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45화>
245화. 만남(1)
항주의 서호(西湖)에서 출발한 배를 탄 악불군은 무림맹에 도착할 때까지 배의 주인이 천호방임을 드러내지 말라 명을 내렸다.
덕분에 배는 거의 포구에 들르지 않고 계속 운행해 오 일 만에 군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 뒤 약속한 대로 파란 깃발을 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인 세 명이 탄 고속정이 다가왔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들을 따라오라는 말만 하고는 앞서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 한 섬.
섬 주위는 군선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배가 수십 척의 고속정을 거느리고는 오가는 배들을 철저하게 검문을 하고 있었다.
“수십 년을 어찰단에게 쫓기며 무수히 당했는데, 언제 이런 세력을 구축했을까?”
담수련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구심점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숨어서 기회만 기다리던 정파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아무래도 무림맹에서 소군을 싫어할 중요한 이유를 또 하나 찾은 것 같은데?”
“저를 싫어할 이유요?”
“방금 말했잖아. 구심점. 무림맹은 자신들이 구심점이 되어 모든 정파를 흡수할 생각인데, 정파를 자처하는 소군이 나타났으니 또 다른 구심점이 생긴 거잖아. 무림맹으로서는 반가울 일은 아니지.”
“무림맹은 전통의 무림 문파와 천제무황이라는 절대자가 있기에 구심점이 됐지만, 저야 그럴 재목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정파인들이 무림맹을 좋아할 것 같아? 사람들은 절대 그러지 못해. 천호방은 무림맹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구심점이 될 수 있어. 그리고 소군은 이미 천호방 사람들에게는 절대자야.”
“아가씨만이 저를 그렇게 대단하게 봐주시는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보아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만 그렇게 보는 것 같아? 휴우~ 소군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 몰라.”
악불군은 그녀의 푸념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무림맹의 포구는 이십 척의 배가 동시에 접안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뜻밖에도 포구를 둘러싸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좌판을 열고 음식과 물건을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객잔과 주루도 여러 개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제법 큰 포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음식을 사먹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인들의 세상이네.”
배가 접안하고 배의 선원들이 다리를 내리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서 중년인이 한 명 내렸다.
그는 악불군과 담수련이 내리자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무림맹 군사전 총책 우문상일입니다. 천호방의 악 방주님 맞으십니까?”
“악불군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천신문의 문주이신 천상신녀이십니다. 우문 대협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시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악불군도 포권을 하자 우문상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에 화제를 몰고 다니시는 악 방주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저만 나온 것이 오히려 결례지요. 다만 최대한 조용히 군사님을 만나시고 싶다고 하여 저만 나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와 동행한 수하들이 있는데, 그냥 배에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원래는 모두 내려 방명록에 이름을 남겨야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배에서 내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마차에 타시지요.”
악불군과 담수련 그리고 우문상일을 태운 마차는 천천히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구에 무림인들로 보이는 분들이 많던데, 모두 무림맹 사람인가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담수련이 슬쩍 물었다.
“아닙니다. 무림맹에 내방하는 분들을 수행한 무사들도 있고, 무림맹에 입맹하고 싶어 찾아온 무사들도 있습니다. 재미로 온 낭인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배를 포구에 접안하기 전 검문을 하던데, 생각보다는 들어오기가 쉬운 모양이네요?”
“검문은 반입이 불가한 물건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승룡도에 들어오겠다고 한 인원 수가 정확한지를 파악하기 위함일 뿐, 출입은 상당히 자유로운 편입니다.”
“그럼 무림맹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첩자들도 있을 수 있겠네요?”
“꽤 많은 수의 첩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들도 다 파악하고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걸리지 않은 첩자들도 있겠지만, 저기서 좋은 정보를 얻기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담수련이 특이한 것에 흥미를 느끼자, 우문상일은 무림맹은 절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주지시키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악 방주님이나 저를 보신 적도 없으신데 전혀 의심을 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이번에는 정보망에 대해 알고 싶은 모양이군?’
우문상일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고에 의하면 일류급 정도의 내공만 가진 것으로 느껴지니 주의가 필요하신 분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지금 악 방주님의 무공이 딱 일류급 정도의 내공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 방주님의 용모파기는 이미 무림맹에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천상신녀 여협의 용모파기도 같이 있는데 굳이 확인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우문상일은 면사를 쓰고 있는 담수련을 슬쩍 도발했다.
“우문 대협께서 만진선생 제갈 대협과 함께 정파 최고의 지자라고 하더니, 역시 대단하시네요.”
“저와 제갈 군사님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저는 부군사이신 현기수사와도 비교가 안 됩니다.”
“현기수사란 분이 부군사이시군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모르고 계셨습니까?”
“사실 저희는 작은 문파인지라, 부(副) 자가 들어간 분들까지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살짝 눈웃음 짓는 담수련을 보며 우문상일은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전체 얼굴도 아니고 눈만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그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비한 여인이군……. 눈에 총명함이 가득해.’
자신의 대답이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문상일의 머리를 언뜻 스쳤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지는 못했다. 마차가 도착지에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대나무가 가득한 숲속에 지어진 소축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내린 우문상일은 소축을 가리키며 말했다.
“군사님께서 소축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안내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포권을 한 악불군과 담수련은 소축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들어가자, 난에 물을 주고 있던 제갈우명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우명입니다.”
‘넓은 이마 크고 긴 귀, 오뚝 솟은 코. 현기가 가득한 눈까지…… 소문대로 대단하신 분은 맞구나.’
제갈우명을 본 담수련의 첫 소감은 대단히 후했다.
“천호방의 악불군입니다.”
“천신문의 천상신녀예요. 천하제일지자라 불리는 분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신의현맥? 이런 혼란의 시기에 신의현맥이 나타나다니, 정말 놀랍군…….’
제갈우명은 악불군을 보자 눈이 커졌다.
혼란의 시기에도 신의현맥은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림인 중에서 나타났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악불군에 놀란 그는 담수련의 눈을 보자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현명안(賢明眼)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현명안은 뇌력이 극한으로 높아지면 눈동자에 그 총기가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현명안의 소유자는 너무 똑똑해 하늘조차 시기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대부분 이십 전후에 현명안이 나타나지만 삼십이 되기 전 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명안을 가진 자의 두뇌는 천하에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었다.
“천호방이 너무 빨리 성장을 하기에 도대체 누가 있어 그런 능력을 보이나 했더니,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제갈우명은 담수련을 보며 말하고는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우선 앉으시지요. 이곳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차뿐입니다. 물론 상당히 귀한 것이니 실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이 자리에 앉자 제갈우명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를 가지고 오더니 그들의 앞에 놓인 잔에 천천히 따르기 시작했다.
“역시, 제갈 대협의 말대로 향기부터가 다르네요. 이게 무슨 차인가요?”
담수련은 차의 향기를 한 번 맡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사람들은 용정차를 최고로 치지요. 하지만 전 이 차를 제일 좋아합니다.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제가 조금씩 재배해서 마시니까요.”
“냄새가 달콤하면서도 상쾌해요. 한번 맛을 먼저 보겠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담수련의 눈에 감탄의 빛이 나타났다.
“정말 오묘한 맛이네요 첫 맛은 쓴데 끝 맛은 달고 약간 시금털털하면서도 상쾌하고 어떻게 이런 상반된 맛을 낼 수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갈 대협께서 이름을 짓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담수련의 말에 제갈우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이 차의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정확하게 맞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놀랍습니다. 한 모금 마시고 그것을 알아차리다니 말입니다. 사실 어떤 맛을 내세우기가 어렵더군요.”
우선 가볍게 차에서 시작된 대화는 지리와 역사 심지어 상권의 거래에 대한 얘기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이 여인이 천호무적검보다 지위가 높아?’
담수련과 자신의 대화가 상당히 길어지면서 악불군은 살짝 소외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악불군은 상관없다는 듯 그저 차를 조금씩 마시면서 둘의 대화를 경청할 뿐이었다.
무림의 위계질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제갈우명은, 담수련이 악불군보다 지위가 높아야만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이 담수련보다 낮다는 것이 사실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똑똑해도 군사는 할지언정 맹주는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공이 약하면서 윗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나이가 많거나 배분이 높거나 아니면 친족으로서 항렬이 위인 경우뿐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끝낸 제갈우명은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천상신녀 여협께서 만박무통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니 놀랐습니다. 이 제갈 모가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 같습니다.”
“과찬이세요. 저야말로 오늘 제갈 대협께 너무 많은 가르침을 받는 것 같습니다.”
담수련의 겸양 어린 말에 미소를 지은 그는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악 방주께서 저와 독대를 원한 이유를 알아야겠군요.”
“미사여구를 붙여서 두리뭉실하게 얘기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무례하게 느껴지신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솔직한 대화를 좋아합니다. 모호한 대화는 대화를 화기애애하고 기분 좋게 끝내 놓고도 동상이몽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천호방은 정파를 표방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나 천호방에서 정파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이라고 해 두고 싶군요.”
“그럼 그 아직이 계속 유효할 경우에도 무림맹에서는 천호방을 적으로 삼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이미 예고는 했지만 방금 그 말은 생각보다도 더 직설적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제갈우명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솔직하기로 했으니 저도 솔직한 답을 드리지요. 현재 무림맹은 천호방을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천호방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분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천호방이 무림맹에 들어오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사해신개 어르신께서 제게 무림맹의 입맹을 권유하러 오셨더군요.”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거절하셨다고요?”
“예, 그러나 거절이라기보다는 유예라고 하고 싶습니다.”
“유예라면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어 입맹하실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굳이 그러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무림맹을 지켜보는 중입니다.”
전혀 생각 못했던 악불군의 말에, 제갈우명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