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49화>
249화 수적(2)
“어떡할까요?”
흑석영의 질문에 악불군은 잠시 쾌속선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죽이십시오.”
악불군의 명이 떨어지자 선원복을 입고 배를 몰던 장한들이 곳곳에서 무기를 빼 들더니 몸을 날렸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수적들의 배가 급히 선두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십 장 가까운 거리를 날아오는 것을 보자 무림인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벼운 쾌속선이라 해도 그 속도가 경신술을 쓰는 무림인들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배에 올라탄 천호방도들은 수적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시작했다. 몇몇 수적들은 다급하게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했지만, 살수 출신인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삼십 명이 넘는 수적들을 전멸시키고 다시 배로 돌아오는 데까지는 이각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천호방의 방주인 천호무적검이다. 이제부터 본방은 양민들을 괴롭히는 장강의 수적들과 전쟁을 선포한다. 우리들의 눈에 띄는 즉시 모조리 죽일 것이다.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본방의 눈에 띄지 않거나 수적을 그만두고 양민으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순간 그 넓은 장강 전체를 울리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방 십 장 안에 있는 장강의 물들이 두 자가 넘게 공중으로 솟구칠 정도였다.
그러자 상선을 공격하던 수적들이 다급히 배를 몰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악불군의 배로 서너 명이 타는 괘속선을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경신술로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
“활!”
악불군의 말에 이미 준비하고 있던 최욱걸이 화살까지 잰 활을 건넸다.
쾌속선을 향해 활시위를 겨냥한 악불군은 손가락을 살짝 비틀며 내공을 주입했다.
그리고…….
“쉬우이이잉!”
악불군의 손에서 떠난 화살은 엄청난 파공음을 주위로 퍼뜨리며 빠르게 쾌속선을 향해 날아갔다.
“펑!”
‘도대체 이분의 내공은 어느 정도이신가…….’
흑석영을 비롯한 수하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나무로 만든 화살대에 맞은 쾌속선은 마치 군함의 포에라도 맞은 듯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화살에 엄청난 내공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악불군은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연이어 터지는 폭음 소리와 함께 네 척의 쾌속선은 모조리 파편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던 수적들 역시 살아남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소군…….”
최욱걸에게 활을 넘기는 악불군의 옆으로 다가온 담수련이 그의 팔을 잡으며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수적이나 산적들은 양민들에게는 해만 끼치는 자들입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선처해 봤자 저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적질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줘야 그나마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변명하듯 말하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아는 악불군은 변명 같은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알아. 저들은 본보기를 보이지 않으면 절대 바뀔 자들이 아니야. 지금 소군의 결정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흑석영을 보며 말했다.
“이후, 수적들이 보이면 내게 보고할 필요 없이 천호방임을 알리고 제거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다시 갑시다.”
“뱃머리를 돌려라!”
흑석영의 외침이 떨어지자 배는 다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시 선두의 정자에 앉은 담수련과 악불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곧 담수련에 의해 깨졌다.
“……소군.”
“예.”
“미안해.”
“아가씨께서 왜 미안해하십니까?”
“소군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나 때문에 하고 있잖아?”
악불군은 그들을 감시하거나 미행을 하는 자들을 죽인 경우가 있긴 했지만 거의 다 경고를 먼저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무공이 강한 무림인들이었다.
양민을 괴롭히는 흑도들을 죽이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녀가 죽이라고 해야 살인을 했다. 그가 무공을 모르거나 삼류급의 무공을 지닌 자들을 죽이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수적들은 대부분 무공을 모르거나 안다 해도 일류 이상의 고수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방금 악불군은 경고를 하지 않고 모조리 죽이라고 명을 내렸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활을 쏴 몰살시키기까지 했다.
담수련은 그가 천하제일영웅이 되라는 그녀의 말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장강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이나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어부 같은 양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수적들은 공포이자 악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수적들을 천호방의 방주가 모조리 죽이겠다고 대 놓고 선포했다. 게다가 그는 수많은 배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엄청난 신위까지 보여 주었다.
보통 무림인들은 수적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얻는 것은 없고, 그들이 활동하는 곳이 무림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물 위이기 때문이었다.
물 위에 뜰 정도의 내공이 있거나 수공을 알지 못한다면, 물은 무림인들이 힘도 못 써 보고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무림인이 양민들을 위해 수적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장강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퍼질 것이고, 그들은 악불군을 칭송할 것이 분명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네 가지가 있었다.
우선 영웅이 되고자 하는 포부였다. 아무리 강하고 절대자의 기도를 지녔다 해도 스스로 나서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영웅은 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충성스러운 수하였다.
영웅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악당들을 제거해야 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세력과도 친해져야 했다. 또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도 빠질 수 없었다.
혼자 그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자기 일처럼 해 줄 수 있는 충성스런 수하는 필수적이었다.
세 번째는 돈이었다.
의식주(衣食住)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다. 그것은 무림인이건 영웅이건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된다면 영웅은커녕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마지막 네 번째는 그를 영웅이라고 칭송해 주는 민심이었다.
앞의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더라도 그를 영웅이라 부르며 환호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자신만의 영웅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 그들이 좋아할 일을 행해야 했다.
사파나 마도인과 싸우는 것은 무림인들에게는 대단한 행동이지만, 양민들이 봤을 때는 다 같은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일 뿐이었다.
양민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자들은 수적이나 산적 그리고 상인을 괴롭히는 흑도왈패들이었다.
악불군이 오늘 보인 행동은 자신을 부각하기 가장 적절한 장소와 시기라는 판단 하에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아가씨 말씀대로,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숨고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난 미안해.”
담수련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악불군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결정하면 후회 같은 것은 안 합니다. 이왕 결정한 이상 완벽하게 해서 아가씨께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드릴 겁니다.”
이러니저러니 여러 말을 했지만 결국 기승전 담수련이었다.
“방주님.”
그때 흑석영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까 수적들에게 공격을 받던 상선이 우리 뒤를 따르며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잠시 세워 달라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흑 호법.”
“예, 아가씨.”
“상선에 깃발 같은 거 달려 있나요?”
“금홍상단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을 달고 있습니다.”
“금홍상단이면…….”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 세우세요.”
“알겠습니다.”
흑석영이 선미로 향하자 악불군이 물었다.
“제 생각에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냥 됐다고 소리쳐서 보내는 것이 귀찮지 않고 좋지 않을까요?”
“금홍상단이 어디 있는 줄 알아?”
“호북에 있는 상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호북에 있는 상단이 아니고, 호북에서 가장 큰 상단이야. 정파에서 태산북두처럼 존경하는 문파가 두 군데가 있어. 하나는 숭산의 소림사이고, 또 하나는 무당산의 무당파야. 어때, 감이 와?”
“지금 재건을 시작한 무당파로서는 금홍상단이 아주 중요하겠군요?”
“그래, 무당파는 소림사와는 달리 원나라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고 해. 하지만 원래 무당의 도인들은 다 떠나고 원나라의 가짜 도인들이 머물면서 도관을 많이 훼손시킨 모양이야. 더구나 예전의 명성을 되찾으려면 뭐가 필요하겠어. 돈이거든.”
악불군은 담수련의 의중을 이해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직접 가 봐야겠습니다.”
그들은 악불군의 신위에 이미 경탄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악불군이 직접 영접한다면 경탄을 넘어 감동으로 연결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저것 봐. 그동안 모른 척하며 맨날 나한테 의견을 구하더니, 마음을 바꾸니까 나보다 더 잘하네…….’
새삼스럽게 악불군이 달리 보이는지 감탄어린 표정으로 따라 일어서는 그녀였다.
* * *
아미산.
정파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지막 보루(堡壘)라 불리는 구파일방에서 오직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하나뿐인 문파, 아미파가 있는 곳이었다.
원나라에 끝까지 저항했던 아미파는 문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일대 제자와 이대 제자를 거의 다 잃고, 아직 어린 삼대제자들만 몇몇 어른들의 보호 하에 간신히 빠져나왔었다.
그 와중에도 문파의 비급들을 대부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 만했다.
지금 아미파의 장문인인 묘인신니는 그때 빠져나온 삼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사저,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사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던 정인사태는 사매인 성인사태의 질문에 아미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막내 사매는 사조님은 못 뵈었지?”
“제가 사문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사조님께서 어찰단과 싸우다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사조님께서 살아계실 때 우리를 데리고 아미사에 대해서 정말 많이 말씀하셨었어. 그렇게 이곳에 오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 못 오시고…….”
말하던 정인사태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걸려 있었다.
“사조님께서 오셨어도 기뻐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저렇게 폐허가 되어 버렸잖아요. 저희도 아미산에 올라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 아미사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했고요.”
“장문인께서 태룡세가를 몰아내고 아미사를 완벽하게 복원할 때까지는 기다리라고 하셨잖아.”
“이미 청성과 당문까지 다 모였는데 왜 여기에 숨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어요.”
성인사태는 당장이라도 태룡세가로 쳐들어가 복수를 하고 싶은 듯했다. 그녀는 영웅회에서 태양천을 상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영웅검단 출신이기도 했다.
영웅회에서는 네 개의 무력집단을 조직했는데, 그들은 성인사태처럼 문파를 빼앗기고 도망치거나 원나라 군사에 의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로 이루어져 원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유난히 높았다. 당연히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강경한 입장이었다.
“사매, 어른들이 지금 공격을 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무림맹에서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 전력으로도 태룡세가는 멸문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지금 사천의 세 문파의 연합세력은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태룡세가 역시 만만치 않다고 하시더라고. 지금 우리끼리만 공격을 해서 태룡세가를 이긴다 해도, 우리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라고 하셨어.”
사천 정파의 세 주축인 당문과 아미 그리고 청성파는 원나라 초기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수십 년을 절치부심하며 제자를 키워 왔지만, 숨어서 키워야 한다는 제약과 수시로 동원된 어찰단과의 싸움 등으로 계속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여전히 예전 세력의 육, 칠 할 정도의 힘밖에 복원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태룡세가와 싸우면서 제자를 더 잃는다면 이후 문파를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우선 새외연합이 공공연히 사천의 서쪽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협박하고 있었고, 북쪽의 혈해사계 역시 그들의 힘이 약하다고 판단한다면 사천을 노릴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었다.
“사저, 저거 침입자 같은데요?”
얘기를 나누면서도 주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 성인사태가, 아미사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