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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43화 (243/472)

<천검지애 243화>

243화. 변화(1)

구천마황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마디 했다.

“그렇다고 우리 편이 되지도 않을 텐데,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느냐?”

“그래서 제가 천호무적검과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조약을 맺은 것이 신의 한 수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정파 놈들은 부역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번 기회에 전 무림을 장악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무림과 남무림의 중간을 천호방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무림맹이 남하하려면 천호방을 지나야 하는데, 천호방은 무림맹의 입맹을 거부했습니다. 그 의미는, 천호방 구역을 무림맹이 지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수세에 몰리는 것은 정파가 되었을 것인데, 어쩌다…….”

구천마황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친 것이 통한스러운지 탄식을 했다.

“저희들이 늦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장사성부터 주원장까지 영웅회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제가 판단을 잘못한 겁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마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천마성은 영웅회와 비슷한 시기와 방식으로 주원장을 비롯한 모든 반란 세력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하들을 측근에 배치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반란군의 수장들은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자 그들을 배척하고 정파인 영웅회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대부분 무림인 출신인 그들은, 마도가 배신을 잘하고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영웅회의 힘이 구천마성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하단 사실도, 원나라가 물러나기 전에 북진하여 정파가 사라진 후 무주공산이 된 각 지역을 선점하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구천마황은 만통광심이 고개를 푹 숙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신임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심기일전해라.”

“감사합니다.”

만통광심이 감격한 듯 말하자 구천마황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는 천호방이 무림맹과 한통속이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을 하느냐?”

“성주님께서도 천무성궁이 얼마나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천호무적검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기를 기대할 뿐, 절대로 동등한 자격으로는 협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천호무적검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지금 상황도 상당히 못마땅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천제무황 그놈, 겉은 번지르르하게 정파의 옷을 입고 있지만 야망이 대단하지.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좋겠느냐?”

“다행히 오늘 아침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좋은 소식?”

“예, 화룡세가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반란이 성공했다는 거냐?”

“화정무가 죽었는지 아니면 감금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화룡세가의 가주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화정무가 그렇게 간단하게 당할 놈이 아닌데?”

“화정무의 아들인 화우성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아들이라 마음 놓고 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지요.”

“소가주의 반란이라……. 흔히 일어나지는 않는 일이지만, 없는 일도 아니지. 그럼 지금 화정무의 심복들과 화우성 간에 갈등이 있겠구나?”

“제가 모든 정보망을 가동해 화룡세가의 동태를 살피고 있습니다. 내분의 조짐이 보이는 순간 공격할 생각입니다.”

“그래! 화룡세가만 없앤다면 남무림은 완벽하게 우리가 장악하게 된다. 거기다 최고의 부역 세력을 본 성이 제거했다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지. 우선 화룡세가를 없애는 데 전력을 투구한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마도라 해도 명분은 중요했다.

사실 부역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원나라 치하에서도 계속 활동해 왔던 혈해사계는, 이번에 마룡세가를 멸문시키면서 마치 자신들이 원나라와 계속 투쟁해 온 듯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림맹도 하지 못한 일을 자신들이 해냈다는 자랑이었다. 사실 무림맹은 부역자를 척결하겠다며 일성을 토했지만 아직 오룡세가 중 한 곳도 제거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구천마성은 어찰단을 피해 지하로 숨었기 때문에, 화룡세가만 제거한다면 중원 무림에 큰소리를 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 * *

천호방 대정청은 평소보다 더욱 부산스러웠다.

오늘 새로 장로로 추대된 동정어옹 등을 위해 성대한 잔치상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석 장로께서는 의구심이 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추명혼은 고찰황의 표정이 굳어 있자 다가와 물었다. 그는 고철황이 무림사기의 입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림사기 같이 명성이 높고 존경까지 받는 분이 본 방에 들어오셨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동정어옹 한 분도 아니고 무림사기 네 분이 동시에 입방을 한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좀 의아하기도 합니다.”

악불군을 만나고 사흘 만에 나타난 동정어옹은 혼자가 아니었다. 무림사기를 모두 데리고 나타난 그는 동방소령까지 다섯 명 모두 입방하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다.

“이해합니다. 저야 호법으로서 방주님의 뜻을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 수석 장로께서는 당연히 의구심을 가지셔야지요.”

문파의 장로와 호법은 지위상 비슷하기는 하지만 권한과 임무는 많이 달랐다.

호법은 보통 문파 수장의 친위대로 불리는 최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문파와 문파의 장을 보호하고 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주의 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문파의 다른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는 방의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마도나 사파에서는 감히 문파의 장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지만, 정파에서는 방주의 결정까지 비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특히 문파의 문도를 들이는 일은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세상의 모든 쓴맛을 다 맛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배신과 음모를 많이 경험한 고철황으로서는 모든 상황을 먼저 의심부터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하긴, 방주님과 아가씨께서 직접 만나보고 결정하신 일이니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신생 문파에 너무 대단한 분들이 스스로 들어온다고 하니, 좋으면서도 자꾸 노파심이 드는군요.”

“솔직히 제가 방주님 입장이었다면 좀 더 지켜본 후에 받아들였을 겁니다.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동안 살수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겪어 보았는데, 아가씨처럼 현명하고 지략이 뛰어난 분은 거의 못 봤습니다. 거기다 방주님은 또 어떠십니까? 누군가에게 속을 분이 아니시지요. 그래서 그냥 믿는 겁니다.”

“태상호법의 말이 맞습니다. 저도 그냥 믿어야겠습니다.”

추명혼의 말에 고철황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주님 들어오십시다.”

그때 총관의 외침과 함께 문이 열리며 악불군과 담수련이 네 명의 노인과 한 여인을 대동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림사기와 동방소령이었다.

“자, 모두 앉으십시오.”

상석으로 간 악불군은 모두에게 앉으라고 명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젠 모두가 방도가 된 이상, 그가 먼저 앉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악불군이 준비된 술잔을 들었다.

“부족한 저를 방주로 인정해 주시고 이렇게 모인 것도 하늘이 준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믿어 준 이상으로 저 역시 여러분들을 믿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피를 나눈 가족입니다. 우리의 앞에 여러 어려운 일이 닥치고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 함께 힘을 합쳐 어떤 난관이라도 다 뚫고 지나갈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이 끝나자 고철황이 모두를 보며 크게 외쳤다.

“방주님께 충성을 맹세합시다!”

그러자 모든 간부들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방주님 천세! 천세! 천세!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던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리고 말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

아직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 정확히 정의 내리진 못했으나,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드디어 한 세력의 장으로서 위엄을 갖추어 가는 모습은 그녀에게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감격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평생 도둑으로 천시받던 고철황이나, 죽음의 사신으로 불렸지만 막상 자신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살아왔던 백인막 출신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새로이 합류했지만 수십 년간 자신의 주군을 기다려 왔던 무림사기까지, 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격의 강도는 비슷했다.

악불군이 먼저 술잔을 비우자 모두는 동시에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미 인사를 하긴 했지만, 이번에 정식으로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하도록 해요.”

담수련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도 가장 지위가 높은 고철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수석 장로를 맡고 있는 고철황이라고 합니다. 강호에서는 귀도신영이라고 불렸지요. 여기 계신 분들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만 하십시오. 그럼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고철황의 너스레에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보면 무림사기는 신입이고 장로가 되기로 했기 때문에, 지위가 높은 수석 장로로서 좀 무게를 잡아도 탓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소탈한 고철황은 조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 태상호법 추명혼입니다.”

그러자 추명혼을 비롯한 다른 간부들도 인사를 했다.

소개를 받던 무림사기의 얼굴에는 놀람과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이 나타났다.

이미 인사를 한 사람도 있었지만 귀도신영과 영운산장주인 대력신권 유성빈, 광한궁의 장로 구자경 그리고 표왕 평위광 외에는 대부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들의 무공 수위가 놀라웠던 것이다.

곧 그들의 차례가 오자, 동정어옹을 시작으로 무림사기들도 소개를 시작했다.

“대형께 말씀들었습니다. 전 유정태라고 합니다. 강호에서는 월하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천수옹 안형근과 묵죽도옹 하상훈이 연달아 포권을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소개가 끝나고 술과 음식이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무림사기를 장로로 받아들인 천호방. 하지만 담수련은 자신들이 외유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했다.

* * *

제갈우명은 군사전 총책 우문상일이 가져온 두 통의 서찰을 앞에 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통은 절강의 책임자 백룡신권 황보준백이 보낸 보고서였다.

그 안의 내용은 대부분 천호무적검과 천호방에 대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연이어 악불군의 배첩이 도착한 것이었다.

천호방 방주의 직인 찍힌 배첩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제갈우명과 독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천호방주 혼자가 아니라, 천상신녀도 같이 온다……. 둘의 관계가 뭘까?’

제갈우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콕 짚어 독대를 원한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 굳이 천상신녀와 같이 오겠다고 했으니, 둘이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관계라고 보아도 무방해 보였다.

지금 악불군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고 있었다. 천상신녀라는 명호가 제법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미모가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과 천호무적검이 보호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즉, 천호무적검이라는 명성에 따라 오르내리는 정도일 뿐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자신과 독대를 하는 자리에 그녀와 같이 오겠다는 걸 보니, 그녀가 천호무적검에게 상당히 중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이번 기회에 악불군이란 자가 어떤 자인지 직접 만나보고 인물 됨됨이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제갈우명과 독대를 하는 것은 맹주인 천제무황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독대를 극히 꺼려했다. 그런 그가 악불군과 담수련을 독대하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천하제일 지자로 알려진 제갈우명과 오음절맥이자, 이제 뇌력(腦力)이 깨어난 지 오래인 담수련과의 만남이 어떤 식의 변화를 이끌어낼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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