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59화>
259화. 본격적(2)
태룡원의 최고수들과 간부, 거기에 태웅천까지 가세하자 급격하게 악불군이 몰리기 시작했다.
세 방향에서 일갑자 이상의 내력을 가진 고수들이 동시에 공격한다면 악불군이 맞이해야 하는 압력은 삼 갑자 이상이었다. 거기다 초식의 날카로움과 정교함 또한 지금까지의 상대들과 달랐다.
더욱이 태웅천은 담무룡과 맞먹는 무림 십대고수의 일인이었다.
악불군의 옷은 이미 이십여 군데가 찢어져 있었다. 검이 베인 곳도 있고, 갈퀴 같은 무기에 뜯긴 곳도 있었다. 하지만 피를 보이는 곳은 없었다.
‘가주님께 정말 대단한 은혜를 입었구나. 철포삼이 아니었다면 피를 많이 흘리고 힘이 빠졌을 텐데, 피부가 따끔할 뿐 전혀 충격이 없어.’
악불군은 담무룡에게 다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현상도 담무룡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철포삼이 비록 천하가 알아주는 외공 절기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자들은 쇠도 자를 정도의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초절정 고수였다.
철포삼이 방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피부가 쇠보다 단단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의 피부를 보호해 주는 것은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호신강기였다.
심법을 통해 받아들인 외부의 기를 단전에 축적하는 행동을 운기조식이라고 한다. 고수들이 상대를 보고 내공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단전에 쌓인 내공의 기를 감지해서였다.
한데, 악불군이 싸움 중에 보이는 내공의 강도는 족히 삼 갑자에 가까웠지만 단전에는 겨우 삼사십 년의 내공만이 축적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악불군이 심법을 통해 기를 모은 것이 아니라 천륭검보의 자세를 이용해 기를 모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단전이 아닌 몸 전체에 내공이 퍼져 있는 아주 특이한 신체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온몸에 퍼져 있는 내기는 악불군이 무공을 펼치면 저절로 뿜어져 나와 온몸에 기막(氣幕)을 형성했다. 그 기막이 검을 사용하면 검강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신법을 펼치면 그의 몸을 더욱 빠르고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효과가 바로 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호신강기 중 가장 익히기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는 반탄강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여 충격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태웅천과 몇몇 원로들의 내공은 이 갑자에서 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악불군도 내상이 조금씩 쌓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태웅천이 수하들에게 동귀어진을 각오한 전력을 다한 공격을 명했다면, 악불군으로서는 담수련의 말처럼 피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지금보다 더한 충격을 계속 받게 된다면 아무리 그라 해도 견디기 힘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악불군을 사로잡아 천륭검보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태웅천의 욕심이 상황을 오판하게 만들고 있었다.
분명 악불군은 여러 번의 타격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스스로 만든 무공들의 단점을 급속도로 보완을 하고 있었다.
악불군은 한번 당했던 무공에는 또다시 당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의 고전이 그의 무공을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드디어 반전을 시킬 시간이 왔다.
“불이다!”
“내원에서 불이 났다.”
사방에서 커다란 외침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악불군과 싸우던 자들 역시 불이 났다는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불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화가 분명했다. 하지만 소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아악……!”
이번에는 비명이 연이어 들리더니 또다시 비상 타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이제 시작인 모양입니다. 제 유인책에 이렇게 쉽게 넘어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악불군을 공격하던 자들의 심기를 흔드는 말이 모두의 귀를 울렸다.
어지간한 고수를 상대하더라도 싸우는 와중에 정신이 분산되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물며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악불군은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먼저 불이 났다는 외침에 고개를 돌린 자들부터 악불군의 눈에 걸리고 말았다.
방어에 치중하던 지금과는 달리 악불군의 움직임이 빨라지며 공격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잠깐의 방심은 커다란 피해로 나타났다.
“이, 이, 이놈이!”
순식간에 십여 명이 악불군의 검에 의해 죽어 나가자, 태웅천의 입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역시 정신이 분산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총단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불이 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댈 곳이 사라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계속 들리는 비명 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파열음은 기습한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 한 가지 알려 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당문과 아미 그리고 청성까지 삼파가 오늘 이곳에 같이 왔습니다. 살고 싶은 자들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니 빨리 도망가십시오. 지금 도망가는 자들은 쫓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싸우는 와중에 또다시 약 올리듯 터져 나온 악불군의 음성은, 크게 소리치지 않았음에도 모든 태룡세가의 무인들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이미 원나라의 사천 군부와 다루가치까지 북쪽으로 도망을 친 후 일 년 가까이 불안에 살던 태룡세가의 무사들에게 있어, 악불군의 한마디는 그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세가의 전 고수가 달려들었음에도 아직까지 악불군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을 더욱 동요하게 만들었다.
“으아악!”
“도망을 치는 놈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
누군가 한 명이 몸을 날려 도망을 치려 하자 간부 중 한 명이 재빨리 그를 죽이며 차단에 나섰다.
도망자를 제거한 간부는 모두를 향해 도망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끝을 보지 못했다.
땅에서 솟아나온 흑석영이 그의 배에 검을 깊숙이 박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악불군을 엄호하던 살수들이 행동을 개시하며 무차별 살상에 나선 것이다.
거기다 안쪽 공략에 성공한 삼파의 무사들이 정문까지 나타나자, 태룡세가의 무사들의 동요는 더욱 커졌다.
“도망치는 자들은 죽이지 말고 추격도 하지 마라!”
그리고 또다시 들려온 악불군의 외침.
이미 갈등하고 있던 태룡세가의 무사들에게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이 모든 상황이 담수련의 계획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는, 태웅천을 비롯한 태룡세가의 모든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죽여라!”
태웅천은 수하들이 사방에서 도망치자 악불군을 사로잡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천륭검보가 아니라 태룡세가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빠지자 이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악불군이 그들의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미 파악을 마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그동안 연구했던 무공들을 상당 부분 완성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죽이려면 아까 죽이셨어야지요. 이젠 늦은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자신의 진심을 얘기한 것이지만 태웅천에게는 화를 북돋는 말일 뿐이었다.
악불군 혼자 싸울 때도 크게 우세를 점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삼파 연합이 나타나고 흑석영을 비롯한 방주 호법 네 명까지 합세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싸움은 악불군의 검이 태웅천의 심장을 찌르면서 끝이 났다.
“아가씨, 악 방주님께서 태웅천을 죽였어요!”
보고 있던 사화가 감격한 듯 소리쳤다. 연화와 매향은 눈물을 줄줄 흘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강할지도 모른다가 아니고, 확실하게 강하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구나.”
삼파의 장문인과 수많은 정파의 무인들이 보는 앞에서 십대고수 중 일인인 태웅천을 죽였다.
그것도 수십 명의 절정 고수까지 합세한 싸움에서 이겼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이제 십대고수와 맞먹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무황들과 맞먹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바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보는 담수련은 가슴이 너무 벅차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악불군이 달려오면 안기고 싶었지만, 싸움이 끝나면 곧장 그녀에게 달려오던 그가 이번에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 그녀의 계획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삼파의 장문인을 완전히 악불군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이번 계획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태웅천을 제거함으로써 조성된 분위기는 이미 삼파의 무사들에게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때 삼파의 장문인들과 인사를 하고 그들이 생각할 겨를 없이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악불군의 마지막 임무였다.
삼파의 장문인들과 포권을 하는 악불군을 보는 담수련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었다.
* * *
명나라의 군사가 원나라에 승승장구하며 하북까지 진출하자, 아직 남쪽에 남아 있던 원나라의 잔당들과 부역자들의 움직임 역시 바빠졌다.
혹시라도 전세가 반전하여 원나라가 남하를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자, 잔당들은 도적화하여 사방에서 온갖 잔혹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부역자들 역시 변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예 문파 자체가 사라지고 종적을 감춘 자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를 경악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천호무적검이 무림 십대고수인 태웅천을 죽인 소식은 순식간에 천하로 퍼져 나갔고, 이미 백대고수 상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그의 위상은 이제 무황급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는 천호무적검의 명성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황제가 무림십왕 중 네 명을 먼저 봉한 것이다. 세 명의 이름은 누구나 이미 짐작하고 있던 터라 큰 화제가 안 됐지만, 마지막 한 명이 문제였다.
바로 악불군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연이어 겹쳐지는 소문은 이십 대의 청년인 악불군을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절대 고수로 변모시킨 것이다.
작은 정청.
천무사왕과 현기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현기수사.”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태웅왕이었다.
“예.”
“이 정도면 이미 우리가 어떻게 하기는 틀린 것 아니겠나?”
“맞네. 명성에 흠집을 내려고 해도 시기라는 것이 있는 법이야. 지고 있는 태양도 아니고 지금 막 거침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비난한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한세도왕까지 태웅왕의 말에 동조하자, 현기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호무적검의 능력이 제가 상상한 것 이상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를 몰락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소궁주님을 위한 것은 알겠지만, 잘못하면 본 궁의 명성까지 누를 끼칠 수 있네. 지금 상황에서 괜한 짓을 하다가 천호무적검이 무림맹에 반기라도 든다면 괜한 강적만 하나 더 만드는 꼴이 될 걸세.”
팔수권왕까지 비관적으로 말하자, 현기수사는 아니라는 듯 다시 말을 받았다.
“이미 백룡신권을 통해 제갈 군사에게 천호무적검의 문제점을 전했습니다. 제가 그 정보를 본 후 느낀 것을 말씀드린다면 아주 심각하다였습니다. 제갈 군사 역시 암중으로 알아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게 전해진 것이 벌써 보름 전 아닌가? 내가 듣기로 그사이 제갈 군사가 이미 천호무적검을 만났다고 하던데, 맞나?”
“맞습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아는가?”
“독대를 했기 때문에, 알아낸 것은 아직 없습니다.”
“그 독대가 끝나고 갑자기 사천으로 날아가 태룡세가를 없앴네. 심지어 태웅천을 직접 죽이기까지 했어. 제갈 군사도 이미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나?”
“저도 어느 정도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갈 군사님은 맹이나 맹주님을 배신할 분이 아닙니다. 천호무적검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건, 백룡신권이 전한 정보의 진위는 확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가 나온다면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니시지요.”
“난 지금 우리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네. 내가 천호무적검의 행태를 모두 달라고 하여 읽어 봤더니 놀라울 정도로 양민들이 좋아할 행동만 하고 있어. 거기다 큰 사건을 해결하면 순식간에 천하에 퍼지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되도록 계획을 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완벽해. 우리도 소궁주님을 전면에 내세워 이름을 알려 나가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현기수사가 있기 전 천제무황의 머리 역할을 하던 파금왕의 말에, 현기수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계획은 너무 변수가 많아 책사라는 그조차도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좀 더 면밀하게 악불군의 주위를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