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57화>
257화. 전쟁의 서막(2)
비상을 걸라는 태웅천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비상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는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가주님께서 방금 명령을 내리셨는데, 어떻게 알고 비상을 건 걸까요?”
은명신군의 말에 태웅천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머리가 없어도, 지금 타종 소리가 내 명으로 울렸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는 거냐? 당장 나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은명신군이 급히 나가자 태웅천은 태진성을 보며 말했다.
“넌 태룡무단과 태룡검단을 이끌고 정문으로 가라. 나도 곧 따라가겠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너희들도 모두 나가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무엇 하느냐?”
아직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 듯 머뭇거리던 다른 간부들은 태웅천의 호통에 급히 밖으로 튀어 나갔다.
“도대체 머리들이 없어! 상황 보면 알아서 빨리 움직여야지 뭘 멀뚱거리고 있는 거야. 너무 빨리 죽였나…….”
태웅천은 생각보다 제우환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제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 * *
태룡세가는 거대했다.
당연히 정문 역시 평범한 장원의 세 배 이상의 크기로, 커다란 마차 두 대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태룡세가의 정문 앞에는 족히 삼십 구가 넘는 시신이 피를 흘리며 자빠져 있었다.
“정문을 지키던 경계 무사들이 죽어 있어 상태를 보려고 나갔는데, 나가는 족족 죽는다는 거냐?”
“예.”
은명신군의 질문에 경비대장 안홍명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서 비상 타종을 울렸고?”
“제가 보는 앞에서 죽어 나가는데, 저는 상대의 모습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비상 타종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네가 보는 앞에서 수하들이 죽어 나갔는데, 넌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냐?”
“그, 그게……”
안홍명은 은명신군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직감하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수하들이 죽는 모습을 보았으면 가까이 있었다는 것인데, 너는 공격을 안 받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
“……정문을 지나 일 장을 넘어가면 그때부터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은명신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수법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구천마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구천마성에서 여기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텐데?’
그가 아는 구천마성은 절대 이익이 없는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태룡세가를 없앤다 해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만약 자신들도 부역자를 제거했다는 명분을 만들고 싶었다 해도, 가까운 화룡세가를 치면 될 일이었다.
“수하들이 앞에서 죽어 나가면 당장 달려가서 어떤 놈들인지 잡아낼 생각을 해야지, 죽음이 겁이 나서 일 장 밖으로 못 나가고 전부 여기서 진을 치고 있었다는 거냐?”
“은명신군, 어떤 놈들이 감히 여기까지 온 것이오?”
즉시 답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안홍명은 들려오는 소리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급히 허리를 숙였다.
태룡원의 원로 여섯 명이 나타난 것이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정문만 나가면……”
은명신군에게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은 그들은 정문 밖을 한 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나가야 공격을 한다면, 우리가 직접 나가서 어떤 놈들인지 잡아내면 되겠군. 가세.”
여섯 명의 태룡원 원로들은 정문을 나섰다. 산보를 나서듯 평온한 발걸음이었지만, 사실 그들의 위치는 육합진의 방위로 완벽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백전노장인 그들도 자신만만하게 나섰지만 최소한 상대가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녔는지 정도는 알았어야 했다.
선두에 선 원로는 무엇인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감히 우리에게 이따위 장난을 치다니!”
그는 빠르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이 크지 않은 화살이 날아오는 것임을 깨닫고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컥!”
원로는 짧은 괴성을 터뜨리며 뒤로 네 걸음이나 물러서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의 심장에는 작은 화살이 정확히 박혀 있었다.
악불군은 철뇌마궁에게 공격을 당한 후 궁술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다른 무기로는 절대 불가능한 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에다, 검이나 도에 비해 절대 꿇리지 않는 정확도와 위력에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활의 활용도에 흥미를 갖고 수련을 시작하자, 담수련은 육관우의 혈단궁을 참고해 악불군이 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활을 만들었다.
이후 천호단궁이라 불리며 이기어검과 함께 악불군을 상징하는 수법이 오늘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남은 다섯 명의 원로들은 경악하며 급히 오행진으로 방어 형태를 바꾸었다.
죽은 원로는 그들 중 가장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던 자로, 고작 장난감 같은 화살에 죽을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방어는 곧 큰 허점을 드러냈다. 당연히 또 다른 활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쪽을 주시했는데, 땅 밑에서 한 인영이 나타나더니 그들의 하체를 공격한 것이다.
“아아악!”
또 한 명의 원로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그의 두 다리는 무릎 위에서 정확하게 잘려 있었다.
악불군이 배교의 탈혼귀무 환술과 자신이 익힌 보법 그리고 천륭검보에서 깨달은 움직임을 조합해 만들어낸 보법은 실로 현묘해서, 그들은 상대의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믿었던 태룡원의 원로 여섯 명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그것을 보고 있던 수하들의 공포는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초절정 고수인 은명신군조차 턱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도, 도,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 이런 무공을……?’
방금 죽어가는 수하들을 보면서도 나가지 못하던 경비대장을 질책하던 그였다. 하지만 그 역시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안하던 그의 얼굴이 곧 펴졌다.
태진성이 정예인 태룡검단과 태룡무단을 이끌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태룡원의 남은 원로들도 올 것이고, 가주까지 나온다면 무황이라 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는 못 배길 터였다.
“무슨 일입니까?”
태진성의 질문에 은명진군은 또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태룡원 원로 여섯 분이 일각도 안 되어 모두 죽었단 말입니까?”
태진성은 놀란 듯 반문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적의 무공은 태웅천을 능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웬 놈인지 정체를 밝혀라!”
태진성은 정문에 서더니 커다랗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자 다시 외쳤다.
“남자라면 자신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함이 도의가 아니겠느냐?”
다시 정적이 흐르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너희 같은 졸개들과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가주에게 나오라고 해라.”
‘졸개? 저놈이! 잡히기만 하면 내 직접 사지를 잘라 개에게 먹이로 주마.’
태진성의 일어나는 살기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곧 나오실 게다. 그전에 네놈의 정체라도 밝혀라! 당가의 잔당이냐?”
태진성은 굳이 아버님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졸개가 아닌 소가주라는 사실을 나타냈다.
“내 수법을 보면서도 당가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견문이 짧구나.”
‘후우! 사람 열불 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군.’
태진성은 속으로 분노의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소리쳤다.
“목소리가 굵은 것을 듣자 하니 아미파는 아닐 테고, 그럼 청성파냐?”
“오룡세가의 소가주들 중 가장 존재감이 없다고 하더니, 겨우 아는 것이 그 삼파밖에 없구나. 너와 더 이상 대화하기 싫으니 가주에게 나오라고 해라.”
“저, 저, 저놈이!”
인내의 한계를 느낀 태진성이 뛰어나가려 하자 은명신군이 급히 앞을 막으며 말했다.
“소가주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젊은 놈입니다. 아무래도 천호무적검인 것 같습니다. 분명 저곳에 함정을 파 놓고 격장지계로 소가주님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은명신군은 악불군의 정체를 정확하게 유추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태룡원 원로 여섯 명을 혼자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은명신군 말이 맞다. 이럴 때 흥분하는 것은 적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때 태룡원의 원로 이십여 명과 함께 태웅천이 나타났다.
모두가 허리를 숙이며 앞길을 열자, 당당히 정문 앞까지 도착한 태웅천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곧 그의 검미가 좁아졌다. 그의 기감으로도 어떠한 기도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한 명 감지는 했다. 하지만 그의 내공은 삼사십 년에 불과해, 태룡원의 원로들을 죽인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태룡세가의 가주인 태웅천이다. 내가 직접 왔으니 약속대로 모습을 나타내라.”
태웅천은 이미 와서 상황을 다 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자 시신들에서 약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인영이 스르르 나타났다.
‘사술? 아니야 환술? 그런데 내공이 어째……’
테웅천은 악불군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자 살수들이 사용하는 은신술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보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술이나 환술을 사용하면 당연히 느껴져야 하는 사기(邪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 특이한 것은 나타난 자가, 조금 전 그가 느꼈던 삼사십 년의 내공을 가진 자라는 것이었다.
“나타났으면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느냐?”
“전 무림에서 천호무적검으로 불리는 천호방의 방주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은명신군은 자신의 예상이 맞자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웅천도 마찬가지였다.
“천호방과 본 가는 일면식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뭐냐?”
“태룡세가는 오룡세가의 일원으로 무림에서는 대표적인 배신자이자 부역 세력으로 이미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무림인으로서 징치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부역 세력으로 낙인을 찍는다는 말이냐? 우린 어지럽던 무림을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왔다. 원나라가 세워지기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천하를 어지럽힌 것은 너희들이 아니더냐! 더욱이 넌 나이로 보아 우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도 않았을 터, 위선자들이 모인 무림맹에 부화뇌동하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네겐 후일 큰 후회를 남길 것이다.”
“그거야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요. 전 정의를 세우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피를 보는 것은 싫어합니다. 지금이라도 가주님께서 태룡세가를 해체하고 무림을 완전히 떠난다고 약속하신다면 그냥 돌아갈 용의가 있습니다.”
악불군은 조용히 말하더니 갑자기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크게 말했다.
“또한! 태룡세가의 수하들과 식솔들 중 지금이라도 살고 싶은 자는 정문을 뛰쳐 나와라. 그럼 내가 보호해 줄 것이다!”
“이놈이!”
태웅천은 악불군이 대놓고 그들의 자중지란을 유도하자 분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태룡세가는 한마음을 똘똘 뭉쳐 본 가를 위협하는 세력을 물리칠 것이다. 네놈 역시 더 이상 도발을 한다면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다혈질이라고 알려진 태웅천의 이어진 말은 오히려 수하들을 동요시키고 말았다.
악불군의 말은 도가 넘어도 많이 넘은 발언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죽이려 들 법도 한데, 더 이상 도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보내주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것은 태웅천이 더했다. 하나, 지금 태룡원 원로 여섯 명을 간단히 죽인 악불군과 전면전을 하는 것은 안 좋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죽인다 해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방주님, 삼파가 모두 도착해서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악불군의 귀로 흑석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공포를 심어 주며 사기를 떨어뜨리는 시간은 이제 지난 것이다.
“다시 말한다. 열을 셀 동안에 당장 태룡세가를 떠나라. 그럼 산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티고 있다면 오늘 모두 죽을 것이다. 하나! 둘!”
또 다시 수하들을 흔드는 발언을 한 악불군이 수를 세기 시작하자, 태웅천은 좋게 끝내기는 틀렸다고 결정한 듯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죽여라!”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파 세력 중에서 악불군의 무공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런데 오늘 오대세가의 일원인 당문과 구파일방인 아미파와 청성파의 수많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새로운 무림의 전설을 써내려 갈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