모실 뿐, 그 외 다른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마도의 인물이 천륭검보를 익힌 후 사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천륭검보를 익혔으니 주군으로 모신다는 것입니까?]

악불군은 매우 못마땅한 듯 물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동정어옹의 말은 의외였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애초에 천륭검보의 무공은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익히지 못합니다. 설혹 어찌저찌 익힌다 해도, 대성하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집니다.]

[그럼 어르신께서는 제가 천륭검과 천륭검보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동안 계속 방주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신이 생겼기에 방도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다른 노복들에게 알리기 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어르신 같은 분들이 더 있다는 말입니까?]

[저와 비슷한 무공을 지닌 노복들이 총 사십 명 정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림사기처럼 무림에 명성을 떨친 자도 있지만, 아예 무림에 나오지 않고서 주인님께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노복들도 꽤 됩니다.]

“허!”

악불군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동정어옹 같은 고수가 사십 명이라면, 천호방은 천하제일방이라는 말을 들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막강한 전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륭검가를 멸문시키는 데 일조를 한 담무룡에게 그것을 전해 받은 점이, 그들을 당장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담수련의 전음이 들려왔다.

[소군, 내 말 안 잊었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대로 무조건 그분 잡아. 내가 보기에 보기 드물게 충후한 분이야.]

담수련은 일부러 악불군의 얼굴이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었다. 그 덕분에,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만으로도 악불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어르신을 방도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지위는 우선 장로로 정하겠습니다.”

악불군은 전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제 숨길 대화는 끝났기 때문이었다.

“오늘 입방한 저에게 장로라는 높은 지위를 하사하신다면 다른 방도들의 불만을 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간부 회의에서 결정이 난 사안입니다. 그리고 본방에 장로님과 호법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만 총단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르신은 손녀분과 항주 구경도 좀 하시면서 유람을 하시다, 됐다 싶으실 때 총단으로 오십시오.”

악불군이 일어나자 동정어옹도 급히 따라 일어나더니 공손히 예를 갖췄다.

“아주 똑똑한 손녀를 두셨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대화를 한 것 같네요.”

악불군과 동정어옹이 전음으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담수련 역시 동방소령과 많은 대화를 나눈 듯했다.

“저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천호방도가 되셨으니, 언니랑 자주 대화할 수 있겠지요?”

담수련은 자신이 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 준 듯했다.

“당연하지. 이제 자주 만나자고.”

담수련도 그녀가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며 말했다.

* * *

“앉으십시오.”

악불군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황보준백은, 종산은자가 나타나자 준비했던 찻잔에 따끈한 차를 가득 부었다.

“아직 내가 좋아하는 차를 기억하고 있었구먼?”

“제가 영웅회에 들어와 선배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데, 좋아하시는 차를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황보 대협이 뛰어난 거지, 노부가 가르친 것이 뭐 있긴 있었겠소?”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만큼 중요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친구들은 비겁하고 치욕스럽다고 다 무시했는데 황보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위로가 됩니다.”

종산은자는 뛰어난 무공으로 영웅회 초기부터 수많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어찰단에서 그를 추적해 죽이려고 했지만 끝내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가 세운 공은 영웅회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그는 최근까지도 첩자와 정탐 등 정파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주지 않는 문파 출신인 그의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선배님께서 알아내신 정보를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보라고 가져왔는데 어찌 못 보게 하겠습니까?”

종산은자는 품에서 두툼한 종이를 꺼내 건넸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황보준백은 살짝 놀랐다. 생각 외로 정보가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정보를 선배님 혼자 모으셨다는 겁니까?”

“노부만 아는 비선 조직의 도움도 받았지요.”

보고서에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정보들도 상당히 많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가던 그의 동작이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며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선배님, 담무룡의 아들이 살아 있었습니까?”

“내가 오 년 가까이 잠룡세가에서 마구간 마노를 해서, 담수운의 얼굴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 살아 있습니다.”

“상단의 총수로 변신해 우리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증거는 있습니까?”

“내가 얼굴을 아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어찌 아직 총단에 올리지 않으셨습니까?”

“원래는 바로 보고하려고 했는데, 의심쩍은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미뤄 두고 있었습니다. 뒷장을 보시지요.”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황보준백은 다음 장을 넘기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자가 만든 상단이 천호방의 협력 세력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내가 몇 번에 걸쳐 조사한 것이니 확실하다고 보아도 됩니다.”

“선배님,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천호방의 방주인 천호무적검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황상의 초대까지 받아 황궁에서 무려 삼 일이나 대접을 받았다는 말은 들으셨지요?”

“듣긴 했습니다.”

“황상께서 호형호제한다는 말까지 했답니다. 그런 그를 담수운과 엮었다가 잘못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무림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부가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황보 대협께 가져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일은 총단에서 직접 조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도창의 대룡상단 총수가 담무룡의 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만약 잘못된 정보라면, 보고한 우리까지 벌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건 틀림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종산은자의 호언에 황보준백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또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천호무적검과 잠룡세가 간에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다면, 천호방이 잠룡세가를 멸문시킨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나도 그 소문을 듣고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멸문시킨 것 자체가 하나의 속임수라면 말이 되더군요.”

“제가 직접 죽은 자들의 시체를 검시했습니다. 상당수는 잠룡세가의 간부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 시신의 수 역시 우리가 파악하고 있었던 잠룡세가의 수와 일치했습니다. 속임수라고 하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 큽니다.”

“솔직히 천호무적검과 잠룡세가 간에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읽어 보시면 노부가 그런 의심을 한 이유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황보준백은 계속 보고서를 넘겨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흐르고 황보준백은 보고서를 덮었다.

종산은자는 황보준백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슬쩍 부언했다.

“증거가 없는 것도 좀 있긴 하지만, 다른 증거가 있는 사안들과 종합해 보면 의심을 할 만한 정황이 많이 나타납니다. 지금 무림이 다시 일어나는 중요한 시점에서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사님께 보고를 올리기에는 증거가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담무룡의 아들이 천호방의 협력 세력으로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면 조사할 가치는 있어 보이는군요. 제가 내일 총단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탁월한 판단입니다. 우린 일 갑자 전에 너무 신중하다가 원나라에 그대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미소를 지며 기뻐하는 종산은자를 보는 황보준백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보고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지만, 악불군에 대해 악의적인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보고서 여러 곳에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종산은자 선배님께서 혼자 만든 보고서가 아니야. 이제 겨우 중원 무림의 재건의 기틀을 간신히 만들어 가는데, 또다시 음모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감정이 황보준백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