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54화>
254화. 사천 삼파(1)
잠시 생각하던 묘인신니가 당용에게 물었다.
“당 대협께서는 누가 악 방주에게 종용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아왔고, 우리를 만날 수 있는 신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무림맹에서도 소수의 간부뿐입니다.”
당용은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긴 했다. 하지만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그 이름을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당 대협께서는 우리가 최고의 예우를 해서라도 악 방주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저희에게는 도움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자신들 문파를 재건하기에도 바쁜 상황에서 희생까지 감수하고 우리를 도와줄 정파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치면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량수불…… 빈도의 생각에도 이왕 도움을 청한 이상 최대한의 예우를 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운비자가 당용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의견은 체면을 보다는 실리를 찾는 것으로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 버렸다.
* * *
“소군은 아직도 수련 중이야?”
천호방은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린 후, 사흘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칩거하고 있었다.
붓으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던 담수련은 갑자기 악불군이 보고 싶은 듯 추국에게 물었다.
“신호만 보내면 즉시 온다고 하셨습니까? 부를까요?”
“수련하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지. 저녁은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지 뭐.”
상황에 따라 자신들만으로 태룡세가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말에,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사천의 삼파에서 답이 올 때까지 수련을 좀 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동안에도 시간만 나면 수련을 했지만 담수련에게 수련을 위해 따로 시간을 달라고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그였다. 그것은 그만큼 이번 싸움을 큰 싸움으로 인정하고 최선의 상태로 싸움에 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실 악불군은 그동안 계속 그가 익힌 무공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천륭검보에서 아주 특이한 것을 발견했었다.
천륭검가의 가주였던 검황 구문황은 모든 상대를 검으로 꺾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구문황의 비급을 검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악불군은 천륭검보가 사실 검보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천륭검보의 모든 자세는 검뿐 아니라 도와 창을 비롯한 모든 무기를 들고 펼칠 수 있었다.
심지어 신법과 보법 그리고 권법으로도 운용이 가능했다.
구문황조차 알아내지 못한 사실을 그가 깨달을 수 있던 까닭은 배교비전 덕이었다.
배교비전에는 많은 사술과 환술이 기록되어 있었다. 악불군은 그중에서 실지 무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법들을 수련해 왔다.
그러던 중, 배교무공에서 천륭검보의 자세와 흡사한 것을 여럿 발견했다.
사악한 무공이라는 배교의 술법이 천고의 절기라는 천륭검보의 자세와 유사성을 보이자, 악불군은 좀 더 깊숙이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면서 일부러 익히지 않았던 사술과 환술까지 수련을 시작했는데, 거기서도 유사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배교의 환술에서 유사함을 보이는 천륭검보의 자세를 이용해 보법을 시전한 결과 환술과 비슷한, 아니 오히려 더 신묘한 보법을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천륭검보를 검만이 아니라 모든 무공에 접목하기 시작하자 그의 무공에서 예전에 없던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덕에 그는 담수련과 대화를 하면서도 무공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무당의 양의심공과 같은 그것은, 그의 무공을 진일보시키는 데 대단한 효용성을 주었다.
그럼에도 하루 종일 분석하고 연구한 무공을 몸으로 수련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언제나 부족했다.
그가 담수련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가 바로, 태룡세가를 공격하기 전에 그가 깨달은 무공들을 직접 시전해 보기 위해서였다.
담수련은 악불군을 생각만 해도 행복한 듯 미소를 짓더니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계속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그림을 직접 그릴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가씨, 그런데 그게 무슨 그림입니까?”
그녀의 옆에서 먹을 갈던 연화가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하더니 도저히 못 참겠는지 묻고 말았다.
“너희들 보기에는 무슨 그림 같아?”
“제가 보기에는 큰 나무 같은데?”
흑란의 말에 매향이 아니라는 말했다.
“이게 어떻게 나무냐? 내가 보기에는 구름 같은데?”
“내 눈에는 넝쿨들이 막 엉겨 있는 모습 같은데?”
사화들이 중구난방으로 다른 답을 하자 담수련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 역시 지금 그녀가 그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이것도 안 되겠다.”
담수련은 종이를 떼어 옆에 놓고는 새 종이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떼어 낸 종이가 수북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오십 장 이상은 그린 것으로 보였다.
그녀가 집중하며 역시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밖에서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순간 담수련의 얼굴이 환해졌다. 표정만 봐도 그녀가 악불군이 수련을 끝내고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어서 들어와.”
악불군이 들어서자 사화는 몸을 일으켜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뭐하고 계셨습니까?”
“장보주에서 보인 그림자들을 연결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유의미한 형체는 아직 안 그려지네.”
그녀가 지금 그리는 것은 바로 고철황이 혈교에서 훔친 장보주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들이었다.
요즘 그녀와 악불군은 자기 전에 장보주를 살펴보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그리셨습니까?”
“소군이 없으니까 할 게 없네. 그래서 그림만 그렸지 뭐.”
악불군 앞에서만은 여전히 아기 같은 그녀의 답에 미소를 지은 그는,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한 장씩 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림인지 그냥 낙서를 한 것인지 아니면 기호를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같이 장보주를 연구한 악불군은 그녀의 그림이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인지 즉각 알 수 있었다.
“뭐 느껴지는 거 있어?”
“불에 비친 그림자보다는 선명하긴 한데, 여전히 뭐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는데요?”
“대단히 머리가 좋은 자가 만든 게 분명한데, 내가 질 수는 없지.”
예전부터 누구와 경쟁을 하는 등의 호승심이 전혀 없던 그녀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데 평소와 다르게 머리싸움에서 지려는 듯하자 괜한 승부욕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지?’
여러 장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비교하던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특이한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흑석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방주님, 사천 삼파의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악불군은 손에 든 그림들을 흘깃 보더니 아쉬운 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가씨, 생각보다 그들이 빨리 온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누가 몇 명이나 왔는지가 중요하지. 가 보자.”
붓을 내려놓은 담수련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얼굴에 붙이더니 만지기 시작했다.
역용술의 달인 중 한 명인 고철황의 가르침에 천고의 머리를 지닌 그녀의 능력이 합쳐지자 그녀의 역용술은 대단히 일취월장하여, 삼 보를 걷는 동안 얼굴을 변형시킬 정도가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평범한 여인의 얼굴로 변한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나 어때?”
“여전히 예쁘십니다.”
“피! 역용을 했는데 어떻게 예뻐? 소군은 거짓말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할 줄 아네?”
“전 아가씨께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예쁘십니다.”
악불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에게 담수련의 얼굴이 진짜 예쁘고 안 예쁘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담수련이기에 예쁘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 * *
“숙부님,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자 말입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빈청 대용으로 사용하는 객잔의 가장 큰 방으로 안내된 당용은 당치우를 보며 물었다.
“묘한 것이 아니라 강한 거다. 천호무적검의 연배가 대단히 젊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저런 자를 방도로 들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들을 안내한 사람은 흑석영이었다. 사실 그가 어려서 백인막주에게 길러지다시피 했기에 살수가 되었지만,남들이 느끼기에는 한 문파의 수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저자만 보더라도 천호방이 신생 문파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성파의 장로인 건류상도 흑석영의 범상치 않은 기도에 놀란 듯 말했다.
“아미타불, 장문인께서 최대한 예우를 갖추라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미파의 유진신니도 동감한다는 듯 받았다.
“방주님 오셨습니다. 들어가셔도 되겠습니까?”
그때 방 밖에서 흑석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세 명의 장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악불군을 보며 눈이 커졌다.
커다란 키와 날렵하게 빠진 몸매, 거기다 잘생긴 얼굴은 서글서글한 눈은 누가 보아도 호감을 느낄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몸에 흐르는 기도였다.
‘이런 청년이 있다니……?’
당용은 자신의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악불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저는 천호방의 방주인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어르신들을 감히 이쪽으로 오라고 한 것에 대해 먼저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악불군이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말하자, 당용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들을 도와주기 위해 먼 길을 오셨는데 당연히 저희들이 마중을 나와야지요. 저는 당문의 장로인 당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수석 장로이시자 가주님의 동생이신 당치우 장로님이십니다.”
“당치우라고 합니다.”
소개가 끝나고 당치우가 포권을 하자 악불군이 다시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이미 인사를 먼저 했는데 다시 받는다는 것은 매우 극진한 예우였다.
“이분은 아미파의 유진신니 장로님이십니다.”
“아미타불 유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청성파의 건류상 장로님이십니다.”
악불군은 소개를 받을 때마다 모두 포권을 하며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이쪽은 본 방의 군사이십니다. 담 군사라고 칭하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담수련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악불군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먼저 앉으십시오.”
“그래도 방주님이 주인이고 저희는 손님인데, 먼저 앉으셔야지요.”
“세 분 어르신이나 당 대협께서 당연히 저보다 선배님이시고 연세도 위이신데, 제가 어찌 먼저 앉겠습니까?”
호감을 주는 인상에 풍기는 고고한 기도, 거기에 전혀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 겸손함까지 악불군은 첫 인상부터 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뒤에 서 있던 담수련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악불군은 남들과의 교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성격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담수련의 호위로 길러지며 주위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암살자로 보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구든 가까이 오면 경계부터 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담수련의 뜻을 따라 영웅이 되기로 마음을 먹자 모든 행동이 달라져 버렸다.
영웅은 그를 추종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인맥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녀는 악불군에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지금 그가 보이는 모습은 그녀가 보아도 멋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력이 철철 풍기고 있었다.
자리에 앉고 차를 한 모금씩 마신 후, 당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주님의 배첩을 받은 후 저희 세 문파의 장문인들께서는 많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가장 주된 관심사가, 방주님께서 가까운 정파도 많은데 왜 굳이 사천에 있는 저희를 돕겠다고 하셨는지였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담수련이 말을 받았다.
“아마 본 방에 무슨 저의나 의도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걱정을 하신 모양이군요?”
너무 직설적인 말에 당용은 약간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의니 의도니 그런 말이 오간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런 대화는 서로 간에 솔직해야 신뢰가 쌓이지 않겠습니까? 본 방의 방주님께서 왜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