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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47화 (247/472)

<천검지애 247화>

247화. 만남(3)

“……악 방주께서는 보기보다는 무모하신 것 같습니다. 겨우 천호방만으로 무림맹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승패는 고려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저 죽음으로 지키는 것뿐이지요.”

평생 산전수전을 치르며 온갖 역경을 다 헤쳐나온 제갈우명이었다. 누군가 이보다 더한 협박을 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마 공허한 허풍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악불군은 달랐다.

그는 누군가와 신의를 맺으면 죽음으로 그것을 지킨다는 신의현맥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그는 신생 문파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큰 방파의 주인이었고, 스스로도 절대자의 반열에 들 정도로 강력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황제는 그를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말했고, 심지어 무림인 중 가장 먼저 황제를 만나고 황궁에서 며칠이나 묵다 나올 정도로 뒷배까지 든든한 자였다.

그의 말을 허풍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무게가 남달랐다.

“무림맹이나 천호방은 같은 정파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사람이니 여러 가지 충돌이 생길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마도나 사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전 악 방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나오시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갈우명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악불군이 이렇게 비장한 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반드시 무림맹과 악불군 사이에 척을 질 일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갈 대협 말씀대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먼저 말해서 일어날 일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호한 것이 싫다고 하시더니, 지금 모호하게 말씀하시는군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호하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갈 대협이시라면 전혀 모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축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런 경우를 눈치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경전이라고 해야 할까.

양쪽은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쉬운 쪽이 먼저 상대의 의중을 받아줘야 하는 상황…….

그리고 놀랍게도 아쉬운 쪽은 제갈우명이 되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말은, 제가 천호방과 반목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저 보고 막아 달라는 말로 들리는데……. 제 생각이 맞는 것입니까?”

“천신문주님께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요구만 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를 하자는 것입니다. 사천의 재건을 돕고 구천마성의 북진을 막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 저도 조건을 하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생각하기에 혈교는 대단히 위험한 조직입니다. 이후, 제가 혈교를 상대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 주시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무례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지금 천호방의 군사 역할을 제가 하고 있으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악 방주님과 저는 혈교를 상대하는 데 무림맹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이며, 혈교를 제거하는 일을 어떤 일보다 일순위에 두겠습니다. 단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실 경우, 그런 결정을 한 정보와 분석을 먼저 공유해 주십시오. 저희는 무림맹과 동등한 입장에서 도움은 드릴 수 있지만 칼받이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적극적으로 돕기는 하되 싸울 장소는 스스로 정하겠다는 말이었다.

제갈우명은 감탄한 눈으로 담수련을 보더니 역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천호방과 천신문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갈 대협께서도 이미 느끼셨겠지만 악 방주님께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정이 너무 올곧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계셨지요. 그것을 제가 옆에서 보필하고 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과 자신의 관계를 일적으로 만난 사이로 설명을 했다.

제갈우명은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첫 만남치고는 상당히 길고 우호적인 대화였던 것 같습니다. 우선 두 분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림맹의 결정권자가 아니라 군사입니다. 명확한 답은 조만간 드리겠습니다.”

제갈우명의 말에 담수련은 미소를 지며 답했다.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이라도 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답을 듣기 전에, 절강에서 본 방을 감시하는 무림맹 사람들부터 철수시켜 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 감시를 당하는 것은 부담이 없지만, 근래 악 방주를 암살하려는 자들이 자주 출몰해서 괜히 애먼 분이 희생될까 염려가 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연락할 일도 많아질 텐데, 감시가 아닌 연락망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그것도 괜찮네요. 대신 연락망만 유지해 주세요. 저희를 따라다니거나 이곳저곳 들쑤셔 가며 정보 수집은 하지 마시고요.”

“그건 제가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천호방은 지금 절강에는 총단을 강서의 도창에는 분타를 두고 있습니다. 더 세력을 확장하실 생각이십니까?”

“현재로써는 더 이상 확장할 생각도 여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확장을 하더라도 복건이나 강서 남부 같은 남쪽으로 할 것이니, 무림맹과는 겹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지금 무림맹과 황상 간에 원나라를 완전히 몰아낸 후의 무림의 위상에 관해 조율 중입니다. 저희는 원나라전과 같은 수준의 독립성을 원하고 있지만, 황상께서는 생각이 다른 것 같더군요. 혹여 황상과 무림맹 간에 이견이 크다면 악 방주께서는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그 문제는 악 방주님이 아니라 황상께서 정하실 열 분의 무림 대표분들께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열 분의 무림 대표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이번에 황궁에 갔다가 들었습니다. 황상께서는 그 열 분에게 무림십왕이라는 칭호를 생각하시더군요. 왕야와 맞먹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 준하는 대우를 해 주실 생각이라고 하시더군요.”

“……무림십왕이라고요?”

제갈우명도 아직 듣지 못한 새로운 정보였다.

열 명의 대표에게 황제의 신물을 준다는 공지에 이미 천하가 들썩이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안들마저 뒤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왕이라는 칭호까지 준다면 엄청난 태풍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무림인들이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황제가 직접 무림의 왕으로 호칭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명예였다.

“신물에 무림왕이라는 칭호를 아예 새겨서 주신다고 하시니, 무림인들에게는 엄청난 명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황상께 직접 들은 말입니까?”

“악 방주님과는 호형호제하신다는 분인데 그 정도야 당연히 말씀해 주시지요.”

은근히 황제와 돈독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담수련이었다.

“그럼 혹시, 네 분에게는 신물을 먼저 하사하신다고 하던데 어떤 분들이 받는지도 들으셨습니까?”

“당연히 들었습니다. 세 분이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짐작하시는 분들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제갈 대협께서 알고자 하는 분은 마지막 네 번째 인물이 누구일 것이냐겠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짐작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 짐작이 맞다는 것입니까?”

“제갈 대협의 짐작이면 그것은 확실한 것과 동의어가 아닐까요?”

기묘한 대화였다.

담수련은 누구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우명은 누구를 말하는지 다 알았다. 문제는 그녀가 그랬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 아주 유용한 정보를 주셨으니 저도 하나 드리지요.”

“기대할게요.”

“잠룡세가의 소가주인 담수운이 도창의 대룡상단의 총수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대룡상단이 천호방의 협력 세력이라는군요. 아직 증거가 확실치 않아서 좀 더 보강해야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악 방주께서 해명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담수련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빨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제갈우명이 담수련을 보았다면, 찰나의 흔들림이었지만 그의 눈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담수련의 편인 듯했다. 이 순간 그는 악불군을 보며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담수련은 하나 더 알 수 있었다. 그가 아직은 그녀와 잠룡세가를 연결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악불군이 아니라 그녀를 보며 물었을 것이었다.

“자체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대룡상단은 본 방에 아주 중요한 재정을 도와주는 곳입니다. 제갈 대협께서도 아시겠지만 무림 세력이라면 몰라도 상단은 총수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느냐가 우선이지요.”

“대룡상단의 총수가 진짜 잠룡세가의 소가주인 담수운이라면 방주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전 그분이 본 방의 이념을 따르고 저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누구인지 알아볼 생각이 없습니다.”

“방을 운영하는 방주님께서 협력 세력의 장이 어떤 자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까?”

“방도라면 모르지만 협력 세력일 뿐입니다. 전 그분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았고, 저는 그분의 상행위를 보호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무림 세력이 행하는 일 아닙니까?”

“잠룡세가는 중원 무림을 배신하고 원나라를 도운 부역자 집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잠룡세가를 멸문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태룡세가를 없앨 것입니다. 그 정도면 부역자를 진짜 많이 제거한 사람은 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 확인이 된 것은 아니니, 제가 더 알아본 후에 방주님과 공유를 하겠습니다.”

“전 저를 도와준 사람을 다른 누군가가 해치려고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 사소한 문제로 무림맹과 인상을 붉히는 일은 없도록 해 주십시오.”

담수운이 잠룡세가의 소가주라는 상징성은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다.

악불군의 말대로 태룡세가를 없애 준다면 담수운을 잡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상황을 보고 거기에 대한 답도 같이 보내 드리지요.”

순간 담수련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드디어 그녀가 듣고자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실 이번 제갈우명과의 만남은 바로 ‘상황을 보고 답을 주겠다.’는 그의 말 속에 다 함축이 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할 말과 들을 말은 다 한 것 같네요. 시간도 딱 알맞은 것 같고요. 이만 저희는 떠나야겠습니다.”

담수련은 제갈우명의 생각을 바꾼 이상 이제 떠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무림맹에는 보는 눈이 아주 많습니다. 두 분이 이곳에 온 것도 아마 내당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무림맹 같은 곳에서 그것도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어쩌면 맹주님이나 장로원에서 방주님을 뵙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그렇게 높으신 분들을 만날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후에 시기가 무르익으면 배첩을 보내고 정식으로 찾아올 것이니, 제갈 대협께서 알아서 막아주셨으면 싶네요.”

마치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예상한 듯, 담수련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제갈우명은 옆에 있는 밧줄을 잡아당겼다.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곧 중년 무인 한 명이 나타났다.

“두 분이 무림맹을 나갈 때까지 아무도 귀찮게 하지 못하게 네가 동행하거라.”

“예!”

“전 여기서 배웅을 하겠습니다.”

제갈우명이 포권을 하자 악불군과 담수련도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 주신 것만도 저희들에게는 대단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오늘 만남이 무림의 평화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나가자 제갈우명은 의자에 등을 대고 편하게 자세를 취하더니 눈을 감았다.

‘분명 본 맹과 사이가 틀어질 큰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그게 악 방주와 척을 져도 될 만큼 큰일일까?’

제갈우명은 마음이 불안해 옴을 느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무림은 또다시 큰 변란에 파묻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악불군과 담수련 그리고 제갈우명, 셋의 만남이 무림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아직 누구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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