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60화>
260화. 변화의 중심(1)
악불군은 며칠째 당가에 머물며 삼파의 장문인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선천적인 충직함과 겸손 그리고 상대에 대한 진정성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믿음과 호감을 동시에 주는 악불군의 장점이었다.
그 덕에 당치성과 운비자는 물론 묘인신니까지, 악불군과 대화하며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그런 무공을 지니고 계시려면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으셨을 것 같은데, 정말 박학다식하시군요.”
묘인신니는 악불군이 자신들의 모든 질문과 관심사, 그러니깐 역사, 종교와 문화 거기에 의술 이르는 방대한 분야에서 막힘없이 답하자 놀란 듯 말했다.
“제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아주 훌륭한 공부를 시켜주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제겐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악불군은 잠룡세가에 들어가기 전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배운 공부가 전부였다.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것을 빨리 습득을 했지만, 당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책 자체가 많지 않았고 공부를 한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아서 아는 것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그를 만날 때마다 그날 자신이 읽은 책들이나 공부한 것을 악불군과의 대화를 통해 알려 주었다.
가르친다는 의미보다는 악불군과 대화를 하는 재미 때문이었지만, 문창현이 감탄할 정도로 그녀의 독서량은 엄청났기에 악불군 역시 엄청난 양의 지식을 그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특출한 기억력은 모든 것을 머리에 착착 쌓아 두고 있었다.
“좋은 제자와 좋은 선생이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운비자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며 동의를 했다.
하지만 가장 기분이 좋은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담수련이었다.
악불군을 띄워 주기 위한 장소이기에 그녀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나서면 악불군의 권위에 흠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던 당치성이 그냥 둘 리 없었다.
“이번 계획을 담 군사께서 다 짜셨다고 하던데, 정말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적은 피해만으로 태룡세가를 없앨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담수련은 대놓고 자신에게 질문을 하자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제 계획이 가능했던 것은 방주님 덕이었습니다. 태룡세가의 간부들과 태웅천을 방주님께서 잡아 놓지 못했다면 정말 무리한 계획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모든 공을 악불군에게 돌리는 그녀의 말에, 당치성은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담 군사께서 천호방의 모든 계획을 구상하실 것 같은데, 악 방주께서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가 혹 담 군사 때문입니까?”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상당히 민감한 질문이었기에, 한참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도 묻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에 가입한 그들로서는 천호방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결국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이미 예상한 듯 악불군이 대신 나섰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어찌 군사께서 결정하겠습니까? 모두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악 방주께서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운비자의 질문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파의 장문인은 물론 악불군을 만나러 왔던 수석장로와 당용, 그리고 몇 명의 각 파의 장로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이중, 무림맹에 지금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어. 이들도 설득시키면서 무림맹도 자극하지 않도록 말을 잘해야 해.’
사천에 온 가장 중요한 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악불군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저는 무림맹이 결성된 취지에 대찬성합니다. 무림맹이 정파의 결속력을 강하게 해 주고, 혼란한 지금 시기에 다시 문파를 재건할 정파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돼 줄 것이니까요. 물론 호시탐탐 세력을 확대하려는 구천마성이나 혈해마계를 막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요.”
“그것을 잘 아시는 분이 가입을 안 하니, 맹 내에서도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당치성의 반문에 악불군은 무림맹에서 천호방에 대해 많은 얘기가 이미 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서로 간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솔직함만큼 좋은 것이 없지요.”
“지금 제가 천호방의 방주라고는 하지만 나이도 젊고 여러 어르신들처럼 영웅회에 들어가 정파를 위해 한 일도 전혀 없습니다. 그럼 제가 무림맹에 들어가면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순간 모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높은 지위를 받아도 우선 사양부터 하는 정파의 특성상, 자신의 대우 문제를 대놓고 꺼내는 악불군의 말은 사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하지만 너무 솔직한 그 한마디로 인해, 악불군이 꺼내는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믿음을 주게 되었다.
“그 문제라면 우리 삼파의 장문인이 적극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하도록 무림맹에 건의하겠소이다.”
“아닙니다. 무림맹에서 제가 필요할 때 제의를 해야지요. 어르신들이 나서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제가 사천에 온 취지가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은 이유는 그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유비와 제갈량 얘기가 나온 이상, 악불군이 원하는 것은 모두에게 확실하게 전달이 되었다.
무림맹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기 전에는 스스로 무림맹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악불군이 이번에 보인 활약은 그 정도 대우를 받아도 될 정도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인지시켰다.
하지만 악불군의 말대로 그는 젊었고, 무림맹이 창설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를 삼고초려까지 하며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무림맹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악불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인인 이상 명예가 상당히 중요하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무림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인데 다양성이 약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무림맹은 맹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 일사불란하게 그 명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각 파가 처한 상황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은 될지언정 반대의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중원 무림을 장악했던 이민족의 황조가 망하고 새로운 황조가 세워지고 있는 혼란의 시기에 무림맹의 존재는 나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방주께서는 생각이 다른가 봅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전 무림맹 창설이 필요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만 모든 정파인들이 획일적으로 움직이게 된다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천호방처럼 가입하지 않은 정파도 있어야, 실타래 같이 얽힌 정치적인 사안이 벌어졌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전 무림맹에 가입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세력으로 남겠다는 것이지요.”
무림맹은 원래 정파의 모든 세력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반면, 구천마성이나 혈해마계는 세력 확대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양쪽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중립적인 세력이 없다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악불군의 답에 직접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담수련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당치성을 비롯한 삼파의 장문인은 물론 모두의 머리가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일원인 그들에게 악불군의 말은 해석 여하에 따라 우군이 될 수도 있고, 적까지는 아니라 해도 가까이해서는 안 될 중도 세력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악불군의 요구를 허락했고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받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대화를 나누면서 악불군의 매력에 빠진 그들은 좋은 쪽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악 방주께서 자신만의 신념이 있으시니 저희도 그것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도 당치성이 가장 먼저 악불군을 받아들이기로 판단하고는 입을 열었다.
당문에서 가주는 왕이나 마찬가지로서 그의 결정은 그대로 법이었다. 하지만 아미파나 청성파는 장로들과의 협의가 먼저였다. 당치성의 결정이 빨리 나온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당치성이 인정한 이상 묘인신니와 운비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들에게 자신들이 그런 결정을 한 이유에 대해 설명할 말이 생긴 것이다.
그때, 밖에서 몇몇 제자가 들어서더니 쪽지를 건넸다. 그리고 그 쪽지는 곧 장문인들에게 전달이 되었다.
“역시 대단하시구려!”
당치성은 악불군을 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무슨 뜻이신지요?”
악불군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의아한 듯 반문했다.
“황상께서 무림십왕으로 우선 네 분을 봉했는데, 거기에 방주님을 포함해 공포했다 하는군요.”
“제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악불군은 짐짓 어불성설이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삼 일 전 무림맹에 소식이 전해졌고, 이미 중원 전체에 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사천은 감숙과 더불어 언제나 소식이 좀 늦게 전해지지요.”
“무량수불! 빈도도 청성파를 대표해서 경하드리겠습니다.”
“빈니도 경하드립니다.”
“솔직히 제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축하해 주시니 저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천호방은 사천을 지배하시는 세 문파와 언제나 친구로 남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가는 천호방을 은인으로 생각할 것이니,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을 주십시오. 그럼 본 가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최우선으로 드리겠소이다.”
“청성파 역시 천호방과 계속 같이할 것입니다.”
“아미파에서 절강으로 탁발을 나가면 공양은 해 주시겠지요?”
묘인신니의 말에 악불군은 환한 미소를 지며 받았다.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천호방의 최고의 손님으로 대접하겠습니다.”
‘됐다! 드디어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겼어.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다른 문파에서도 우리와 친구가 되려고 할 거야.’
그 장면을 본 담수련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좋아서 환호성이라도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고비를 무사히 넘어간 것이었다.
첫술에 배부르겠냐는 말도 있지만, 첫술이 없이는 절대로 배부를 수 없는 법이었다. 처음 설득이 어렵지, 한번 이런 우호적인 관계가 맺어진다면 다음부터는 더욱 쉬워질 것은 분명했다.
* * *
“이놈 보게? 정말 강적일세…….”
부제 최학의가 가져온 보고서를 읽던 혈우대마종은 놀랍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까지 보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이제 변수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학의의 말에 혈우대마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웅천의 무공은 전주들 무공에 비해 한 수 아래이긴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당할 수준은 아닌데, 어린놈이 정말 발전이 빠르구나. 그리고 그 의심 많은 주원장을 어떻게 구워삶았을까?”
“얼마 전 황궁에 갔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그때 이미 얘기가 다 된 것 같습니다.”
“주원장이 무림십왕 얘기를 하고 일 년 후 영웅대회를 연다고 하기에 절묘한 계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계책을 세울 만한 놈들이 주원장 옆에는 없단 말이야.”
“유백온이 있지 않습니까?”
“유백온이 똑똑하긴 하지. 하지만 그놈은 군사 전략가지, 무림을 읽는 책사는 아니야.”
“그럼 설마, 악불군이 그런 계책을 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왜? 넌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무림십왕이나 영웅대회는 무림인들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한 자가 만든 계획이 분명합니다. 악불군은 나이도 젊고 아직 강호 경험도 없는데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다면, 본 교의 대업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강적이라고 하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