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53화 (253/472)

<천검지애 253화>

253화. 전조(2)

담수련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까, 화제 바꾸는 거지?”

‘하하~ 이 와중에도 눈치는 정말 빠르시다니까.’

그녀의 말에 악불군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겁니다.”

“진짜야?”

“예, 저는 아가씨가 상황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춰 계획을 짠 내용을 듣는 것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담수련의 기분을 풀어 주는 데는 이제 거의 신경에 든 듯한 악불군이었다. 그 말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담수련은 신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익산에서 관도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거 알지?”

“예, 저도 지도를 봤습니다.”

“그 길들이 향하는 곳이 아주 재미있어. 태룡세가가 본다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거든.”

“그럼 아가씨께서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태룡세가의 대응이 달라지겠군요?”

“지금 태룡세가의 상황은 늑대 떼에 둘러싸인 곰의 모습이랄까? 굉장히 예민한 상황인지라 갖가지 상상을 다 할 거야. 제우환이라는 자가 상당히 똑똑하다고 문 군사께서 그러셨으니, 어느 길로 가는지를 보고 나름 우리의 목적을 눈치챌 수 있을 거고.”

“그럼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안 가. 그냥 여기서 며칠 머물면서 헷갈리게 하려고.”

“그래도 삼파의 어른들은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보고는 받았으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할 생각이야.”

“숨어 있는 상황 같던데 올까요?”

“우리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잖아? 그렇다면 이젠 그들이 성의를 보일 때야. 도와주면서 오라는 대로 가 주기까지 한다면 얕보일 우려가 있어. 명색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일원이이야. 분명 내 뜻을 눈치챌 사람이 있을 거야.”

“저희에게 오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이번 계획은 포기해야지.”

“그럼 그냥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은 못 가지. 하지만 그들을 돕지는 않을 거야.”

“전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소군이 새로운 무림의 영웅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잠룡세가를 없앤 것만으로는 좀 부족해. 우선 아버님께서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에 빛이 좀 바랬고, 잠룡세가를 없애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옥의 티야. 하지만 태룡세가는 아버님과 맞먹는 명성을 지닌 가주가 아직 건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군이 태룡세가를 없애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저희들만으로 태룡세가를 없앤다는 말입니까?”

“내 계획은 두 개야. 하나는 사천의 삼파를 도와 태룡세가를 없애는 거. 그렇게 되면 삼파는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될 거고, 나아가 무림맹에서 제갈 대협의 힘이 되어 줄 거야.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만으로 태룡세가를 없애고 가는 거야. 솔직히 난 그게 더 좋을 것 같긴 해.”

사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명성을 더 빠르게 높이기 위해서는 삼파와 연합하지 않고 천호방만으로 태룡세가를 없애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강에서 사천까지 가서 태룡세가를 없앤다면 무림맹에서 천호방의 의도를 의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삼파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배첩을 보낸 것이다.

그 와중 삼파에서 사천까지 온 그들을 마중도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낮은 지위의 사람이 온다면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을 취소할 명분이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토해 냈다.

“아가씨, 지금 저를 따라온 방도들이 모두 합쳐서 서른두 명에 불과합니다. 거기다 호법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정면 대결에 약한 살수 출신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만으로 태룡세가를 없애겠습니까? 그건 너무 무모한 생각입니다.”

“소군, 내가 언제 무모한 계획 세우는 거 봤어?”

“예?”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했다. 사실 담수련의 계획은 지금껏 항상 무모했다.

물론 무림으로 나오기 전 담무룡이 악불군에게 시술을 하면서 기대했던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그러나 그 수준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죽었을 확률이 컸다.

그녀의 무모한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악불군이 담무룡이 기대했던 최대의 수준보다 몇 배 더 강한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대답이 어째 이상하네? 그러니까 내가 계속 무모한 계획을 짜왔다는 말이지?”

“계속은 아니고 이따금 그랬지요.”

“소군은 정말 내가 무모했는데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만…….”

악불군은 어쩌면 그녀 말대로 무모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까지 이미 다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소군이 스스로의 능력을 언제나 과소평가하니까 내 계획이 무모했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저도 제 수준을 몰랐는데 아가씨께서 어찌 아시고요?”

“내가 비록 무공은 약하지만, 남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 수준은 잘 맞추는 거 알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소군과 상대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고수들이 많았어. 그런데 소군은 언제나 여유만만했거든.”

“사실 저 여유만만한 적 별로 없습니다. 싸울 때마다 긴장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군이 나보다 스스로를 모른다고 하는 거야.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소군의 몸은 알아.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

악불군은 그녀의 말에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몸이 스스로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막상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지금까지 틀린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 마땅하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모르네? 소군은 자신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잖아?”

“그렇지요.”

“소군이 이기지 못한다면 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지?”

“그거야…….”

“소군이 내가 위험해질 행동을 할까?”

“절대로 안 하겠지요.”

“그러니까 상대를 이길 뿐만 아니라 나까지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도망 안 가고 싸운 거야.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몸은 알고 있는데 소군은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한 거고. 겸손이 몸에 너무 배서 그래.”

“적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가씨께서 명을 내리셔서 싸운 적도 많습니다.”

“내가 위험해지는데 소군이 내 명을 듣는다고? 소군은 다른 말은 다 들어도 내가 위험하다 싶으면 절대로 내 말 안 들어.”

“……하긴,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

“내가 주위 상황에 얼마나 예민한지 알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담수련은 어려서부터 많은 기습을 당해서인지 미미한 수준의 내공임에도 위험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간파하곤 했다.

심지어 악불군이 눈치를 못 채고 있을 때도 그녀가 뭔가 불안하다고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을 만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사실 예전 세가에 있을 때는 소군이 옆에 있어도 불안할 때가 많았어. 소군이 다칠까 봐. 하지만 근래는 한 번도 불안한 적이 없어. 그만큼 소군이 강하다는 거야. 알았어?”

뭔가 논리적이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하게 반박하기도 어려운 담수련의 설명에, 악불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움을 취소하고 저희만으로 태룡세가를 없앤다면, 사천의 삼파를 저희의 우호적인 세력을 만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만으로 태룡세가만 없애면 그들은 더 좋아할 거야. 오히려 우리를 홀대한 것을 후회하면서 더 잘해 주려고 할걸?”

‘새편작 어르신께서 아가씨가 완전히 각성하면 누구도 따르지 못할 두뇌를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악불군은 모든 상황이 담수련의 계획하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오음절맥이 각성하면 인간 이상의 머리를 지니게 되지만 실지로 그런 초인적인 책사가 나타난 적이 없는 이유는, 각성을 하기 전에 다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담수련의 이런 놀라운 능력이 반가울 리 만무했다.

* * *

“악산 조송현에 머물고 있으니 그쪽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저희 보고 그쪽으로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까?”

묘인신니의 말에 당치성은 살짝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자신들의 처지가 지금 집도 절도 없는 상황이고 악불군은 집을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들이 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은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일원이었다는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이제 원나라가 물러났고 다시 중원 무림이 재건한다면 천호방과 자신들은 위치가 다르다는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무림 천 년 역사 속에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문파들이 명멸했고, 대부분은 삼십 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들은 수백 년을 전통을 이어 왔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지금 태룡세가에서도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을 텐데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그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 되니 옳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썼더군요.”

“악 방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묘인신니의 부언에 운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기분이 상했던 당치성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럼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비록 신흥 문파이긴 하지만 강호에서의 명성도 있고 하니 장로급은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비자의 말에 묘인신니나 당치성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 방파의 방주라면 구파일방에서는 장로보다 한 급 낮은 지위를 보내도 상관이 없었다. 장로를 보내는 것이 결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문제는 몇 명을 보내느냐였다. 삼파에서 각기 장로를 한 명씩 뽑아 보내는 것이 맞는 일이지만, 그건 자신들이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마음에 안 든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파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존심과 명분 그리고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체면이 걸려 있었다.

그러자 아미의 묘령신니와 청성의 한태훈과 함께 아무 말 없이 대화만 듣고 있던 당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들 셋은 각 파의 군사격으로 대화를 모두 들은 이후 돌아가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만, 지금 같이 세 수장이 대화를 나눌 때는 끼어든 적이 없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당용아! 네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텐데 무슨 짓이냐?”

“아닙니다. 당 대협께서 이렇게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으니 들어 보시지요.”

그러자 운비자가 급히 당용을 두둔하고 나섰다. 물론 당치성도 예의상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다.

“두 분 장문인께서 허락하시니 말해 보거라.”

“전 각 파에서 장로님들을 보내야 함은 물론, 가장 지위가 높은 분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용의 말에 모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있느냐?”

“태룡세가가 감시하기 때문에 못 온다는 것은 핑계가 분명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

“제가 알아보니 천호무적검은 사천으로 오는 동안에도 상당히 떠들썩하게 왔습니다. 그렇다면 태룡세가에서 감시를 할 것이라는 정도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시가 두려웠다면 저희들을 부르는 것보다는 비밀리에 오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럼 왜 태룡세가에서 눈치채게 와서는 굳이 우리더러 오라고 했다고 생각하느냐?”

“저희를 도와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우리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와주겠다고 먼저 청한 것인데,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라니 말이 되느냐?”

“절강에서 사천까지 도와주러 올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종용에 의해 왔다면 말이 됩니다. 만약 저희가 그를 홀대해서 화가 나서 돌아갔다면 종용한 자에게 핑계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치성은 묘인신니와 운비자를 쳐다보았다.

당용의 짐작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추측이었지만 모두에게 한 번 더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