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56화>
256화. 전쟁의 서막(1)
“군사라는 놈이 지금 같이 엄중한 시기에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고 계속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이나 지껄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태웅천이 검집에 검을 넣더니 경계 무사를 보며 다시 소리쳤다.
“시체를 치우고 피를 닦아라. 꼴 보기 싫다.”
“예!”
“아버님, 제 군사는 이미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본 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버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산서 얘기를 자꾸 꺼낸다는 것은 불충입니다. 죽어 마땅했다고 봅니다.”
태진성은 모두의 표정이 안 좋자 급히 나서 태웅천의 행동을 두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간부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제우환이 그동안 내놓은 계책들은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가주님과 소가주님께서 내놓는 계책을 모두 반대했습니다. 죽어 마땅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밀리는 정책은 없다. 사천은 태룡세가의 것이고, 그것은 누가 온다 해도 변할 수 없다. 은명신군!”
“예!”
“태룡원의 원로들은 모두 소집해라. 태룡세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천하에 알려 주겠다.”
태웅천은 수하들의 동요가 극으로 치닫고 있고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이대로 계속 물러난다면 그대로 멸문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 돌파를 반대하는 간부들도 적지 않은 터라, 반대하는 자들의 중심인 제우환을 반박할 새도 없이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사천을 철수한 이후 문을 꼭 닫고 두문불출하던 태룡세가가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흑 호법!”
악불군의 한마디에 흑석영이 스르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예!”
“다 처리했습니까?”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던 터라 금방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그들이 전서를 날리자마자 제거했지요?”
“예, 전서를 날리는 것을 보자마자 제거했습니다.”
“그럼 신시에 출발합니다.”
“알겠습니다. 나오시면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흑석영이 사라지자 담수련이 물었다.
“소군, 자신 있지?”
싸움이 시작하기 전이면 언제나 그녀가 묻는 질문이었다. 항상 있던 물음이었지만 그 대답은 평소와 달랐다.
“걱정 마십시오.”
노력하니 최선을 다하니 하던 예전의 대답과는 다른 당당한 악불군의 답에 담수련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듯 다시 말했다.
“내가 태룡세가의 고수들을 소군 혼자 상대하도록 계획을 짠 것이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해.”
“아가씨께서 저를 그만큼 믿으신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아가씨의 믿음에 부응할 생각입니다.”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되니까, 힘이 부친다 싶으면 무조건 피해. 내겐 소군이 안 다치는 것이 가장 중요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호호호~ 갑자기 너무 큰소리를 치니까 내가 오히려 어리둥절해지네. 그래도 난 지금의 소군이 더 좋다.”
담수련은 이런 식이면 악불군이 자신이 없다 해도 견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말씀을 듣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제가 너무 안이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아가씨 말씀대로, 제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하게 행동을 할 생각입니다.”
“소군, 운기조식을 좀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몸은 충분히 풀었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됩니다.”
그러자 담수련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해를 살폈다.
“모두 약속된 시간 안에 도착한 후에 시작하는 것이 좋아. 아직 반 시진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그동안 얘기나 좀 나눌까?”
“알겠습니다.”
그동안 그가 상대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싸움을 눈앞에 둔 둘이었지만 전혀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이미, 함께만 있다면 어떤 위험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치우야.”
“예, 형님.”
“확실히 함정은 아니라는 말이지?”
성도로 제자들을 데리고 달려가던 당치성은 잠깐 휴식시간이 되자 당치우에게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태룡세가에 대한 원한을 생각하면 휴식이고 뭐고 단숨에 성도로 달려가 모조리 주살하고 싶었지만, 말 때문에라도 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용이와 유진신니, 그리고 건 장로도 믿을 만하다고 얘기했습니다.”
당치우의 말에 당치성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 있는 백여 명에 가까운 당가의 제자들은 오늘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수십 년의 염원을 오늘 이룰 수 있겠지만, 잘못되면 오늘 이 아이들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나는 당가를 완전히 몰락시킨 최악의 가주로 기록될 게야.”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치우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두 분 장문인께서도 잘 가고 있겠지?”
“약속 시간까지 맞게 도착하실 것입니다.”
“말들이 다시 힘을 찾은 것 같구나. 다시 출발하자.”
긴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흘깃 본 당치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타며 말하자, 당치우가 모두에게 소리쳤다.
“출발한다!”
그러자 모두는 일사불란하게 다시 말 위에 올랐다.
* * *
다시 간부회의가 열린 태룡세가의 정청.
제우환이 죽은 후 새로이 군사로 뽑힌 윤진평은 사색이 된 얼굴로 보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정보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잘하지만, 그 정보를 이용하여 계책을 만들거나 계획을 세우는 머리는 없는 인물이었다.
즉, 제우환을 보좌하는 데는 아주 유용한 인물이었지만 군사 역할을 하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제우환의 목이 잘리고 자신이 군사가 되었다는 말에, 그는 지위가 높아졌다고 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윤 군사.”
“예에에옛!”
은명신군의 부름에 윤진평은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당문과 아미파 그리고 청성파에 대해서 들어온 정보가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봐라.”
“그, 그, 그게…….”
“정신 못 차리겠느냐?”
“아, 아닙니다!”
“가주님께서 곧 오실 텐데 그따위로 보고를 하다가는 네 목도 안전하지 못할 게다.”
그렇지 않아도 사색이 되어 있던 윤진평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켰다.
“지, 지금 들어온 정보만으로 분석한 결과 그들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는 네 군데로 추, 추측이 되고 있습니다.”
“그건 제 군사가 이미 보고했다. 새로운 것이 없느냐는 말이다.”
“본 가의 정보망이 마, 많이 망가진 상황이라 그 삼파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것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많지 않아도 들어온 것이 있긴 있다는 말이 아니냐?”
“그, 그렇습니다.”
“그럼 당장 보고하지 뭐하는 거냐?”
“지, 지금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 있나! 보고의 원칙도 모르느냐?”
“죄, 죄송합니다. 제가 서면 보고는 많이 했지만 구두 보고는 그다지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사설이 많다. 새로운 정보나 빨리 보고해라.”
“예! 며칠 전 약초꾼들이 아미사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어디서 봤다고?”
그때 태웅천이 태진성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윤진평은 급히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아미사라고 했습니다.”
“아미사면 이미 폐허가 된 아미파의 본산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귀신을 봤단 말이지?”
태웅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사의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장로인 파면신군을 보며 말했다.
“파면 장로.”
“예, 가주님.”
“아미파를 공격할 때 파면 장로가 갔었지?”
“예! 태양천의 요구에 제가 태룡검단 오십 명을 데리고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아미사에서 사람이 살 수 있겠느냐?”
“대웅전을 파괴하고 불까지 질렀습니다. 사람이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에서 귀신을 봤다. 만약 귀신이 아니라면 뭐겠느냐?”
“본 가를 노리고 사천으로 들어왔다는 삼파 연합 세력이 아미산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약초꾼이 귀신으로 혼동을 했다면 무림인일 확률이 많다. 그렇다면 아미사 근처에 무림인들이 있다는 의미이니, 그놈들이 맞을 것이다.”
“당장 수하들을 끌고 가 놈들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파면신군이 벌떡 일어서자 태웅천은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우리가 먼저 그놈들을 찾아낸다면 승기를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력대부터 보낼 수는 없다. 우선 발 빠른 놈들 몇 명을 아미산으로 보내 은밀하게 조사를 하게 해라.”
태웅천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만약 삼파 연합을 먼저 제거한다면 무림맹의 압박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럼 그 안에 새외 연합과 협조 체제를 만든다면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애들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파면신군이 나가자 태웅천은 윤진평을 보며 다시 물었다.
“또 다른 보고는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말해 봐라.”
“악산에 머물고 있는 천호방을 감시하던 본 가의 감시자들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끊기다니 그게 말이냐?”
“네 시진마다 그들의 동향을 전서구로 계속 보고했는데, 지금 보고가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안 왔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느냐?”
“원래대로라면 두 시진 전에는 전서구가 들어왔어야 합니다.”
“악산에서 여기까지 달려온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네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네 시진이라……?”
태웅천의 검미가 좁아졌다.
감시자들의 보고가 끊긴 것이 어떤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인지 짐작이 쉽지 않아서였다.
제우환이 있었다면 벌써 정리를 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상정해 그에게 대비책을 말했을 것이었지만, 이미 그는 없었다.
‘화가 나서 죽이긴 했지만, 막상 없으니 아쉽군.’
태웅천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는 주위를 보며 물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이놈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닐까요?”
호법 중 한 명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듯 말하자 윤진평이 급히 부언을 했다.
“저희 정보군사전 무사들은 제 군사님께서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 보고를 올릴 시간을 잊거나 게으름을 피워 늦게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럼 두 시진 전에 도착해야 할 전서구가 왜 아직 안 오고 있는지 네가 말해 봐라.”
태웅천의 말에 윤진평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얼굴에는 괜히 나선 것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주님께서 묻는데 뭐하는 거냐!”
태진성의 외침에 윤진평은 또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저는 분석만 해서 올릴 뿐 정보에서 상황을 예측하는 능력은 어, 없습니다.”
태웅천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윤진평!”
“예, 옛!”
“일각 시간 준다.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상관없다. 내가 그럴 만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예측을 아무거나 내놔라. 만약 내놓지 못한다면 네가 태룡세가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윤진평은 등골이 오싹해 옴을 느꼈다. 필요가 없다는 것은 죽인다는 말과 동의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윤진평의 눈이 데굴거리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뭔가를 짜내야 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일각이 다 되어 가는 순간 그의 머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가, 가, 가주님.”
“말해 봐라.”
“천호방에서 저희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하들을 제압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진평은 자신의 목숨을 건 말을 하자마자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자 슬쩍 고개를 들어 태웅천을 쳐다보았다.
“감시를 피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굳이 본 가의 감시자들을 제압했다면 본 가로 오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윤진평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순간 태웅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은명신군!”
“예, 가주님.”
“당장 세가에 비상을 걸어라.”
갑작스런 명령에 은명신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댕! 댕! 댕! 댕…….
하지만 그가 비상을 걸기도 전에 이미 비상종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