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61화>
261화. 변화의 중심(2)
“그럼 어떻게 할까요?”
“지금 어디서 악불군 제거를 맡고 있느냐?”
“천마전에서 아직 원나라가 버티고 있어 움직이기 어렵다 하여 혈마전에 넘겼는데, 혈마전 역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식-!
최학의의 말에 혈우대마종은 미소를 지었다.
“놈들이 못된 것은 잘 배웠군.”
사대마전의 전주인 마종들은 지위상으로는 사제인 일월신마보다 낮았다.
하지만 그들은 혈우대마종의 진전을 이어받은 직전 제자들로, 사실상 혈교의 이인자들이었다. 넷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음 대 교주 자리를 노리는 잠재적인 적들이기 때문이었다.
절대 권위를 지닌 그의 명을 감히 따르지 않고 있는 것임에도 그가 화내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제자라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그렇게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비록 진정한 천년마교의 적통을 잇지 못해서 혈교라 칭하고 있었지만,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천년마교의 전통만은 이어 가고 싶어서였다.
“교주님께서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명령을 내리시면 전주님들도 따를 것입니다.”
“서로 손해를 보기 싫어 미루고 있는데, 말한다고 듣겠느냐? 악불군이 우리 대업에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거하려고 할 테니 놔둬라.”
“계속 이대로 두면 점점 거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수하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더 커지면 제거가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놈의 무공이 발전하는 속도를 보면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기는 한데……. 흠! 그런데 말이다. 이 아이 움직임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안 드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쯧! 쯧! 너랑은 영 대화가 안 돼. 혈뇌전주는 어디 있느냐?”
“혈뇌전에서 뭔가 분석을 한다고 보름째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됐다. 지금 나온 것 같다.”
혈뇌전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거의 삼백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대화 중 그 정도 거리에서의 상황을 안다는 것은 최학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그 말을 믿었다.
그가 아는 혈우대마종은 이미 인간이 아닌 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각쯤 지나자 밖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혈뇌입니다.”
“들어와라.”
그러자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대단히 큰 노인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덩치까지 작아,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분석을 했다고.”
“예.”
“무슨 분석이냐?”
“천호무적검으로 불리는 천호방의 방주, 악불군이라는 자입니다.”
혈우대마종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
“언제나 가지고 오나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좀 늦었구나?”
“그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어서 좀 더 모아 확실한 분석을 하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최학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일 수박에 없었다.
혈뇌는 이미 혈우대마종의 관심사를 알아채고서 악불군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었고, 혈우대마종은 혈뇌가 악불군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어떤 분석을 했을지 궁금하구나. 말해 보아라.”
“예. 악불군은 절강 어디선가 무공을 익혔습니다. 또한 무공이 느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릅니다. 정파를 표방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도 협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정파와 어울리기에는 꺼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악불군을 옆에서 보고 기록한 듯 그는 주르륵 거침없이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혈우대마종은 다시 물었다.
“그게 다냐?”
“아닙니다. 그는 태양천 아니면 어찰단과 시비가 있습니다. 주원장과의 인연도 언제 어디서 갖게 되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기회를 아주 잘 살린 것 같습니다. 그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천상신녀라 불리는 여인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가 그 여인을 보호한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태양천과 어떤 시비가 있었는지는 알아냈느냐?”
“거기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태양천의 천주가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안으로 추론됩니다.”
“이유는?”
“혈마전주의 보고에 의하면 철뇌마궁이 강서성에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당시 천호무적검이 강서를 지나고 있었는데,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절묘합니다. 그리고 철뇌마궁은 태양천 선대 원로로서 태양천주가 아니라면 보낼 수 없는 자입니다.”
“철뇌마궁은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
“나타났다는 것만 보고되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합니다. 만약 천호무적검을 찾은 것이 맞다면 죽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천상신녀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느냐?”
“그녀의 정체는 어디에서도 추론할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호무적검의 최대 약점이 그녀라는 심증은 굳혔습니다. 그 여인을 이용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천호무적검을 제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혈뇌의 보고를 다 들은 혈우대마종은 최학의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천호무적검의 움직임에서 특이한 점은 느끼지 못했느냐?”
“느꼈습니다.”
“뭐냐?”
“천호무적검의 명성이 높아가는 과정이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경극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만들어진 것 같단 말이지?”
“예.”
잠시 생각하던 혈우대마종은 다시 물었다.
“그럼 너라면 그런 계획을 짤 수 있겠느냐?”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실행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 너만이 아니라 나라도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을 게다. 너무 광범위하고 연관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되면 변수 역시 우리의 예측을 벗어날 정도로 많아지지. 그런데 정말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까지 옮겨서 지금의 천호무적검이 만들 정도의 머리라면, 우리의 존재까지도 염두에 대비책을 만들어 놨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제가 교주님께 그 말씀을 드리지 않은 이유는, 계획보다는 우연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거기에 대한 대비책도 생각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분석이었다. 특히 천호무적검의 약점을 찾아낸 것은 정말 잘했어.”
“추측일 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혈뇌의 추측이 틀릴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구나. 그럼 대비책을 말해 보거라.”
“그자의 무공에 대해 분석한 결과, 그의 무공이 발전하는 속도가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릅니다. 지금이야 교주님께서 당연히 이기시겠지만, 오 년 후에는 교주님께서도 최소한 백 초는 싸워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 년 이후는 어떠냐?”
“그자가 사람인 이상, 어느 한계에 도달한다면 정체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속도로 계속 발전한다면 이십 년 안에 교주님께서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질 것입니다. 하여 전 천호무적검을 삼 년 안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 년까지는 괜찮다면서 삼 년 안에 죽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그 아이가 두려운 모양이구나?”
“그게 사실은…….”
혈뇌가 즉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혈우대마종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가 자신의 앞에서 이런 경우는 뭔가 심각한 사안이 있었을 때뿐이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지 똑바로 얘기하거라.”
“혈응이 사라진 것이 천호무적검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혈응이 그 아이에게 죽었다는 것이냐?”
잔잔한 미소까지 보이던 혈우대마종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만큼 혈응이 그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죽었다면 저희가 찾아내지 못할 리 없습니다.”
“그런 뭐란 말이냐?”
“혈응이 천호무적검을 따라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혈응은 한번 주인을 섬기면 절대 배신을 하지 않는다.”
“혈응은 만수신군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만수신군은 내게 죽었다. 혈응은 영물로서 주인보다 강한 자를…….”
말을 하던 혈우대마종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혈뇌, 넌 지금 혈응이 그 아이가 나보다 강하다고 판단하고 주인을 바꿨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혈응이 사라진 과정이 너무 이상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대입해 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역시 혈우대마종은 그냥 마인이 아니었다.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그는 다시 포근한 할아버지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 세상은 신기한 일이 많지. 혈응이 판단을 잘못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정확하게 했을 수도 있겠지. 어떤 이유건 천호무적검을 죽일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구나.”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악불군에 대해 점점 강한 흥미를 느끼는 그였다.
“그리고 악불군을 마전에서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은 피해가 너무 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혈공자와 혈낭자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혈공자와 혈낭자는 본 교가 탄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신들의 자손들이다. 죽을 것을 알면서 그 애들을 보낼 수는 없다.”
천년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혈교는 혈통을 매우 중시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교의 진골 혈통이 아닌 경우 교주의 지위에 올라갈 수 없었다.
혈공자나 혈낭자는 지금은 이따금 무공이나 수련하면서 편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혈교의 지도부가 모두 죽는 변이 생긴다면 교주는 그들 중에서 뽑도록 되어 있었다.
“천호무적검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는다면 큰 피해는 없을 것입니다.”
“계획이 있느냐?”
“혈공자와 혈낭자를 이용해 천호방에 간세를 심을까 합니다. 어떤 전쟁이든 내분은 아주 중요한 병법입니다. 신생 문파인 천호방의 방도들은 아직 충성심이 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미인계와 미남계를 이용해 포섭하여 균열을 만들까 합니다.”
“가능하겠느냐?”
“만물상단을 이용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의 마기를 교주님께서 없애 주셔야 합니다. 천호무적검이라면 분명 혈공자와 혈낭자의 몸에 깃든 마기를 분명 감지할 것입니다.”
“네 계획은 알았으니 이만 가 보거라.”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급하면 체한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기다린 것도 때를 기다리느라 그런 것이다. 빨리 제거하면 더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죽이려 들다가는 피해만 속출할 뿐이야. 우선은 이 아이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으니, 새로운 정보가 오는 대로 즉각 내게 가져오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혈뇌가 나가자 혈우대마종은 최학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으니 너도 이만 가거라.”
“예!”
최학의까지 나가자 뜻밖에도 혈우대무종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수십 년을 내 상대를 만나지 못해 무척이나 심심해했는데, 이제 재미있어지겠군.”
혈우대마종이 인정한 고수는 대공의 사부인 전대 태양천주와 구문황뿐이었다.
무황들의 합공으로 심장에 검이 박혔던 그는 무려 일 갑자 가까이 자신의 무공을 온전히 복원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복수를 하기 위해 사대마종을 제자로 들이고 혈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십 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드디어 자신의 무공을 예전 수준 이상으로 올리는 데 성공을 했다.
그는 무공광이었다. 그가 무림을 횡행하며 너무 많은 고수들을 죽인 탓에 공적으로 지목되어 천하를 상대로 싸웠지만, 그는 죽이고 싶어 죽인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죽인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몸이 다 나은 후의 세상에는 그가 인정했던 고수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다는 생각에 매우 상심했었다.
그런데 상대가 될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그가 대단히 감탄했던 구문황의 무공을 사용하는 아이였다.
“그래, 마신님의 뜻이라면 내가 직접 너를 죽이러 갈지도 모르겠구나.”
결정을 한 그는 앞에 놓인 술을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고금 제일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마신급의 마인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악불군은 어떤 생각을 할까…….
* * *
“아가씨, 기분이 무척 좋으신 것 같습니다.”
삼파의 장로들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오른 담수련과 악불군은 언제나처럼 선두의 자리에 앉았다.
“소군이 드디어 인정을 받기 시작했잖아. 솔직히 나 눈물 날 뻔했어.”
“그 정도였습니까?”
“그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소군이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오대세가 중 수좌라는 말까지 듣는 당문의 가주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어찌 안 기쁘겠어. 나 정말 행복한 것 같아.”
“아가씨께서 행복하다니까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방해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한 곳을 보며 말했다.
“또 수적이야?”
“아닙니다. 뜻밖의 귀한 손님들인 것 같습니다.”
귀한 손님이라는 말에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을 바라본 담수련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