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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48화 (248/472)

<천검지애 248화>

248화 수적(1)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승룡도를 떠난 악불군과 담수련은 뱃머리에 만들어 놓은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는 천호방 방주 전용선이었다.

배를 산 후 담수련은 대대적인 개조를 하게 했다. 물론 모든 설계는 그녀가 직접 했다.

배 주위를 철근으로 둘러 여간한 충격에는 절대 부서지지 않도록 보강했고, 나무 전체에 방화액을 발라 불화살이 날아든다 해도 불이 붙기 어렵게 만들었다.

담수련이 특히 신경을 쓴 곳은 선실이었다.

상선이나 여객선은 최대한 많은 사람과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차와 백설 그리고 식량창고만 남기고 전체를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꾸몄다.

그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악불군은 물론 호위하는 수하들까지 생각하여 만든 것이다.

처음 악불군은 자신을 위한 배를 만들겠다는 담수련의 계획을 듣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반대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불편해서 그런다는 말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뱃머리에 정자 같은 구조물을 만든 것도 뱃머리에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서였다.

“어땠어?”

차를 마시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담수련이 의견을 구하듯 물었다.

“제가 느끼기에는 잘된 것 같은데, 원체 현명한 분이라 속을 알 수가 없더군요.”

“하긴, 제갈 대협 같은 분은 대화 조금 했다고 그 의중을 간파하기 어렵지. 소군이 보기에 제갈 대협은 믿을 만해 보였어?”

“글쎄요……? 제가 그런 분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군은 진짜 스스로를 모르는 거야? 아니면 너무 겸손한 거야? 소군과 함께 지내는 동안 소군의 생각이나 판단이 틀린 것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어떤 때는 나까지 깜짝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사안을 분석했거든.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앞으로는 그러지 마. 난 소군이 똑똑하면 좋아하지, 질투하고 그러지 않으니까.”

“아가씨께서 질투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낮추냐고? 난 소군이 너무 자랑스러워 죽겠는데 자꾸 그러면 정말 속상해.”

속상하다는 말은 그대로 통했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악불군이 아니던가.

“제가 보기에 그분 자체는 믿을 만했습니다. 풍기는 기운도 정명했고, 대화 속에서 어떤 거짓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다만, 뭐?”

제갈우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던 악불군이 마지막을 부정적인 단어로 끝내자, 담수련은 기대 섞인 표정으로 얼굴을 바짝 내밀며 반문했다.

“그분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분이 아가씨와 저에게 적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사심보다는 무림맹에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판단해서 결정을 할 것 같았습니다.”

“정말 소름 끼친다!”

“제가요?”

“소군의 지금 그 판단. 어떻게 내 생각하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을 수가 있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말은 좀 과장 같은데요?”

“아니야. 진짜야. 소군이 자신의 의견을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실지로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게 분명해.”

“어쩌다 한 번 아가씨의 생각과 같다고 천재적인 두뇌라는 것은 좀 과한 칭찬 같습니다.”

“소군은 내가 지금 이거 하나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해?”

“지금 제 평가는 강호 경험이 많은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소군이 본 사람은 천하제일지자라 불리는 분이고, 그와 대화를 한 사람은 나야. 둘 다 자신의 의중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의 성격도 내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제갈 대협은 여러 번 장고하는 척하며 우리에게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유도까지 했거든. 그런데도 소군은 정확하게 그분이 다음 어떤 판단을 할지 알아낸 거라고.”

“제가 제갈 대협의 다음 판단까지 알아냈단 말입니까?”

“방금 그랬잖아. 자신의 생각보다는 무림맹의 이익을 따라 움직일 거라고.”

“그러긴 했지만, 다음에 어떤 판단을 할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말해 봐. 소군 생각에 제갈 대협께서 어떤 결정을 하실 것 같아?”

“저라면 천호방과 가깝게 지내는 길을 택할 것 같습니다. 제갈 대협께서는 저보다 현명한 분이니 저와 같은 판단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맞았어. 제갈 대협께서 여러모로 생각을 할 거야. 그리고 결국 천호방을 안고 가는 것이 훨씬 이익이라는 결론을 내릴 거야. 하지만 세상에는 변수라는 것이 있지. 누구도 예상 못한 변수, 아니 예상을 하면서도 막을 수 없는 변수라고 하는 게 맞겠다.”

“제갈 대협 같은 분이 예상을 하면서도 막을 수 없는 변수가 존재할까요?”

“인간의 욕심.”

단정하듯 말하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인간의 욕심만큼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없지요.”

“제갈 대협께서 그들을 얼마나 설득하고 이해시키느냐가 관건이 될 거야.”

사실 마도나 사파 역시 정밀 조사에 들어간다면 부역자로 찍힐 행동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원나라 치하에서 최대한 웅크리고 있었지만 계속 활동을 한 혈해사계는 물론, 지하로 숨었던 구천마성 역시 초기에는 원나라에 많은 협조를 했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는 그들을 조사에서 제외했다.

그것은 그들까지 부역자로 낙인찍었다가는, 무림은 다시 끝없는 전쟁 속으로 빨려 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오룡세가 중 잠룡세가와 태룡세가 가장 먼저 부역자 살생부에 오른 이유도 엄밀히 따진다면, 잠룡세가는 가장 수입이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태룡세가는 정파의 핵심인 사천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였다.

감숙의 마룡세가나 호남 남부의 화룡세가는 상대적으로 입에 덜 오르내리는 이유가 그들의 세력권이 사파와 마도권이라는 것 때문임을, 말을 안 할 뿐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정파 중 무주공산이 된 절강을 노리고 있던 문파는 대단히 많았다. 새롭게 재건하는 지금 모든 문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출신도 모르는 젊은 청년이 낭인들을 규합한 방파를 세운 후 접수해 버렸다.

한마디로 악불군이 눈엣가시인 사람이 무림맹에는 많이 존재했다.

그들에게 악불군이 잠룡세가의 직계 자식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필시 제거할 호기로 삼을 것은 자명했다.

제갈우명이 그들을 누를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담수련의 다음 계획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제갈 대협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그들을 누를 수 있는 분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지, 뭐.”

제갈우명도 누를 수 없는 자들을 누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무림맹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맹주인 천제무황이었다.

너무 태연한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응?”

“아가씨의 계획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이야?”

“원래는 가주님의 명에 따라 종리 단주님을 만나기 위해 강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원래 계획과 너무 달라졌습니다. 다행히 아가씨의 계획이 적중한 덕에 결과는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가씨의 신변보호만을 생각한다면 상황은 그다지 좋아진 것은 없습니다.”

종리화를 만나 잠봉밀을 접수한 후 숨어서 때를 기다리라던 담무룡의 계획은 이제 백지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안 좋아져? 전에는 소군 혼자만 나를 보호했지만 지금은 천호방과 천신문까지 나를 보호하잖아? 보호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좋아진 거 아니야?”

“생각 외로 계획이 너무 커져 천하 전체를 상대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와줄 사람들이 많아진 것 이상으로 적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이젠 숨으려 해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우리가 숨었다고 쳐도 평생을 도망치며 살아야 했을 거야.”

“그거야…….”

“소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수운 오라버니께서 종산은자란 자에게 덜미를 잡힌 것을 모르고 있었잖아. 오라버니께서 죽건 말건 우리만 살겠다고 숨어 있을 거야? 유모는 아버님의 명령을 어떻게든 이행하려고 했을 거야. 소군은 유모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있어?”

“…….”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답을 하지 못했다.

분명 그녀는 악불군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우선이었다.

하지만 담수운이나 종리화가 위험에 빠진다면 그녀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모른 척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한다면, 아니라는 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어. 이젠 기호지세(騎虎之勢)야. 소군이 모든 사람을 보호하려면 소군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가장 강한 세력의 주인이 되는 수밖에 없어. 이 계획의 목적이 뭐냐고 했지? 내 계획의 목적은 소군을 천하제일의 영웅으로 만드는 거야.”

“아가씨,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셔야지요? 제가 어떻게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겠습니까?”

“소군은 자신이 천호무적검으로 불리며 천호방이라는 방파의 주인이 될 거라고는 믿었어?”

“그거야 아가씨 덕이지요.”

“그러니까 소군의 옆에 내가 있으니까 가능한 계획이란 거야, 소군.”

“예.”

“소군이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지 못하면 지금 소군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될 거야. 물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겠지. 그리고 내가 소군이 천하제일영웅이 되는 것을 정말 간절히 원해.”

담수련까지 포함한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의 죽음.

악불군에게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간절히 원한다고까지 하지 않은가…….

‘그래, 아가씨를 위한 것인데 못할 것이 뭐가 있어! 까짓 거 해 보지 뭐.’

악불군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담수련의 뜻만을 따르던 그가 적극적으로 천하제일영웅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변화로 인해 무림에 어떤 풍파가 일어날지, 악불군 자신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 * *

악취가 코를 찌르는 수천 마리의 박쥐들이 살고 있는 동굴.

바닥에는 박쥐가 쏟아 낸 배설물과 그것을 먹이로 하는 벌레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꿱! 꿱!”

동굴로 잘못 들어온 멧돼지 한 마리가 다리를 물어 대는 독충들의 공격에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배설물 사이에서 손이 올라오더니 멧돼지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멧돼지의 뼈를 부숴 버렸다.

도대체 이렇게 더러운 곳에 몸을 묻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몸을 일으킨 괴인은 잡은 멧돼지의 가죽을 벗겨 내더니 우걱우걱 씹어 먹기 시작했다.

오물과 멧돼지의 피 그리고 살점까지 묻은 그의 모습은 도저히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아니 괴물이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크크크~ 난 안 죽어. 난 불사신이야.”

정신 나간 듯 중얼대던 그는 다시 고기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무척 고팠는지 고기는 물론 내장까지 다 먹어치운 그는 손으로 입을 털어 내더니 다시 중얼거렸다.

“담수련…….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곧 가마. 크크크크~”

놀랍게도 괴인의 입에서는 담수련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 * *

태룡세가의 제거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악불군과 담수련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상선이 여섯 척의 작은 쾌속선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뭐지?”

상당히 먼 거리여서 담수련은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수적들이 상선을 습격한 것 같습니다.”

“아직 해도 있고 다른 배들도 계속 왕래하는데 대놓고 수적질이라니, 요즘 수적들은 겁을 상실했나 보네?”

원나라의 수군들이 모두 북쪽으로 철군을 하고 명나라가 아직 수군을 정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먹고살기 어려운 양민들까지 수적이 되면서, 지금 장강은 완전히 수적들 천지로 변한 상황이었다.

“구해 줘야겠지요?”

“보지 못했으면 모르지만, 보고서 그냥 갈 수는 없지.”

금방 의기투합한 악불군은 흑석영을 불렀다.

“흑 호법!”

“예!”

“배를 저쪽으로 몰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적은 지금 상선을 공격하는 자들이 다가 아니었다.

악불군의 배가 그쪽으로 움직이자, 어디선가 열 척이 넘는 쾌속선이 나타나더니 악불군의 배를 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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