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50화>
250화. 사천(1)
그들이 있는 곳은 아마사의 전경이 다 보이는 절벽 위였다. 거리가 제법 됐지만 아미사를 감시하기에는 충분한 장소였다.
유심히 아미사에 나타난 흑의인을 살피던 정인사태가 급히 말했다.
“사매, 빨리 가서 침입자가 나타난 것 같다고 보고해. 난 계속 감시하고 있을게.”
“알았어요.”
사매인 성인사태가 급히 몸을 날려 사라지자, 정인사태는 몸을 바닥에 바짝 붙인 후 흑의인의 행동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뭐야? 침입자가 아닌가?’
흑의인의 행동을 보던 정인사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경계를 책임질 때 누군가 방문 예정이라면, 정인사태에게 항상 먼저 알려 주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어떤 지시도 받은 것이 없었다.
한데 흑의인이 보이는 행동은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의아함이 더했다.
‘분명 무림맹과 약속된 신호는 맞는데?’
그녀가 갈등하는 사이, 알맞게 그녀들의 지휘자인 유진신니가 성인사태와 대여섯 명의 아미파 제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연락한 지 일각도 안 돼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의 연락망이 얼마나 신속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장로님, 저자의 행동이…….”
“나도 봤다.”
유진신니는 신호를 보낸 후 연락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서 있는 흑의인을 보더니 전음을 날렸다.
[우측 부서진 문을 통해 나와 산기슭으로 오십 장을 올라온 후 기다려라.]
그 거리에서 전음을 날린다는 것은 그녀의 내공이 일 갑자는 충분히 넘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흑의인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곧 그녀의 말대로 우측 문으로 달리더니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흑의인이 약속된 장소에 이르자 유진신니는 다시 전음을 날렸다.
[혼자냐?]
“혼자입니다.”
[우선 정체부터 밝혀라.]
“저는 절강의 천호방의 순찰영주인 노달호라고 합니다.”
백인막에는 이십 명의 특급 살수가 있었다. 그중 가장 특출난 열 명이 천호십영으로 호법과 당주 등 최고위직을 맡고 있었고, 나머지 열 명은 부당주와 분타주 그리고 순찰영주 등 방의 허리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노달호는 그는 백인막에서는 십일 호로 불리던 강자였다.
유진신니의 얼굴에 의아함이 나타났다.
그녀 역시 천호방에 대한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강과 사천은 동서, 극단에 위치해 교류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과 신호는 어떻게 안 것입니까?]
질문이 존대로 바뀌었다는 것은 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의미였다.
“저는 방주님의 배첩을 전하라는 임무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장소와 신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노달호의 말이 끝나자 그의 주위로 무기를 든 여승들이 나타났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미타불! 빈니는 아미파의 유진이라 합니다.”
유진신니가 합장을 하자 노달호는 급히 포권을 하며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천호방의 순찰영주 노달호입니다.”
“천호방주의 배첩을 가지고 왔다고요?”
노달호는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봉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빈니가 봐도 된다는 의미겠지요?”
봉투에 봉인이 없자 유진신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문파의 장들은 자신들의 친서를 봉인 없이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수장의 서찰이니 수장급의 간부만 봐야 한다는 일종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방주님께서는 누구라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찰을 펼친 유진신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구라도 보아도 된다는 말에 특별한 내용은 없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안에 적힌 내용이 사실입니까?”
“전 서찰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은 모릅니다. 다만 방주님께서는 빈말은 하지 않으십니다.”
“노 시주께서는 지금 어디에서 묵고 계십니까?”
“단죽현의 용죽객잔에 머물고 있습니다.”
“며칠이나 더 머물 생각입니까?”
“방주님께서 오 일 정도면 도착하실 겁니다. 그때까지는 머물 예정입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십시오. 윗분들께 보고한 후 답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바쁘십니까?”
“만약 거절하신다면 방주님께서 사천에 도착하시기 전에 전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삼 일 안에 답이 갈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노달호는 포권을 하더니 몸을 날려 산 아래로 사라졌다.
“장로님, 천호방이면 신생 문파 아닙니까?”
“신생 문파지만 지금 무림에서 영향력을 급속도로 키우고 있는 곳이다.”
“천호무적검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사천의 문파들과는 친분은커녕 얼굴 대면조차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갑자기 웬 배첩일까요?”
“배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문제구나. 왜 그들이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보냈는지, 이유를 모르겠구나.”
잠시 아미사를 내려다본 유진신니는 정인사태를 보며 다시 말했다.
“난 총막에 갈 것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지 말고 타종을 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그녀는 답도 듣지 않고 산 위로 몸을 날렸다. 여간해서는 허둥지둥 대는 법이 없는 유진신니가 이리 급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서, 서찰의 내용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는 알 수 있었다.
* * *
“이제, 육로로 가야겠네? 장강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좀 아쉽다.”
호주는 그들의 목적지인 아미산으로 가기 위한 수로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담수련이 아쉬운 듯 말하자 악불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호법님 말씀이, 사천도 대단히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하긴 사천의 풍광이 특이하다는 말은 나도 자주 들었어. 그런데 오늘은 내릴 거야?”
“지금 사 호법이 노 영주를 만나러 갔으니, 오늘은 배에서 쉬고 내일 아침 하선해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굳이 돈까지 주고 귀찮게 객잔 찾을 필요는 없겠지.”
잠시 말을 멈췄던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소군도 놀랐지?”
“뭐가 말입니까?”
“소군의 명성 말이야! 나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반응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
수적들을 제거하며 만난 금홍상단은 시작에 불과했었다.
금홍상단의 상선에는 무당파의 일대 제자가 상선의 보호를 위해 타고 있었다. 어차피 악불군이 아니었다 해도 수적들이 금홍상단의 상선을 건드린 것은 실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칭송은 악불군이 받게 되었고 무당파의 도사들도 그 먼 거리에서 화살 한 대로 배를 완파시키는 악불군의 무공에 압도당한 터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악불군은 생각지도 못한 소득까지 얻게 됐는데, 그들이 악불군을 무당파에 초대한 것이다.
담수련은 무림맹 전체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갈우명을 만나고 나오면서 무림맹의 간부들을 만날 좋은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거절한 것은, 어차피 만나 봐야 몸만 피곤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각 문파의 장들을 무림맹의 울타리가 아닌 개별적으로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발품을 팔아야 하는 귀찮음은 있지만 설득이 훨씬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문제는 방문을 하는 명분이었다. 어떤 무림 세력도 다짜고짜 배첩을 올린다고 만나 주지 않았다.
악불군처럼 무공이나 명성이 높아진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수월한 면도 있긴 하지만, 만약 거절을 당한다면 상황이 무척 껄끄럽게 변할 수도 있었다.
혹 만나 준다 해도 명성만 믿고 예의 없이 군다며 안 좋은 인상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무림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무당의 일대제자가 한번 방문을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천호무적검이 장강을 거슬러 오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들의 배가 멈추는 포구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무림인들이 나타나 인사를 한 것이다.
악불군은 누가 찾아오든 친절하고 예의 있게 반가움을 표했고, 그것은 곧 친분으로 이어졌다. 그들로서는 천호무적검과 친분이 있다는 자체가 명예이고 하나의 힘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악불군에게도 가장 취약점 중 하나인 인맥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좋은 징조였다.
“이제 시작이지요.”
악불군의 답에 담수련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한번 마음을 정한 그의 적극적인 행보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이번 사천 일만 잘 해내고 황상으로부터 무림십왕패를 영웅대회 없이 받는 넷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퍼진다면, 소군의 명성은 사황에 비견할 정도로 커질 거야. 다만 이후 일어날 시험은 통과해야겠지.”
“시험이요?”
“응, 시험. 이미 절대자로 군림하는 다른 분들이야 검증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권위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소군은 다르잖아? 한마디로 벼락 명성이야. 당연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거고, 소군을 이기거나 죽인다면 소군의 명성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도 나타날 거야. 최소한 백 번의 공격을 막아 내야 그때부터 더 이상 오판을 하는 자들이 없어지지.”
젊은 나이에 나타나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고 명성을 만들어 나가며 후대의 절대자감이라는 말을 듣는 후기지수들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진짜 절대자가 되는 자는 한 세대에 한 명 정도였다.
바로 담수련이 말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였다. 단 한 번의 패배로도 절대자의 명단에서 사라짐은 물론 목숨까지 잃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백 번까지 가면 되겠습니까?”
“그럼?”
“오십 번 안에 더 이상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지요.”
“정말 그럴 자신 있어?”
“전 자신 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지요. 하지만 아가씨 말씀대로 제가 절대 고수의 반열에 드는 것이 아가씨를 보호하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니, 상황에 따라서가 아니라 제가 목적을 지니고 행동을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다라기보다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달빛에 비친 악불군의 얼굴은 이미 절대자였다.
‘정말 너무 멋있다. 평생 소군의 옆에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휴우~’
담수련은 또다시 자신이 오음절맥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 * *
수십 명의 무인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군막의 안에는 동그란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승도속의 각기 다른 의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무림인들이 앉아 있었다.
당문의 문주인 당치웅과 아미파의 장문인 묘인신니, 그리고 청성파의 장문인 운비자였다.
원나라에 쫓겨나기 전 사천의 절대 강자로 불리던 세 문파의 수장들은, 원탁 위에 놓인 악불군이 보낸 서찰을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당치웅이었다.
“두 분 장문인께서는 천호무적검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빈도 역시 근래 원체 뜨거운 소문을 몰고 다녀서 이름은 들어 보았지만, 본 적은 없습니다.”
“빈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가 활동한 지역과 사천은 말이 같은 중원이지, 평생 마주칠 일이 없어도 될 정도로 먼 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가 왜 이런 서찰을 보냈는지 잘 모르겠군요.”
서찰에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같은 정파인으로서 다른 문파들이 재건을 해 나가고 있는 와중에 사천만 태룡세가 때문에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니, 허락만 해 준다면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천호무적검은 대단한 고수라고 소문이 났고, 이미 오룡세가 중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는 잠룡세가를 없앤 것으로 이미 그 실력을 만방에 알린 바 있었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무림맹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로서는 고민할 것도 없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오묘해서, 간단한 것이 사실 간단한 것이 아닌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선 그들은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이 일에 대한 어떤 서찰도 받은 적이 없었다. 더욱이 악불군은 무림맹 소속이 아니었다.
같은 정파라 해도 그들 같이 동병상련의 처지라면 모를까, 악불군처럼 사천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자가 스스로 도와준다고 나올 경우 거기에는 반대급부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묘인신니의 말이 끝나고 다시 모두는 침묵에 들어갔다. 나름 악불군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을 받아먹어도 문제가 없을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들이 승낙을 하느냐 안 하느냐로 무림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까지는 그들도 아직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