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46화 (246/472)

<천검지애 246화>

246화. 만남(2)

차 한 잔 마실 짧은 시간 동안 악불군의 눈을 보며 그 진의를 파악하던 제갈우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씀은 진의를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을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림맹에서 천호방을 의구심을 가지고 보는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이유를 대라고 하신다면 열 가지는 당장이라도 댈 수 있습니다.”

“먼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악 방주의 출신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크겠군요. 사람이란 누군가에게서 태어나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무림인에게는 무공을 배운 문파나,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가 존재하지요. 그런데 악 방주님은 그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에는 많은 계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황족부터 시작해서 귀족, 양민, 그리고 천민. 그 속에서 세부적으로 나눈다면 더 많은 계층이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황상께 그런 말을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갈우명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주원장의 출신 성분이 한미(寒微)하다는 것은 공인된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주원장 앞에서 출신을 얘기했다가는 그대로 목이 달아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눈앞의 악불군은 그런 주원장이 호형호제한다고 공언한 사람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악불군의 출신을 가지고 의구심을 드러낸 모습이 주원장을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제가 말한 것과 그것은 다릅니다.”

제갈우명은 자신의 말을 왜곡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다르지요. 그렇다고 한들, 무림에서 명망 높은 고수 중 황족이나 귀족은 몇 명이나 될까요? 소림사의 많은 고승이나 무당의 도사님들은 대부분 고아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가 말한 출신 성분은…….”

“제갈 대협,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상당한 고위직까지 지내신 할아버님과 학당을 운영하던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대한발과 역병에 의해 하루아침에 모두 돌아가신 뒤로 저는 고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무공에 접하게 됐고, 여러 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런 제게 버젓한 사문이 없다는 점과 직접적으로 사부님이라 부를 만한 분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제갈우명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그러나 제갈우명은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악불군의 몸에서 거대한 절대자의 기도가 갑자기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강한 내공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우리가 이자에 대해 너무 몰랐어.’

제갈우명은 자신들이 악불군을 그저 절정 이상의 무림인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상황을 분석한 것이 잘못됐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강한 자는 더 강한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절대자는 무공의 강함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닌 그들만의 특별한 매력으로 상대를 끌어들인다. 진정한 충성을 받게 되는 것이다.

황조를 탄생시킨 초대 황제들이 여러 가지 허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잡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비근한 예가 바로 주원장이었다.

비천한 신분으로 시작, 산적부터 돌중까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인생을 산 그가 결국 절대 권력인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도, 바로 그가 타고난 절대자의 기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악 방주님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군요?”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른데, 제갈 대협께서 의심을 안 한다 하여 다른 분들까지 안 한다는 보장은 없겠지요. 사실 저도 무림맹의 여러 정책이 마음에 안 드니까요.”

“그래서 무림맹을 지켜보신다고 하신 겁니까?”

“제가 정파를 표방한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정의를 실천하겠다는 것입니다. 무림맹은 정파의 모임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정의와는 다른 점이 좀 있더군요. 그래서 무림맹의 입맹은 좀 관망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무림맹과 나쁜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를 독대하시고자 한 이유가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제가 무림에 나온 후 계속 견지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제 일을 하고 다른 문파와 척을 지는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건드리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은 합니다. 무림맹에서 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의구심을 넘어 모함을 하거나 선을 넘는 행동을 할 경우, 그것은 저를 적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 말이 얼마나 엄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십니까?”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제갈우명은 그녀의 말에 악불군이 입을 닫자 그녀를 보며 말했다.

“고견을 말씀해 보시지요.”

“지금 무림맹에서는 태양천과 어찰단의 잔당들을 상대하시기에도 바쁘지요?”

“본 맹의 전력은 생각보다 견고합니다.”

“견고하다 해도 사방 천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운 법이지요. 그건 황실도 하기 어려우니까요. 천호방에서 무림맹의 힘을 좀 덜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의미시지요?”

“우선 사천의 태룡세가를 제거하고 사천의 정파들이 재건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또한 구천마성의 북진을 저희가 도맡아 막아 드리지요.”

제갈우명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가 요즘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세 가지의 당면한 문제 중 둘이 바로 사천의 수복과 구천마성이었다.

그런데 담수련이 족집게처럼 그 두 가지 콕 짚어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놀라움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갈 대협께서 가장 고심하시는, 비밀 조직을 잡아내는 일에도 최대한 협조를 해 주겠습니다.”

당면 문제 중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마지막 하나를 담수련이 또다시 말한 것이다.

“……문주께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추적하는 것은 무림맹 내에서도 극비 사항이었다. 그들이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악 방주님은 이미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악 방주님을 암살하려다 오히려 다 죽은 적이 있었지요.”

“그들이 그 비밀 조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증거를 보이라고 하신다면 그냥 짐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짐작을 잘합니다.”

“그 문제를 제가 가장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으로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제가 근래 가장 많이 생각하는 자들이 그들이었거든요. 도대체 고수가 얼마나 많기에 그렇게 많은 고수들이 죽었는데도 계속 나타나는지도 의문이었고, 아무도 그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전부 다 지독한 마기를 풍긴다고 했습니다. 그런 자들을 제갈 대협 같은 분이 모르고 계신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혹시 두 분께서는 그들의 정체를 아십니까?”

“솔직히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여러 차례 악 방주님을 죽이려 했으니, 조만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갈우명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혈교라는 조직입니다.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이미 삼십 년 전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동안의 정황과 그들의 무공으로 미루어 천년마교와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정도만 짐작할 뿐이지요.”

제갈우명의 말을 들은 담수련은, 드디어 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도 짐작을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짐작입니다.”

“허심탄회하게 뭐든 말씀하십시오.”

“그들의 전력은 태양천과 어찰단을 합친 것과 비교한다면 삼분지 이 수준 정도일 거라고 봅니다. 그런 조직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이니, 상당히 많은 상단들과 연계가 되어 있겠지요. 또한 구천마성이나 혈해사계에 속하지 않은 마도인과 사파인들 중 상당수가 그들의 수하일 확률이 높습니다.”

“문주께서는 그들에 대해 연구를 하셨습니까?”

제갈우명은 상당히 놀란 듯 반문했다. 그녀가 말한 것은 그가 수년간 은밀하게 혈교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여 내린 결론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대해 안 것이 아직 일 년도 안 되었고, 그들이 보통 조직이 아니라고 느낀 것도 한 달이 안 됩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는 아직 정보망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보고 그런 짐작을 한 것입니까?”

“오늘 제갈 군사님을 보고 짐작을 했습니다.”

담수련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갈우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고 실질적으로도 그들에 대해 고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그런 짐작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 그려진 것이었다.

‘현명안의 전설이 진짜였군……. 젊은 나이에 이미 절대자의 기도를 보이는 자와, 하늘이 시기한다는 머리를 지닌 여인의 조합이라……. 거기다 둘의 신뢰가 누구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제갈우명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는 원나라에 부역한 무림인들을 제거하고 완전한 정통성을 확보하면, 무림맹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구천마성과 혈해사계 그리고 혈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중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는 어차피 중원 무림이고, 어차피 정파와 마도와의 싸움은 무림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이기에, 가장 큰 문제는 혈교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최고의 위험 요인을 만난 것이다.

담수련은 제갈우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즉시 눈치챘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원하던 바였다.

“제갈 대협, 저희가 정파라고 해도 정파인들의 모임인 무림맹에게는 이방인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마 지금 저희가 적이 된다면 대단히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희는 정파를 표방하고 있고, 무림맹에서 친구로 여긴다면 누구보다도 든든한 협력자가 될 겁니다.”

천하제일의 책사답게 제갈우명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그녀의 언변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문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무림맹과 척을 지고 싶지 않으니 무림맹도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건 저희만이 아니라 무림의 어떤 세력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무림의 문파로서 자신들을 건드리는 세력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문을 닫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왜 제게는 천호방이 무림맹과 척을 질 일이 있다는 듯이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만진선생이네…….’

지금까지 그녀와 대화 중에 그녀의 진의를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제갈우명은 그녀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을 그대로 감지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그녀가 아니었다.

“잠시 후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것이 세상사인데, 내일 이후에 일어날 일을 누구라고 알겠습니까? 저희가 무림맹에 척을 질 일이 생길지, 아니면 무림맹이 저희에게 척을 질을 행할지는 아직 모르지요. 다만 어떤 이유건 저희와 무림맹이 반목을 하는 순간, 좋아할 자들은 혈교나 구천마성 같은 마도겠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화 속에서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대화를 복기하는 제갈우명과, 자신이 빼먹은 것은 없는지 다시 정리하는 담수련.

그때 악불군이 침묵을 깼다.

“모호한 분위기가 싫어 솔직하게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상황이 모호하게 변한 것 같습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호방은 무림맹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대신 제가 보호하고자 하는 분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건드리지 마십시오. 만약 건드린다면 전 둘 중 한쪽이 끝장이 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제갈 대협께서 제가 하는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악불군의 요지는 그의 말대로 간단했다.

적이 될래? 친구가 될래?

이런 식의 단도직입적인 이분법을 무림맹의 총단에 들어와 군사에게 강요하듯 말하는 것은 천하의 누구라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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