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51화>
251화. 사천(2)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당치성이었다.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릴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저희가 이곳에 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원나라도 하북으로 물러나 있고, 태양천 역시 사천 쪽은 신경도 못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림맹은 계속 기다리란 말뿐입니다. 본 가와 본 산이 바로 앞입니다. 제자들에게 계속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침통함이 섞인 당치성의 말에 묘인신니와 운비자의 표정도 굳어졌다. 특히 묘인신니는 본산의 사찰인 아미사를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럼 가주님께서는 천호무적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입니까?”
“서찰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천호무적검은 도와주겠다는 말만 써 놓았을 뿐 저희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저희가 이곳에 진을 친 것도 알고, 심지어 우리와 연락할 수 있는 신호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일단은 도움을 받은 뒤, 무림맹에서 맹도가 아닌 천호방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소명할 때에도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가주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 천호무적검이 어떻게 도울 것인지 저희는 아직 모릅니다. 우선 만나서 그분의 말을 들어 본 연후에 결정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불러 놓고서 조건에 대한 조율은 가능하지만 도움을 안 받겠다고 그냥 돌아가라고 한다면, 세상의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묘인신니의 말에 운비자는 어불성설이라는 듯 받았다.
마도라면 세간의 조롱이고 뭐고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으면 그냥 거절할 것이었다.
하지만 정파는 목숨보다도 체면을 더 중시한다고 할 정도로 남들의 조롱을 받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전 천호무적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태룡세가를 없앨 수만 있다면 최대한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치성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강하게 말했다.
고심하던 운비자도 결정을 한 듯 동조를 했다.
“빈도도 태룡세가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성파도 천호무적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곳이 동의한 이상 묘인신니로서는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 역시 심정적으로는 악불군의 도움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 결정이 된 것으로 알고 통고를 하도록 하지요.”
* * *
“많이 늦었는데 이만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밤이 깊어가건만 담수련은 선실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잠이 안 오네.”
“아가씨께서 안 내려가시면 사화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걱정 마. 내가 먼저 자라고 이미 얘기했어.”
“왜 잠을 못 이루십니까?”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바람을 기다리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연히 불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그도 바람이 불어올 확률은 칠 할 정도로 봤을 거야. 그동안도 그 정도로 불었지, 언제나 분 것은 아니니까. 거기다 원래 날씨라는 것이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변화무쌍하잖아.”
“그럼 마음고생이 좀 심했겠는데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했어. 제갈공명 정도 되는 분이면 바람이 안 불었을 때 차선책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가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글쎄…… 솔직히 나도 뾰족한 수가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어. 군사적으로나 병장기의 수를 따졌을 때 오나라와 유비군 연합 세력으로는 그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으니까. 제갈공명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운까지 걸었던 것 같아.”
“그런데 왜 지금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지금 제갈공명하고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어서.”
“다르지요.”
“어떻게?”
“제갈공명에게는 제가 없었지만, 아가씨께는 제가 있으니까요.”
“호호호~ 진짜 현답이네. 맞아. 당문은 무림 오대세가의 일원이었고, 청성파와 아미파는 구파일방의 일원이야, 원칙대로 한다면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은 신생 문파의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그들이 받아들일 확률은 삼 할이 채 안 됐을 거야. 하지만 소군이 있기 때문에 그 확률은 팔 할로 올라가. 제갈공명께서 바람을 기다릴 때의 확률보다 높다고 할 수 있지.”
“거기다 아가씨께서는 그들이 거절할 경우에 따른 차선책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 제갈공명과는 다르지요.”
“내가 차선책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제가 누굽니까? 제 표정만으로 제 생각을 읽는다는 아가씨의 경지에는 모자라지만, 제법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의 생각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말에 픽! 웃었다.
악불군의 성격상 자신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즉, 그는 아직 그녀의 생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나, 정말 악불군이 그녀의 그런 생각을 모르는지는 그만이 알 뿐이었다.
“잠시만요, 아가씨. 흑 호법!”
“침입자야?”
대화를 나누던 악불군이 갑자기 흑석영을 부르자 담수련이 즉각 낌새를 눈치챈 듯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그들의 앞에 흑석영이 스르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배의 경계는 어떻습니까?”
“완벽하게 서고 있습니다.”
“대략 삼십 명 정도 되는 자들이 수면 아래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흑석영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살수들은 수공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물 밖에서 물속의 움직임을 알아내는 것은 훨씬 어렵기 때문에 일부러 배를 타는 것을 기다렸다가 물속에서 기습을 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그들 역시 적의 물속 움직임을 간파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다고 매일 물속에 들어가 경계를 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물속에 신경을 쓴 것도 아니고 대화에 열중하던 악불군이 삼십 명이라는 구체적인 수까지 알아냈다는 것은, 그의 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얼마나 극대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금 이 배에는 백인막에서 특별히 수공을 집중적으로 수련한 수하들이 타고 있습니다. 제가 곧 수하들을 물속으로 들여보내겠습니다. 방주님과 아가씨께서는 걱정 마시고 지금처럼 편안히 대화를 나누십시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흑석영의 자신 있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악불군은 미소를 짓더니 다시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저희가 어디까지 대화했지요?”
“소군이 내 생각을 읽는다는 말까지 했어. 내가 차선책을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아니, 맞았어. 차선책을 생각해 놓긴 했는데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야. 그래서 무조건 사천의 정파인들을 설득하려고.”
“태룡세가는 만만치 않은 저력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잠룡세가보다는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
“잠룡세가는 문 군사님 덕분에 절반 이상이 저희에게 가담했기에 쉽게 없앨 수 있었을 뿐이지요.”
“대신 이번에는 사천의 삼 파가 우리에게 가담할 테니, 오히려 잠룡세가 때보다 더 쉬울 거야. 자신들의 문파를 다시 재건하려는 그들의 힘은 어쩌면 이미 태룡세가를 능가할지도 모르니까.”
“그럼 왜 태룡세가를 몰아내지 않고 저렇게 은인자중하고 있을까요?”
“언제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욕심이 여기서도 작동을 하는 것 같아. 자신들의 세력은 빨리 수복하고 싶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전력만은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그게 지금 우리에게 기회를 줄 거야.”
담수련은 이미 그들 삼 파의 수장들이 어떤 결정을 할지 확신하는 듯했다.
둘이 대화를 하는 사이, 그들이 있는 배 주위의 물들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물속으로 다가오던 자들이 흑석영의 명을 받은 수하들에 의해 역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제 군사,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태룡세가의 장로 좌효방은 군사 제우환의 말에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마룡세가가 혈해사계에게 멸문하면서 태룡세가는 말 그대로 고립무원에 빠져 있습니다. 계속 이대로 버티다가는 태룡세가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아직 원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고, 태양천도 건재하다. 반전을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태웅천의 말에 제우환은 죄송하다는 듯 몸을 한 번 숙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군사로서 가주님께 원하는 대책 하나 만들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반전은 어렵습니다. 우선 태룡세가를 산서성으로 옮겨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사료됩니다. 우선 세가가 존립을 해야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가주 태진성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태진성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태웅천이 재촉을 했다.
“무림맹에서 사천으로 원군을 보냈다는 보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즉, 지금 무림맹은 이곳 사천까지 상관하기에는 힘에 부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 군사 말대로, 이대로 버틴다면 결국 정비를 끝낸 무림맹에서 원군을 보낼 것입니다. 그 전에 당문과 청성 그리고 아미파의 잔당을 쓸어버리고 사천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면 무림맹으로서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새외연합이 요구한 사천의 반도 그들에게 넘겨주는 겁니다.”
“그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
“하지만 우리만으로 무림맹을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외연합과 함께한다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부역자니 뭐니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흐지부지될 겁니다. 그때까지 버티는 것이지요.”
태진성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소가주님의 의견은 한 가지가 반드시 요구됩니다. 바로 사천을 대표하는 당문과 청성파 그리고 아미파를 우리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양천과 어찰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완전 제거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저번 회의 때 그 세 문파가 모여 본 가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그때는 잔당이었지만 지금은 상당히 큰 규모의 전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의 정보망으로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고 어렵거니와, 찾는다 해도 공격은 수비보다 세 배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공격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새외연합에서는 사천의 경계에 연합 무인들을 집결해 놓고는 아버님의 승낙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그들을 들어오게 한다면 되지 않겠습니까?”
“본가를 무림맹 놈들은 부역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하나 새외연합은 말 그대로 새외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사천의 반을 넘긴다는 말이 들어가면, 그땐 부역자 처단이 아니라 새외인의 중원 침입이 됩니다. 오히려 무림맹에서 더 많은 전력을 사천에 투입할 수도 있습니다.”
제우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처지가 지금 풍전등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산서로 옮긴다는 것은 원나라와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의미였다.
원나라가 계속 밀려 새외로 쫓겨나가게 된다면 그들 역시 새외로 나가야 했다. 중원에는 이제 영원히 발을 붙이지 못할 확률이 컸다. 더욱이 새외로 가는 순간 그들을 반기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바로 이방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제 군사.”
“예!”
“산서로 옮긴다면 본 가의 명맥을 어느 정도 더 이어 갈 수 있지?”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만약 본 가가 이곳을 완전히 버리고 옮긴다면 수하들이 다 따라나설 것 같으냐?”
“그건…… 어느 정도의 이탈자는 예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동요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세가 자체를 옮긴다고 했을 때, 정녕 어느 정도의 이탈만 있을 것이라고 믿느냐?”
“…….”
제우환은 이번에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군사로서 태룡세가가 존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 이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 것인지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일부러 외면한다고 봐야 했다. 그 역시 그의 제안이 차선이 아닌 차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본 가는 여기서 승부를 본다. 이기면 너희들에게 더 큰 부귀영화를 약속하겠다.”
태웅천의 결정에 제우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태룡세가의 멸문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