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67화>
267화. 암중 세력(2)
“저희와 우의를 다지고 싶은 자가 올지, 거리를 두는 자가 올지 궁금했는데, 저희와 친해지기 싫은 자가 온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담수련은 살짝 미소를 지며 답했다.
“이런 경우에는 군사가 아니라 방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겁니다.”
“그런가요? 사 호법!”
“예!”
“비록 힘없는 신생 문파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 방의 방주인데, 배첩도 없고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따라오라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이 아니겠나?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싶은 분이 오는 것이 예의일 걸세. 따라갈 수 없다고 전하게.”
커다랗게 말하는 둘의 대화는 고스란히 하연목에게도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효조는 커다랗게 외쳤다.
“방주님께서는 보고 싶은 분이 오는 것이 예의라고 하십니다. 거절하니 배를 비켜 주십시오.”
무림맹 수상 경비 대장이라는 지위를 대단하게 여기던 하연목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림맹은 정파의 총 연합체이자 정신적인 지주 같은 곳이오. 그런데 거절하다니, 지금 누가 부른 것인지는 알고 그러는 것이오?”
“무림맹이 정파의 정신적인 지주일지는 몰라도 총 연합체는 아니지요. 무엇보다 천호방은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은 정파입니다.”
드디어 악불군이 사효조의 앞에 서며 모습을 드러내자, 하연목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저 운이 좋아 이름을 날린 젊은 무인으로 알고 있던 그는 악불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연목은 금방 태세 전환을 하고 말았다.
“천호방주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무림맹의 장로님이시자 천무성궁의 호법이신 파금왕께서 방주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하 대협이라고 하셨지요?”
악불군의 질문에 하연목은 긴장한 표정으로 급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천호방의 수하를 보내 파금왕 장로님께 다짜고짜 보고 싶으니 와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그건……”
“제가 나이도 어리고 배분도 많이 낮으니 강호의 선배님의 자격으로 후배를 불렀다면 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 대협께서는 분명 제게 천호방주라고 지칭을 하셨습니다. 제가 만약 지금 상황에서 하 대협을 따라 파금왕 장로님을 만난다면 천호방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정파의 장로급의 인물이 오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한 문파의 수장이 그런 모습을 수하들에게 보인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요?”
정파인들이 가장 중요시한다는 체면이란 단어까지 나오자 하연목은 얼굴이 붉어졌다.
파금왕은 분명 그에게 정중하게 청하라고 했다. 그에 하연목은 나름 정중하게 말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 하연목이 그동안 무림맹의 외곽인 수상 경비대장을 하며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장로님께서는 정중하게 초청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의가 부족해 방주님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습니다. 사과드릴 테니 용서하시고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예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방금 하신 말은 사과라고 보기는 어렵게 느껴지는군요. 이제 뱃길을 여십시오. 만약 계속 앞을 가로막아 생기는 불상사는 모두 무림맹의 책임이 될 겁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매몰차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악 방주님!”
당황한 하연목이 급히 그를 불렀지만 더 이상 그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빨리 길을 열어 주십시오!”
이어지는 사효조의 외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본 하연목은, 다른 무인들조차 악불군의 기도에 다 질려있는 것을 보자 결국 결단을 내렸다.
“전부 물러서라.”
그리고 그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천호방의 배를 보며 그는 급히 말했다.
“장로님께 가야겠다. 최대한 빨리 배를 몰아라.”
* * *
“아버지, 저를 죽이고 싶으십니까?”
족히 백 개는 되어 보이는 장침을 온몸에 꽂은 채 사지를 만년한철로 된 고리에 묶인 화정무는 화우성의 말에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내 죄인 것을,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이렇게 욕을 보이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더 큰 불효다!”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화룡무동에서 조사님의 무공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발견하지 못한 유산을 제가 발견했다는 것은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전 아버지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 생사결을 통해 제압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 인정하시고 제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셨다면 이런 불효를 저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네 스스로 불효라는 것을 안다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아라. 이 아비를 아직도 모르느냐? 난 죽는 한이 있어도 네게 가주 자리를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다.”
화우성은 무공을 완성하고 나온 후 며칠 기회를 보다가, 정말 전광석화같이 화정무를 제압하고 스스로 가주가 되었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황실에서조차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경우는 생각 외로 많았다.
하지만 무림세가에서는 가주에게 특별한 과오가 없는 이상 가주 찬탈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가주의 심복들이 순순히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까지 다 죽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림 세가로서의 운용이 힘들 정도로 전력이 상실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지금 화룡세가는 구천마성의 공격을 언제 받을지 모를 비상 상황이었다.
화우성이 화정무를 제압하고 가주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저항이 없는 이유는 그가 가주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정무를 죽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화정무의 심복들이 다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우성 역시 무림맹이 화룡세가를 부역자로 특정하고 제거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오룡세가 중 원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하북에 있는 철룡세가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문이 몰락했다는 보고도 이미 듣고 있었다.
그는 화룡세가의 전 힘을 모아 구천마성을 광동으로 몰아내고 호남 남부를 완벽하게 장악한 후, 무림맹과 일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의 전력 손실도 있어서는 안 됐다. 더욱이 그는 화룡세가의 숨겨진 전력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화정무가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찾지를 못한 것이다.
그가 어떻게든 화정무를 설득해 합법적으로 가주 자리를 이어받아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이유였다.
하지만 오룡세가의 가주들 사이에서 능구렁이라는 말까지 듣던 화정무가,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화룡세가가 멸문하는 것을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오히려 화룡세가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전 그래도 적들을 물리칠 복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화룡세가를 정천보로 위장한 후 어떻게든 생존만 하려는 전략을 짰습니다. 무림맹이나 구천마성이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네가 경험이 일천하다는 증거다. 정천보가 약하다면 그들은 정천보가 화룡세가의 위장한 세력이라며 공격을 할 것이다. 하지만 강하다면 알아도 모른 척할 것이다.”
화정무는 화룡세가의 정예들을 정천보로 은밀히 이동시키고 화룡세가는 그들에게 희생양으로 내줄 생각이었다. 화룡세가는 부역 세력이기에 희생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없애야 하지만, 정천보는 부역 세력이 아니었다.
정천보를 공격했다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정천보를 신생 문파로 인정해 주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혼란의 시대.
죽느냐 죽이느냐의 약육강식의 힘이 지배하는 지금, 화정무는 정천보로 변신을 하는 것이 생존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젊은 화우성은 달랐다.
“아버지의 방법은 오로지 운을 바라는 것입니다. 전 그렇게 비겁하게 살아남는 것보다는 그들과 천하를 두고 쟁패를 벌일 것입니다.”
“넌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화룡세가와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잠룡세가와 마룡세가 그리고 테룡세가까지 전부 멸문했다. 너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룡세가 역시 몰락하게 만들 것이야!”
“태룡세가가 멸문한 것은 저도 들은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뇌옥에서도 아버지께 보고를 하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군요?”
“내가 화룡세가를 다스린 것이 삼십 년이 넘는다. 지금 너를 가주로 인정하는 수하들이 몇 명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더욱이 넌 화룡세가의 비밀 조직을 지휘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네가 지금 장악한 것은 진정한 화룡세가의 절반밖에 안 된다.”
“제가 진짜 불효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보고를 듣고 있는 것 같으니 지금 상황은 아실 것입니다. 버티시면 버티실수록 화룡세가는 점점 더 위험해집니다.”
말을 마친 화우성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듯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의 표정은 다급함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가 화정무에게 화룡세가를 살리기 위해 구천마성을 광동으로 내쫓고, 무림맹과도 일전을 불사할 것 같이 말했지만 그의 가장 큰 목표는 담수련을 만나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신조차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상태로는 그녀를 만나 봐야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연 매, 죽지 말고 살아 있어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해줄 것이야.”
담수련을 생각하는 남자들이 생각 외로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그녀가 이미 죽었거나 살았다 해도 무척이나 힘들게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룡세가가 멸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담수련은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배를 산 것은 너무 잘한 결정 같아.”
행복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은 담수련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배 여행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 배를 사자고 했을 때는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좀 머뭇거렸는데, 막상 사 놓고 보니 편하기는 합니다. 이번 외유도 이 배 덕분에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가능했고요.”
“내가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이 성공하면 기분은 좋지만, 일이 안 풀렸다 해도 크게 마음 안 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잖아.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실패하는 거니까. 내가 이 배를 구입하기를 잘했다는 것은 일 때문이 아니고, 소군하고 이렇게 여행처럼 다닐 수 있어서 한 말이야.”
“솔직히 저도 아가씨와 이렇게 여행하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입이 살짝 튀어나왔다.
“좋으면 좋은 거지, 좋기는 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야?”
“아가씨 건강 때문이지요. 잠룡세가를 나온 이후 맘 편히 제대로 쉬어 본 적이 거의 없었지 않습니까? 마차에서 자고 노숙을 한 적도 많고, 이제 좀 쉴 수 있었는데 또 이렇게 긴 여행을 하셨으니, 체력이 고갈이라도 되셨을까 좀 걱정이 됩니다.”
그제야 다시 입이 들어간 담수련이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힘들고 체력이 소진될 때는 소군이 안 보일 때야. 난 소군만 옆에 있으면 절대 안 힘드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평범한 여인의 얼굴로 역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눈에는 그 모습조차 너무 예뻐 보였다.
“참! 소군?”
“예.”
“장보주의 그림에서 뭔가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게 뭐야?”
계속해서 여러 일이 겹치면서, 악불군은 그가 발견한 것을 아직 담수련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담수련이 그린 그림 여러 장을 꺼냈다.
“제가 의미 있게 본 것들만 몇 장 추려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악불군은 그중 두 장을 꺼내 탁자에 깔았다.
“이것만 봐서는 느껴지시는 것이 전혀 없지요?”
“응 내가 그린 거라 아주 자세히 아는데, 특별한 것을 아직 찾지 못했어.”
“그럼 이렇게 한번 보겠습니다.”
악불군은 두 그림을 겹치며 다시 말했다.
“이 그림과 이 그림을 겹치면 묘한 것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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